'인격권' 침해에 맞선 어느 도서관 이용자

[인권위를 찾는 사람들]시흥시립도서관 인격권 침해사건 진정인 김희중씨

등록 2004.10.29 14:46수정 2004.10.30 1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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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김희중 씨는 시립도서관의 CCTV의 열람실 녹화와 주민등록번호를 넣어야 하는 무인좌석발급기의 문제점에 대해 국가인권위에 진정을 제기해 시정을 이끌어 냈다.

김희중 씨는 시립도서관의 CCTV의 열람실 녹화와 주민등록번호를 넣어야 하는 무인좌석발급기의 문제점에 대해 국가인권위에 진정을 제기해 시정을 이끌어 냈다. ⓒ 인권위 김윤섭

2003년 11월의 어느 토요일. 사법시험 준비생 김희중씨는 여느 때처럼 시흥시립도서관을 찾았다가 깜짝 놀랐다. 평소 좌석표를 나눠주던 도서관 직원은 보이지 않고, 대신 무인좌석발급기가 놓여 있었던 것이다.

도난사고 등을 이유로 2003년 2월 열람실 내부에 설치한 CCTV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았던 김씨는 '모든 열람실 이용자는 주민등록번호를 입력한 뒤 좌석표를 받으라'는 안내문구 외 '좌석표를 3회 반납하지 않을 경우 도서관 이용을 불허한다'는 대목에서는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김씨는 시흥시립도서관 인터넷 사이트에 무인좌석발급기 설치에 따르는 문제점을 지적하는 글을 올렸다. 법률적 근거도 없이 기계가 도입됐으며, 도서관 이용자에게 주민등록번호 입력을 강요하는 것은 인격권 침해라는 것이 그의 주된 주장이었다.

그러나 도서관측은 아무런 답변도 내놓지 않았다. 이에 김씨는 새로운 시스템이 본격적으로 시행되기 전에 문제를 해결하고자 도서관에서 벌어진 일을 원고로 정리해 한겨레신문사에 보냈고 그의 주장이 지난 해 11월 13일자 <한겨레>에 실리면서 상황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언론보도는 도서관측을 공개 논쟁의 자리로 끌어들이는 구실을 했다. 그러나 도서관측은 문제의 핵심을 비켜가며 무인좌석발급기 도입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열람실 이용자들의 좌석 맡아 놓기, 1인 2좌석 이상 사용, 일부 사용자의 좌석 낙서, 좌석 이용의 편중 현상이 도서관측이 공개한 기존 방식의 문제점이었다.

이에 대해 김씨는 "중요한 것은 규제가 아니라 자율"이라며 의견 수렴도 거치지 않은 도서관의 행위를 비판했다. 이 과정에 시흥시의 한 지역신문이 도서관 출입 논란을 보도했고 사태는 감정싸움 양상으로 치달았다.

"어느 날 갑자기 제 글이 게시판에서 사라지고 정체불명의 인신공격성 글이 등장했어요. 이런 비민주적인 행위에 굴복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김씨는 자신의 주장과 신문기사를 담은 유인물을 만들어서 도서관 이용자들에게 배포했다. 그러자 시흥시립도서관 인터넷 게시판에는 "김씨가 시민들을 선동하고 있다"는 글이 등장했다.

결국 김씨는 도서관 안에서의 싸움이 벽에 부딪쳤음을 느끼고 도서관 밖에서 제도로 해결할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시흥시청에 민원을 접수했다. 답변은 황당했다. 영국이나 프랑스에서는 도서관 출입시 몸수색까지 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청와대에 민원을 넣자 얼마 후 경기도청에서 만나자는 전화가 왔다. 그러나 아무도 그를 찾아오지 않았다. 다음은 감사원. 이번에도 소관업무가 아니라고 했다. 이어서 찾은 곳이 국민고충처리위원회. 김씨는 이곳에서 '국가인권위에 연락해 보라'는 답변을 들을 수 있었다.

a 김씨의 진정에 대해 시립도서관측은 열람실 내부로 향해 있던 CCTV의 촬영방향을 출입문 쪽으로 돌리고 누구나 볼 수 있었던 모니터 화면도 가림막을 설치해 보호조치를 취했다.

김씨의 진정에 대해 시립도서관측은 열람실 내부로 향해 있던 CCTV의 촬영방향을 출입문 쪽으로 돌리고 누구나 볼 수 있었던 모니터 화면도 가림막을 설치해 보호조치를 취했다. ⓒ 인권위 김윤섭

국가인권위가 조사에 착수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시흥시립도서관은 사생활 침해 논란이 있었던 CCTV의 촬영 방향을 열람실 내부에서 출입구로 조정했고, 방문객에게 쉽게 목격되던 모니터 화면도 가림막을 이용해 가렸다.

또 무인좌석발급기를 거부하는 도서관 이용자들이 기존의 방식으로도 출입할 수 있도록 조치했다. 그리고 김씨의 글을 삭제한 사건과 관련해 홈페이지 운영상의 미비점에 대해 공개 사과하고 향후 홈페이지 개편에서 개선하겠다는 약속까지 했다.

언뜻 보면 김씨의 주장이 대부분 수용된 듯하다. 그러나 김씨의 생각은 다르다. 도서관측이 주민등록번호를 입력하는 방식과 기존의 방식대로 열람증을 주는 방식을 병행하겠다고 밝혔지만, 현실적으로 기존의 방식을 택하는 사람들은 불편을 감수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월간 <인권> 취재팀은 실태를 확인하기 위해 김씨와 함께 시흥시립도서관을 찾았다. 김씨가 도서관에 들어가고 싶다고 하자 직원은 "발급기에 주민번호를 입력하라"고 말했다.

김씨가 "주민등록번호를 누르지 않고 열람표를 받고 싶다"고 말하자 직원은 의아스럽다는 표정으로 모니터 상에서 임의로 자리를 지정했다. 김씨가 다시 "직접 자리를 고르고 싶다"고 하자 첫째 열람표를 폐기하고 좌석배치도가 그려진 모니터 화면을 띄웠다.

"이건 눈 가리고 아웅하는 격입니다. 주민등록번호를 누르지 않으려거든 불편을 감수하라는 식이잖아요. 도서관이 시민들의 편의시설이라면 시민의 처지에서 이 문제를 바라보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만일 모니터에다 '주민등록번호를 누르는 것은 당신의 자유입니다'라고 써놓고 자유롭게 선택하게 한다면, 과연 몇 사람이나 자신의 개인정보를 노출할까요?"

국가인권위는 2004년 7월 김씨의 진정에 대해 "시흥시립도서관이 표현의 자유와 인격권을 침해했다"고 판단하고, 시흥시장에게 관련 공무원에 대한 주의 조치를 권고하는 한편, 시흥시립도서관장에게 직원 인권교육 실시 및 재발방지대책 수립을 권고했다.

국가인권위의 결정이 언론에 공개되자 김씨는 지인들에게 축하 인사를 많이 받았다. 그러나 그는 "싸움은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말한다. 그는 최근 인권단체를 통해 서울시립대와 서원대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음을 확인하고 직접 피해자에게 전화를 걸어 자신의 경험을 알려주기도 했다. 김씨는 국가인권위가 전국 23개 공공도서관을 대상으로 하는 직권조사 결과에도 큰 기대를 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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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인권위원회에서 발행하는 <월간 인권>의 주요기사를 오마이뉴스에 게재하고, 우리 사회 주요 인권현안에 대한 인권위의 의견 등을 네티즌들에게 전달하기 위해... 꾸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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