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지 25년, 아직도 '살아 있는' 박정희

[독후감] 정운현 저 <실록 군인 박정희>를 읽고

등록 2004.10.30 14:09수정 2004.11.01 1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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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인자중하던 군부는….

<군인 박정희> 겉표지
<군인 박정희> 겉표지개마고원
친애하는 애국동포 여러분! 은인자중하던 군부는 드디어 금조미명을 기해서 일제히 행동을 개시하여 국가의 행정, 입법, 사법의 3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이어 군사혁명위원회를 조직하였습니다….


혁명공약 일 반공을 국시의 제일로 삼고 지금까지 형식적이고 구호에만 그친 반공태세를 재정비 강화한다….


필자가 고1이던 1961년 5월 16일 새벽 KBS 중앙방송국에서는 일체의 정규방송을 중단한 채, 행진곡과 함께 박종세 아나운서의 가쁜 목소리로 혁명공약과 포고문이 방송되어 전국민을 놀라게 했고, 이 방송은 그날 하루 종일 반복되었다.

그날 저녁 아버지는 혁명을 일으킨 사람이 박재복(박준홍으로 개명)씨의 작은아버지로, 신문사네(박 전 대통령의 중형 박상희씨 부인 조귀분씨) 시동생인 박정희 육군소장이라고 했다.

나는 깜짝 놀랐다. 한 때 구미 각산 우리 집과는 이웃이었던, 그 무렵 엄청 가난하게 살았던 그 집안 사람이 그런 큰 일을 하리라는 것은 미처 상상도 못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바로 그 분이 어렸을 때부터 할머니가 늘 말씀하시던 도개댁(박 전 대통령의 전처 고 김호남씨)의 신랑 '상모 양반'이라 하여, 한편의 소설같은 얘기로 들렸다. 그 시절부터 필자는 언젠가는 한 번 소설로 그리고 싶은 인물로 늘 머릿속에 '박정희'라는 인물을 아로새겨 관심을 가지고 살아왔다.

우리 나라 현대사 인물 중에 가장 많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 이 중의 한 사람이 '박정희 전 대통령'이 아닐까 싶다. 지난 10월 26일로 그가 세상을 떠난 지 꼭 25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살아있을 때 못지않게 각종 보도 매체나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죽은 제갈공명이 산 중달을 이긴다"는 말처럼, 많은 사람들이 지난 17대 국회의원 총선 당시 빈사 직전의 한나라당을 구한 것은, '박정희'라고 말한다. '박정희'의 딸 박근혜씨를 당 대표로 내세워 죽은 '박정희' 바람을 일으킴으로써 한나라당이 소생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렇듯 아직도 우리 사회에서 죽은 '박정희'의 위력은 대단하다.

인물에 대한 평가는 죽은 후 100년이 지나야


흔히 한 인물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그가 죽은 후 100년이 지나야 바르게 평가를 내릴 수 있다고 한다. 왜냐하면 고인의 유족이나 추종자들이 모두 이 세상에 사라지고, 미처 발굴되지 못한 사실들이 모두 드러나려면 그 정도 시점은 지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올해로 사후 25주기를 맞은 '박정희'에 대한 바른 평가는 아직도 때가 이를 것이다. 지금도 박정희에 대한 평가는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이 날카롭게 대립하여 진행중에 있다. 사람에 따라 좋아함과 싫어함도 뚜렷이 갈린다.

박정희 대통령 상모동 생가, 다시 복원한 집으로 본래의 모습은 이보다 훨씬 더 초라했다
박정희 대통령 상모동 생가, 다시 복원한 집으로 본래의 모습은 이보다 훨씬 더 초라했다구미시
내가 만났던 많은 사람들이 내린 박정희에 대한 평가도 극과 극이었다. 독립운동가 후손이나 진보적인 인사들은 대부분 박정희씨는 일본군 장교인 민족반역자이며, 결코 이 나라 대통령이 되어서는 안 될 사람이었다고 입을 모은다. 또 4·19 혁명으로 막 돋아나려는 민주주의 싹을 잘라내려고 했으며, 민족정기를 흐려놓았다고 매우 혹평을 한다.

그런가 하면 경제면을 중시하는 다른 한 편의 의견은 이와 판이하게 다르다. 그들은 박정희는 단군 이래 이 나라에 가난을 물리친 가장 뛰어난 지도자라며 한껏 치켜세운다.

한 인물을 평가하는데 있어, 우리는 그 인물에 대한 실체를 바로 알고 평가하기보다는 대부분 자기중심적이요, 다른 이의 평가에 추종하려는 경향이 짙다. 이는 대개의 사람들이 자기 주관이 뚜렷치 못한 탓도 있지만, 역사학자나 언론인 그리고 작가들이 소임을 다하지 못한 책임도 크다.

