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의 땅 충남…"노 대통령 결단에 달려"

[공주·연기르포]토지 수용하고 청와대 기능 절반은 옮겨야

등록 2004.11.13 11:41수정 2004.11.23 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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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행정수도건설특별법에 대한 헌재의 위헌판결이 나온 지 20여일이 지난 12일, 이전 예정지던 연기-공주 지역은 겉으로는 평온한 모습이었지만 시민들은 분노를 좀처럼 삭이지 못하고 있었다. 특히 이전 예정지 중심으로 가까워질수록 격문의 플래카드가 사방에 매달려 있었고 시민들의 표정은 한결같이 어두웠다.

a 공주시내 초입에 내걸린 신행정수도 위헌 판결에 대한 격문.

공주시내 초입에 내걸린 신행정수도 위헌 판결에 대한 격문. ⓒ 유성호

백제의 고도와 교육 도시로 알려진 공주. 그만큼 시민들의 애향심과 자부심이 크던 이 곳은 헌재 결정 이후 넋이 나간 모습이다. 그동안 문화재 보호 이유로 개발에 제한을 받아서 인근 도시보다 발전이 더딘 이 곳은 이번 결정으로 다잡았던 '공주발전'의 기회를 놓친 허탈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a 꽁꽁 얼어버린 부동산 경기에 속태우는 한 중개사.

꽁꽁 얼어버린 부동산 경기에 속태우는 한 중개사. ⓒ 유성호

'수도이전 위헌결정 충청인은 분노한다(공주시의회)', '헌재를 탄핵하라(대한전문건설협회 공주시협의회)'와 같은 플래카드가 도시 초입부터 외지인의 눈길을 잡아 끈다. 이 곳에서 20여 년 간 부동산 중개업을 하고 있다는 김종일씨는 "신행정수도에 대한 오랜 기대가 한순간에 절망으로 바뀐 상황에서 충청인, 특히 공주시민의 분노는 이루 말할 수 없다"고 상황을 전한 뒤 "그러나 양반고장이라는 자존심 때문에 격한 반발을 자제하고 있을 뿐"이라고 말했다.

그의 부동산 옷걸이에는 아직도 '균형발전 헛소리다'고 적힌 붉은 머리띠가 매달려 있어 절망이 분노로 폭발할 여지를 남겨 놓은 듯했다. 부동산 내벽에 써붙인 '신행정수도 충남도청 투자의 최적지 공주'라는 선전문구는 이미 빛이 바라고 있었다.

공주에서 조치원 방향으로 국도를 따라 가다보면 도로 주변에는 수없이 많은 플래카드가 주민들의 분노를 대변하고 있다. 초등학교 동창회, 육사동우회, 시의회, 군의회, 심지어 보수단체들까지 가세해 헌재의 위헌 판결을 격렬히 비난하는 한편 신행정수도는 지속적으로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a 이제는 공염불이 된 한 중개업소의 선전문구.

이제는 공염불이 된 한 중개업소의 선전문구. ⓒ 유성호

이전 예정지 핵심지역인 연기군 남면에 들어서자 도시 전체가 분노에 휩싸여, 흡사 폭발물의 뇌관 같은 느낌이 들었다. 말 한마디 붙이기도 조심스러웠을 뿐만 아니라 말을 붙일 만한 인적도 찾기 어려웠다.

불과 얼마 전만 해도 외지인들이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던 곳이라고는 상상이 가지 않았다. 불과 100여m 남짓한 중심 상권에는 조그만 면 소재지에 걸맞지 않게 커다란 간판을 단 부동산 업소들이 쉽게 눈에 띄었다.


a 헌재 위헌결정 때 표정관리를 제대로 못한 한나라당에 대한 충청민의 분노.

헌재 위헌결정 때 표정관리를 제대로 못한 한나라당에 대한 충청민의 분노. ⓒ 유성호


a 이전 예정지 핵심지역인 연기군 남면은 사방이 온통 플래카드가 걸려 있다.

이전 예정지 핵심지역인 연기군 남면은 사방이 온통 플래카드가 걸려 있다. ⓒ 유성호


a 이전 예정지 주민들은 비대위를 구성해 지속적으로 이전을 촉구한다는 방침이다.

이전 예정지 주민들은 비대위를 구성해 지속적으로 이전을 촉구한다는 방침이다. ⓒ 유성호

일부는 문을 닫았으며 문을 열어 놓은 곳도 폐업을 고려하고 있을 만큼 반짝했던 부동산 경기가 바닥을 기고 있다. 남면 주민들의 분노는 공주와 같은 주변 도시와는 사뭇 달랐다. 정부의 토지 수용을 앞두고 대토지를 구하기 위해 받은 대출 때문에 하루 아침에 빚더미에 깔렸기 때문이다.

신행정수도지속추진연기군비상대책위원회 임각철씨는 "조사해 본 결과 인근 3개면에서 많게는 8억원에서 적게는 수천만원까지 약 1000여명이 1000억원 가량 대출을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고 설명한 뒤 "헌재 판결로 인한 실질적인 피해액은 1조원에 이를 것"이라고 추산했다.


a 신행정수도 이전 예정지인 전월산 인근의 항공사진.

신행정수도 이전 예정지인 전월산 인근의 항공사진. ⓒ 항공우주연구원

전월산을 중심으로 연기군 남면, 금남면, 동면, 공주시 장기면 일원 약 2160만평 부지에 조성될 계획이었던 신행정 수도가 애꿎은 농민들을 자칫 죽음으로 몰고 갈 수 있겠다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그러나 미호천과 금강이 합류하면서 흐르는 물길은 아무것도 모른 채 도도히 흐르기만 하고 양화리에 있는 650여 년 묵은 은행나무 역시 묵묵히 자리만 지키고 서 있을 뿐 인간 세계에 일어나는 일에는 무관심하다는 표정이다.

a 전월산.

전월산. ⓒ 유성호

터질 듯한 긴장감을 뒤로하고 조치원 방향으로 더 올라가 연기군 전이면을 찾았다. 신행정수도 이전 예정지와 조금씩 멀어지고 있지만 도로변에는 분노를 담은 플래카드가 여전히 '깃발'처럼 나부끼고 있다. 어스름이 내릴 무렵 찾아든 전이면의 중심상권에도 예외 없이 충청민의 분노를 담은 격문이 가로등 밑에서 도시의 분위기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a 미호천과 금강 합류지점.

미호천과 금강 합류지점. ⓒ 유성호

식당에서 만난 한 면민은 "충청도는 멍청도여. 만약 전라도, 경상도만 같았어도 모조리 서울로 올라가 죽자고 한바탕 일을 치를 것인데…"하며 격분을 애써 삭혔다. '충청도 양반'이라는 오랜 지역 정서 때문에 이도 저도 못하고 속만 태우고 있다는 것이다.

또 한 면민은 "노대통령이 빨리 뭔가를 내놓아야지 충청 민심을 달랠 수 있다"고 제안한 뒤 "농민들 죽는 꼴 안 보려면 토지수용은 계획대로 하고 청와대 기능의 절반쯤은 내려놓는 결단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멍청도'라는 비아냥 속에서 묵묵히 자리를 지켜 온 순박한 촌부들의 가슴을 헤집어 놓은 신행정수도 이전 소동이 어떻게 매듭될지 노대통령의 입에 시선이 쏠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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