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주기 식' 지원정책 오히려 벤처 죽였다

[특별기획-벤처가 살아야한다 ②] 민간역량 키우는 제도 시급

등록 2004.11.29 12:38수정 2004.11.29 2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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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체된 경제를 살리기 위한 방안으로 다시 벤처가 주목받고 있습니다. 정부는 한국형 뉴딜 정책을 추진하면서 IT분야에 투자를 집중하기로 했으며, 연말까지 벤처 활성화 정책을 마련하기로 하는 등 강력한 벤처 활성화 의지를 보이고 있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세차례에 걸쳐 벤처 활성화를 위한 필요조건과 문제점, 대안 등을 집중 점검합니다. 이 기사는 그 두번째입니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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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퀄컴'과 같은 벤처가 한국엔 없는 이유

지난 7월 계속 하락세를 이어나가던 코스닥 시장이 340선까지 무너뜨리자 직원들이 일일 변동지수를 살펴보고 있다.
지난 7월 계속 하락세를 이어나가던 코스닥 시장이 340선까지 무너뜨리자 직원들이 일일 변동지수를 살펴보고 있다.연합뉴스 양현택

지난 1998년, 벤처는 외환위기로 절망의 나락으로 추락해버린 한국 경제의 희망 그 자체였다. 실패를 무릅쓰고 이어졌던 창업 열기 속에 신기술 개발과 고용창출은 물론 우리 산업의 체질을 지식기반의 기술집약형으로 전환시키는 선봉장이 바로 벤처였다.

정부도 벤처가 '21세기 한국경제의 희망'이라는 찬사와 함께 자금지원과 세금혜택 등 적극적인 벤처육성정책으로 열기를 고조시켰다. 그 결과 굴지의 대기업이 쓰러지는 가운데서도 벤처의 수는 1만여개를 넘어서며 한국 경제의 한축으로 당당히 성장했다.

그러나 6년이 지난 2004년, 벤처의 당당했던 위상은 온데간데 없다. 비리의 온상이자 불신의 대상이 바로 요즘 벤처다. 사상 최고조로 부풀어 올랐던 벤처 거품은 꺼졌고, 진승현·이용호 게이트로 상징되는 대주주의 횡령, 주가조작 등 각종 비리로 역동성을 잃은 벤처업계는 좀처럼 침체국면을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자금지원에 걸맞는 책임 요구없어 도덕적 해이 불가피

불과 몇년 사이 무엇이 벤처를 희망에서 비리의 온상으로, 극과 극을 오가게 만든 것일까. 전문가들은 시장의 자율 기능을 무시한 채 정부가 직접 나서 벤처기업을 선정하고, 여기에 무분별하게 자금을 지원을 한 것 자체가 벤처의 부실 양산 등 부작용을 내포하고 있었다고 지적한다. A사의 사례가 대표적인 경우다.

A사는 당시 다른 벤처들과 마찬가지로 정부로부터 수억원대의 정보화촉진기금을 지원받았다. 물론 기금 지원 명목은 신기술 연구프로젝트 자금이었다. 그러나 A사는 이 자금을 연구개발에 투입하지 않고 회사의 운영자금으로 소진해 버렸다. 정부의 자금지원이 그만큼 방만했고 사후 감독이 매우 허술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신기술을 개발해 수익을 내고, 지원 받은 기금에 대해 기술료를 내는 등 사회적 책임을 다해야할 A사의 도덕적 해이 때문에 국민들의 세금이나 다름없는 정부 기금이 아무런 성과 없이 허공에 날아가 버린 꼴이 된 것이다.

벤처업계의 한 관계자는 "DJ 정부시절 막대한 자금이 벤처업체들에 뿌려졌는데 이에 대한 사후 감독과 성과 분석은 너무 미흡했다"며 "공적 자금을 받은 업체들에게 마땅히 요구해야할 자금 집행의 투명성과 기업의 공익적 역할에 대한 면밀한 감독 부재는 필연적으로 벤처기업의 도덕적 해이를 낳을 수밖에 없었다"고 지적했다.


이같은 부작용이 대부분의 건전한 벤처업체들에 미친 파장은 만만치 않았다. 일부 벤처 경영진의 횡령과 주가조작 등 투명성 부족으로 코스닥 시장이 투자자들의 외면을 받고 있는 것이 대표적이 예다. 코스닥이 벤처의 자금 조달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코스닥 등록이라는 어려운 관문을 통과한 벤처들조차도 자금마련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실정이다.

이 때문에 벤처업계에서는 코스닥에 들어가봐야 얻는 것은 없고 공시 등 각종 의무사항만 많아 관리비용만 든다는 등 회의적인 목소리가 높아진지 오래다.

또 경쟁력 상실로 시장에서 퇴출됐어야할 벤처들이 정부의 '눈먼 돈'을 지원받아 시장에 난립하게 된 것도 문제다. 자연스런 구조조정이 이뤄지지 못하고 난립한 업체들간 출혈경쟁은 건실한 벤처마저 고사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남민우 다산네트웍스 대표는 "벤처는 그 특성상 다산다사(多産多死)일 수밖에 없는데, 시장원리를 무시한 정부의 직접 지원으로 인해 다사(多死)가 불가능했다"며 "결국 좁은 시장을 놓고 업체들간 과당 경쟁이 벌어지고 수익이 악화되는 등 기반이 탄탄한 업체들마저 어려움이 많았다"고 말했다.