<군인 박정희> 저자 정운현(오마이뉴스 편집국장)씨는 기자로서 일찍이 현대사 자료 발굴과 취재에 남다른 열정을 보여왔다. <중앙일보> 재직 때 현대사연구팀의 일원으로 '실록 박정희 시대'를 연재하면서 박정희가 거쳐 간 곳은 죄다 현장 답사하고(심지어 만주군관학교까지), 관계자를 일일이 만나 그의 증언을 녹취하여 '박정희'라는 한 인물의 전 생애를 조명한 바 있다.

그 후 <대한매일>(현 <서울신문>)로 자리를 옮겨서도 저자는 친일파 연재를 비롯해 중국, 일본 등지의 항일유적지 답사, 그리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반민특위의 역사를 복원하는 작업 등에 정열을 쏟아왔다.

그 무렵 필자가 항일유적 답사 중, 하얼빈 동북열사기념관에서 '허형식'이라는 한 독립영웅의 기록을 접하고 그 자료를 추적하던 중, 처음으로 허형식 논문을 쓴 분이 당시 성균관대학교 연구교수인 장세윤씨라는 것을 알게 됐다. 또 이를 국내신문에 최초로 보도한 사람이 정운현 기자라서, 우리 세 사람은 만나 서로 인사를 나눈 적이 있었다.

또한 공교롭게도 허형식 장군의 고향인 구미 임은동이 바로 박정희 생가 상모동과는 철길을 사이에 두고 있어, 같은 시대를 살던 두 사람이 전혀 다른 인생의 길을 걷게 된 우리 현대사 비극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었다.

박정희가 고이 잠들도록

저자는 이 책 글머리에서 "'교사 박정희 - 군인 박정희 - 대통령 박정희'로 이어가는 과정에서 '군인 박정희'에 더 주목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박정희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근본 뿌리가 '군인'에 있다는 점 때문"이라고 했다.

<군인 박정희>는 모두 13장으로, '어린시절과 부모 형제'부터 '반혁명과 알래스카 토벌작전'으로 5·16 쿠데타가 성공하기까지의 과정을 다루고 있다. 저자는 '박정희를 떠나보내기 위해'라는 맺음말에서 다음과 같은 글로 마무리하고 있다.

"...이제는 무덤 속의 박정희가 고이 잠들도록 놓아줄 수 있을까? 그게 이승을 사는 산목숨들의 이치인 터에 말이다. 그러나 진정으로 그를 떠나보내기 위해서라도 정치적 목적이나 감정에 앞서 냉철한 판단력과 이성으로 무장하는 자세는 반드시 필요할 것이다. 그럴 때에야 비로소 그는 역사의 한 페이지에서 안식처를 찾게 될 것이므로."

무릇 글을 쓰는 이는 춘추필법으로 양심에 따른 곧은 글로 사실 그대로('공(功)은 공대로 과(過)는 과'대로)를 남겨야 한다. 그래야 다음 세대 사람들이 그 글을 보고서 바른 역사의 교훈을 배울 수 있기 떄문이다.

상모동 뒷산인 금오산, 고인은 어려서부터 이 산을 바라보며 꿈을 키웠다고 한다
상모동 뒷산인 금오산, 고인은 어려서부터 이 산을 바라보며 꿈을 키웠다고 한다경북 구미시
필자는 이 책의 겉표지부터 뒤표지까지, 또 글의 행간까지 읽으면서 무엇보다 저자가 역사적 진실을 편견없이 사실대로 기록한 점을 높이 사고 싶다. 왜냐하면 그간 출간된 박정희 관련 서적이 저자의 입맛에 따라 미화되거나 또는 필요이상으로 비난한 것이 없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책은 우리 현대사에서 대표적인 논쟁적 인물인 박정희 연구의 귀중한 사료가 될 것으로 본다. 특히 이 책에 실린 1백여장이 넘는 각종 희귀한 사진과 박정희의 군사재판 관련 문건 등은 이 책의 가치를 더욱 높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최근 몇 년 새 필자는 세 차례나 중국 동북지역에 항일유적지를 답사한 바 있다. 필자 역시 장춘시 교외에 있는 만주군관학교를 방문한 적이 있다. 역사에 가정은 부질없는 일이라고 하지만 그때마다 박정희가 만주군 장교가 아닌, 독립군 출신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곤 했다.

1962년 8월 30일, 중부전선 지포리 연병장에서 열린 박정희 대장 전역식에서 그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이 한 마디에 한 인간으로서의 그의 고뇌가 모두 다 담겼으리라.

"다시는 이 땅에 나와 같이 불행한 군인이 없기를 바랍니다."

실록 군인 박정희

정운현 지음,
개마고원,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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