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업을 왜 하지?

초록 모자를 쓴 아이의 반란

등록 2004.11.07 22:12수정 2004.11.08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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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극화수업 장면-대사연습을 하고 있는 아이들

극화수업 장면-대사연습을 하고 있는 아이들 ⓒ 최상경

한 달 동안의 영어교사 직무연수를 마치고 학교로 돌아오자 밀린 업무들이 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우선 연수를 떠나기 전에 주문해 놓은 신간도서의 바코드 작업을 하느라 꼬박 사흘이 걸렸습니다. 거기에 모 국회의원이 국정감사 자료로 요구한 학교도서관 이용 실태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하느라 또 하루를 소비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아이들은 뒷전일 수밖에 없습니다. 한 달 만에 만난 아이들과 눈인사도 제대로 나누지 못한 채 사나흘이 지나고 말았습니다.

그런 분주한 와중에도 끊임없이 머릿속을 맴도는 단어가 있었습니다. 다름 아닌 '극화수업'이었습니다. 극화수업은 수업에 연극적 요소를 도입해 흥미와 효율성을 높이는 수업개선 방안입니다. 연극시범학교 실무 담당자인 후배교사가 간곡히 부탁한 데다 마침 1주일에 1시간씩 영어교과 재량시간이 확보돼 있던 터라 허락했는데 수업 발표 날짜가 불과 보름 남짓 앞으로 다가온 것입니다.

a 극화수업 장면-흥부가 제비 다리를 고쳐주고 있다

극화수업 장면-흥부가 제비 다리를 고쳐주고 있다 ⓒ 최상경

다행히도 극화수업의 영어 대본은 미리 마련해 둔 것이 있었습니다. 흥부전의 기본 줄거리만을 추린 뒤 현대적으로 각색해 만든 촌극(skit) 대본이었습니다. 연수 중에 각 반별로 촌극공연을 했는데 그때 선보인 게 바로 흥부전이었습니다. 그 영어연극에서 저는 흥부 역을 맡았고, 뜻밖에도 상까지 받아 한껏 고무돼 있던 터라 연기 지도에는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습니다. 문제는 수업형태였습니다.

수업형태를 둘러싸고 적잖은 문제점이 떠올라 멈칫하게 만들었습니다. 흥부전의 배역이 모두 여덟 명인데 나머지 아이들은 구경만 시킬 것인가? 연습 과정에서도 그 아이들은 소외될 것이 뻔한데 어떻게 할 것인가? 짧은 기간에 어려운 영어 대사를 어떻게 외우게 할 것인가? 머리가 좋은 아이들만을 골라 외우게 할 것인가? 그럼 머리가 나쁜 아이들은 수업의 들러리로 만들 것인가?

a 극화수업 장면-영어대사 조각잇기 게임을 하고 있다.

극화수업 장면-영어대사 조각잇기 게임을 하고 있다. ⓒ 최상경

이런 예기치 못한 질문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수업을 짜는 일이 갑자기 막막하게 느껴졌습니다. 거기에 연구수업에 필요한 관행적인 요식 행위까지 신경 쓰다 보니 짜증과 함께 묵직한 피로감마저 몰려왔습니다. 그런데 그런 순간이 오래 지속되지는 않았습니다. 저를 괴롭히던 그 많은 질문들이 단 하나의 간단한 질문으로 요약되면서 마치 안개가 걷히듯 혼미한 정신이 맑아진 것이었습니다.

"수업을 왜 하지?"


그 질문에 대한 답이 분명해지면서 내 머리는 급속도로 회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여섯 모둠을 만들어 여섯 명의 흥부를 만들자. 수줍음을 타고, 발음이 좋지 않고, 머리가 썩 좋지 않은 아이들도 즐거운 마음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공평하게 대사를 나누자. 여섯 정령들에게는 종이로 만든 예쁜 모자를 씌워주자. 아이들이 마음놓고 실수할 수 있도록 완성된 장면을 보여주지 말고 연습하는 과정을 보여주자. 불필요한 요식 행위도 과감하게 생략하자. 화려한 가짜 수업보다는 아이들에게 유익이 되는 진짜 수업을 하자.'


a 극화수업 장면-지니(정령)가 흥부에게 선물을 전해 주고 있다.

극화수업 장면-지니(정령)가 흥부에게 선물을 전해 주고 있다. ⓒ 최상경

수업을 발표하기 며칠 전이었습니다. 저는 한 아이와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습니다. 평소에도 수줍음을 많이 타는 아이라 속으로만 잠겨들어 가는 소리를 밖으로 끄집어내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아이가 쓰고 있는 초록색 예쁜 모자를 어루만지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기 좀 떨어진 곳에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에게 편지를 전해주어야 하거든. 너무나 중요한 편지인데 그 사람이 타고 있는 차가 막 떠나려고 하는 거야. 전해주지 못하면 불행한 일이 생길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해야겠니?"

그렇게 말하고는 돌아서려는데 저를 잡아끄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 아이였습니다. 눈으로 묻는 시늉을 하자 중대한 결심이라도 한 듯, 아니 무슨 반란이라도 도모하듯 한 순간 아이의 눈이 번쩍 빛나더니 이내 허공을 향해서 입이 방긋 벌어졌습니다.

"You've got ma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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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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