"다산만 있고 다사가 불가능했다"

지난 2001년 말 벤쳐업계를 강타했던 소위 '진승현 게이트'의 주인공 진승현씨가 2002년 1월 28일 서울지법에서 열린 신광옥 전 법무차관의 2차공판에 증인으로 출석하고 있다.
지난 2001년 말 벤쳐업계를 강타했던 소위 '진승현 게이트'의 주인공 진승현씨가 2002년 1월 28일 서울지법에서 열린 신광옥 전 법무차관의 2차공판에 증인으로 출석하고 있다.연합뉴스 양현택
때문에 벤처업계에서는 정부의 벤처활성화 정책에 기대감을 나타내면서도 '과거와 같은 퍼주기식 벤처 육성은 사절'이라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부작용이 명백히 드러난 정부의 직접 개입을 지양하고 코스닥 시장의 활성화, 벤처캐피탈의 활성화 등 벤처가 꽃 피울 수 있는 제도 정비에 치중해야한다는 것이다.

우선 창업 초기 단계를 벗어나 성장단계에 들어선 벤처의 원할한 자금 조달을 위해 벤처캐피탈의 활성화 대책이 요구되고 있다. 정부의 직접 지원도, 연대 보증을 요구하는 일반 금융기관의 직접 융자도 높은 위험을 가진 벤처의 생리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이보다는 높은 투자 위험을 내재하고 있는 벤처의 특징을 잘 이해하고 이를 활용할 수 있는 벤처캐피탈을 활성화시켜야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정부'가 아니라 '시장'이 벤처의 기술과 성장 가능성을 평가하고 투자를 집행해야한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시장에서 인정받은 벤처는 필요한 자금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고, 벤처캐피탈은 투자와 함께 다양한 경영 컨설팅을 제공하면서 벤처의 위험을 줄여나가고 수익성을 높이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그러나 현재 벤처캐피탈들은 벤처 거품이 꺼지면서 투자여력을 상실했을 뿐만아니라, 자금의 동맥경화가 심화되면서 일부 벤처캐피탈들은 생존마저 위협받고 있는 상황이다.

벤처기업협회 관계자는 "벤처캐피탈들이 투자재원 마련에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정부가 1조원 규모의 펀드 조성에 나선 것은 긍적적으로 볼 수 있다"며 "그러나 미국 등 선진국과 비교해 미흡한 수준인 연기금 등 기관투자가들의 적극적인 역할도 요구되고 있다"고 말했다.

또 벤처업계는 성장단계에 들어간 벤처와는 달리 창업초기 벤처의 경우 정부의 적극적인 역할이 필요하다고 보고있다. 초기 단계의 벤처에게는 장기적으로 안정적인 자금을 투자하는 '엔젤투자자'의 역할이 매우 중요한데,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일반 개인투자자들이 벤처의 고(高) 위험을 껴안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벤처캐피탈협회 관계자는 "벤처 붐이 일었을 때와는 달리 지금은 기술만 가지고는 투자를 받을 수 없는 상황"이라며 "코스닥에 들어간 업체들 중에서도 일부 '스타주'들만 겨우 주목을 받는 상황에서 엔젤투자가의 자비심을 바라는 것은 무리"라고 말했다.

결국 지금과 같은 시장실패 상황에서는 정부가 엔젤투자가의 역할을 맡아야한다는 것이다. 다만 과거의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는 정부와 민간의 결합이라는 최소한의 안전장치는 필수다. 핀란드의 사례가 그 예가 될 수 있다.

핀란드의 사례에서 배우자

핀란드 정부는 그동안 벤처기업 지원에 있어 벤처투자조합이 조성한 펀드에 참여하는 방식 등 간접 지원원칙을 고수해 왔다. 그러나 올 들어서는 초기자금 지원프로그램을 마련해 창업단계의 벤처에는 직접지원을 마다하지 않고 있다. 우리처럼 벤처 거품이 꺼지면서 수익성이 악화된 벤처캐피탈들이 창업초기 단계의 벤처엔 투자를 기피하고 성장단계에 접어들었거나 기업공개(IPO)된 벤처에만 투자를 집중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직접지원의 부작용을 막기위한 장치도 빠지지 않았다. 핀란드는 정부의 직접 지원대상을 창업초기 단계의 벤처로만 제한하고 있다. 이는 성장단계에 들어선 벤처는 정부에 기대지 말고 시장의 평가에 따라야 한다는 이야기다.

또 정부가 창업초기 필요자금의 50%만 지원해주고 나머지 50%는 반드시 민간부문에서 조달하게 했는데, 이는 기술과 성장가능성 등 업체가 내놓은 비즈니스 모델의 시장 테스트 통과를 정부 지원의 전제조건으로 내걸어 민간의 평가를 결합한 것이다.

장흥순 벤처기업협회 회장(터보테크 대표)은 "우수한 기술을 가지고 글로벌 벤처로 성장할 가능성이 있는 업체에 대해서는 홍콩, 싱가폴 등 외국의 경우에도 엄밀한 기술 평가를 거쳐 정부가 초기자금(Seed money)를 지원해주는 사례가 있다"며 "다만 직접지원의 폐해를 막기위해서는 벤처가 가지고 있는 기술가치에 대해 정부보다 더 잘 알고 평가를 내릴 수 있는 민간부문을 결합하는 것은 좋은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진단했다.

장 회장은 그러나 "장기적으로는 민간 자율 기능을 강화하기 위해 미국의 사례처럼 성공한 1세대 벤처 기업가들이 엔젤투자자가 될 수 있어야 한다"며 "이를 위해 벤처의 인수합병(M&A) 활성화, 엔젤펀드에 대한 양도소득세 유예 등 관련 인프라 정비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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