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했던 한때 지난 2000년 9월 테헤란밸리 벤처타운 야경. 하지만 그로부터 4년이 지난 지금 이곳은 '화려했던 지난달'과 달리 침체를 면치 못하고 있다.연합뉴스
직원 5명으로 시작, 2년여에 걸친 연구개발 끝에 신기술 개발에 성공한 벤처기업 A사. 그러나 A사는 안입고 안먹으며 각고의 노력끝에 자체개발한 기술을 결국 한 대기업에 헌납하고 말았다. 납품을 의뢰한 대기업이 그 조건으로 신기술의 원가자료, 설계도면 등 제품에 관한 모든 정보를 통째로 요구했기 때문이다.
A사의 최고경영자(CEO)인 김석중(가명)씨는 대기업에 제품을 납품하는 길 외에는 다른 뾰족한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어쩔 수없이 대기업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던 A사는 결국 기술력을 인정받아 대기업에 제품을 납품하는데 성공했고 사업은 본궤도에 오른 듯 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장밋빛 꿈은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대기업 쪽에서 제품의 납품가를 좀더 낮춰줄 것을 요구해 온 것이다. 대기업이 요구하는 수준의 납품가를 도저히 맞출 수 없었던 A사는 조금이라도 높은 가격을 받기 위해 대기업을 상대로 협상에 들어갔다.
그런데 합리적인 수준에서 합의를 이룰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A사에게 뜻밖의 일이 있어났다. 쉽게 타협점을 찾지 못하고 협상이 시간을 끌자, 그 대기업은 A사의 기술자료를 경쟁사인 B사에 넘겨버렸다. A사는 하루 아침에 자기기술을 놓고 경쟁사와 가격 경쟁을 벌이는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원가자료와 설계 도면을 요구하는 대기업
문제는 이런 사례가 대기업에 납품을 해본 중소벤처기업들 사이에서는 생소한 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역시 벤처기업인 초고속인터넷 장비업체 C사는 납품 거래 관계에서 있던 한 대기업이 기술 원가내역서를 요구한 뒤 제품 원가에 관리비에도 못미치는 쥐꼬리만한 이문을 붙여 이를 납품가격으로 요구받기도 했다. 기술 자료를 가져간 것은 물론이다. 이쯤 되면 대기업과의 거래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리베이트를 상납하거나 접대를 하는 일은 불공정 거래 사례에 끼지도 못한다.
대기업들도 할말은 있다. 납품업체에 원가자료나 기술 설계 도면을 요구하는 것은 납품업체가 도산하거나 제품 공급이 불가능하게 될 경우를 대비한 '안전장치'라는 것이다. 납품업체에 문제가 생겨도 대기업의 사업이 차질을 빚지 않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는게 대기업들이 내세우는 이유다.
그러나 벤처기업들의 생각은 다르다. 대기업들이 정당한 기술에 대해서 제 값을 쳐주고 부당한 거래 관행을 강요하지 않는다면, 기술력을 인정받아 대기업에 납품까지 하는 업체에 치명적인 문제가 생길 가능성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
때문에 벤처업체들은 대기업이 기업의 기밀에 해당되는 신기술 제품의 원가자료 및 설계도면을 요구하는 것은 다른 속셈이 있다고 보고 있다. 벤처기업이 힘들게 개발한 기술을 도용하거나 타 경쟁 업체를 육성해 벤처업체끼리 저가 가격 경쟁을 벌이도록 유도하기 위해 벤처기업으로서는 생명과도 같은 신기술에 대한 정보를 요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벤처기업 CEO 이인수(가명)씨는 "CDMA기술을 개발해 세계적인 기업으로 거듭난 미국의 벤처기업 '퀄컴'이 한국에서 사업을 했더라면 과연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라는 의문이 든다"며 "벤처들이 대기업의 하도급업체 취급을 받으며 사업기반까지 착취당하는 상황에서 글로벌 경쟁력을 갖춘 벤처는 꿈에 불과하다"고 한탄했다.
상당한 인지도를 가진 또다른 벤처기업 CEO 박종연(가명)씨도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한해동안 땀흘려 농사를 지어 결실을 맺을 때가 오는가 하면, 지주에게 땅까지 빼앗겨버리는 소작농이 바로 국내 벤처업체들"이라며 "국내 벤처산업의 발전을 위해서는 '소작농'을 보호할 장치가 절실하다"고 지적했다.
국내 벤처업체들은 '소작농', 보호 장치 절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