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동의 80년대는 끝났다?

방현석 소설집 <랍스터를 먹는 시간>

등록 2004.12.02 13:10수정 2004.12.02 1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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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랍스터를 먹는 시간> 표지 ⓒ 창작과비평사

최첨단으로 발전하는 21세기에 80년대 이야기는 웬 궁상이냐고 너스레를 떠는 이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나라 현대사를 이야기하면서 80년대는 빼놓을 수 없는 가장 중요한 시점이 아닐까 싶다. 세상이 아무리 변한다고 해도 과거의 역사는 지울 수 없는 것 아닌가.

방현석의 소설집 <랍스터를 먹는 시간>은 직접적으로 80년대를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읽는 내내 80년대를 생각나도록 하는 무언가가 있다. 그것은 아마도 베트남 전쟁에서의 박정희 정부와 90년대 들어 변화한 노동 운동을 이야기하면서 격동의 80년대 현대사를 내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책의 전반에 있는 중편 <존재의 형식>은 이미 40세를 넘어버린 80년대 학번이 살아가는 이야기이다. 과거에 함께 운동을 하던 친구들은 변호사로 성공하거나 노동운동가로 머물러 있거나 베트남 파견 근무를 간 모습으로 다양하게 그려진다. 하지만 이들의 마음 속에는 근본적으로 함께 '민주주의'를 부르짖던 세월이 남아 있다.

이 소설에는 세 명의 80년대 학번이 등장한다. 변호사가 되어 출세가도를 달리는 것으로 보이는 친구 문태, 베트남에 오랜 기간 거주하면서 파견 근무를 하고 있는 주인공 재우, 그리고 9년 전에 만나고 한번도 볼 수 없었던 친구 창은이다.

주인공 재우는 변호사가 된 친구 문태에 대한 불신과 배신감을 갖고 있다. 왜냐하면 문태 혼자 함께 운동하던 이들을 버리고 변호사의 길로 가면서 기득권을 차지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함께 운동을 했던 창은은 팔 한 쪽을 노동현장에서 잃고 계속 운동을 하고 있는데 문태 혼자 잘 먹고 잘 산다는 생각은 그에 대한 배신감을 낳았다.

그러던 찰나에 문태는 다른 변호인단과 함께 베트남으로 출장을 오게 된다. 베트남에서 오랜 기간 생활해 온 재우가 보기에 문태 일행은 무례하기 짝이 없다. 그에 대한 불쾌감으로 재우는 문태에게 무턱대고 퉁명스러운 태도를 취한다.

"70년대 한국의 주력 산업이 베트남으로 이전해 오면서 노동자를 다루는 습성도 70년대 한국의 것을 그대로 가지고 왔다. 그의 주선으로 베트남에 진출한 공장에 들렀다가 베트남 노동자를 신발로 때리는 한국 관리자를 목격한 날, 그는 밤을 세워 통음했다.


그리고 그 기업들이 진출하는 데 첨병 노릇을 한 자신을 주먹질하는 마음으로 글을 썼다. 그가 쓴 글이 한국의 신문을 통해 보도되자 그가 멀리하기 전에 기업들이 먼저 그를 멀리했다. 쓰는 글의 횟수가 늘면서 그는 교민사회에서 기피의 대상을 넘어 저주의 대상으로 바뀌어갔고, 그와 가까이 지내는 사람들은 고립과 손해를 감수해야 했다."


주인공 재우는 이처럼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성격이다. 그의 눈에 비친 문태는 운동하던 친구들을 버리고 자기 혼자 잘 살아보겠다고 떠났으며, 이제는 기득권층이 되어 잘난 척하는 인간에 불과하다. 그래서 주인공은 그의 베트남 방문이 반갑지가 않다.


주인공의 예상과는 달리 문태는 일행과 함께 골프를 치러 가거나 베트남 아가씨들을 만나러 가지 않는다. 문태가 찾아간 곳은 바로 베트남 해방전선의 중심지였던 마을이다. 재우가 베트남 해방의 역사에 엄청난 관심과 애착이 있듯이 문태 또한 그러한 공산주의 사상을 버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랍스터를 먹는 시간> 또한 베트남을 배경으로 한다. 베트남 전쟁에서 한국군이 벌인 잔혹상을 조명하면서 저자는 지울 수 없는 우리의 과거를 이야기한다. 박정희 정부가 베트남 파병 덕분에 국가 경제를 부흥시켰다고 하지만, 거기서 벌인 한국인들의 행태는 비난의 여지가 많다.

이 소설에서의 주인공 건석은 장애가 있는 형을 미워하고 싫어했던 아픈 과거가 있는 인물이다. 그런 형이 자신의 대학 등록금을 대기 위해 들어간 공장에서 노동 운동을 하고 결국 죽음을 맞이하는 모습. 그 까마득한 세월을 잊은 듯 하였으나 베트남에 살면서 핍박 받아온 베트남 사람들의 삶을 통해 과거의 아픔을 다시 느끼게 된다.

베트남에 있는 한국 회사에서 베트남 사람들과 한국인들 사이에 일어난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현지인의 집을 방문하게 되는 주인공. 거기서 새롭게 발견하는 사실들은 한국군이 베트남 민간인에게 저질렀던 만행들이다.

"저주는 포성을 앞세우고 '박정희 군대'와 함께 러이에게 찾아왔다. 한국군이 주둔하던 떤산 쪽에서 시작된 포성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마을 가까이 다가왔다. 마을일을 맡아보는 끼엣 아저씨가 러이의 집까지 쫓아와 땅굴로 숨으라고 한 것은 어둠이 물러가고 짙은 안개만 남은 이른 아침이었다."

"처음부터 우리가 따이한을 증오했던 것은 아니네. 따이한은 미국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참전한 용병일 뿐 적이 아니라고 우리는 배웠고, 또 그렇게 믿었네. 그러나 그날 이후 모든 것이 달라졌어. 그럴 수밖에 더 있겠나."


이와 같은 사건 전개 속에 등장하는 베트남 사람들이 지적하는 것은 바로 한국군의 이라크 파병이다. 아무리 미국의 힘에 눌려서라고 하지만 한국은 너무나 주체적이지 못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아니냐는 지적이다. 저자는 인물들의 입을 통해 한국의 문제점을 적나라하게 지적한다.

"또 미국 핑계인가. 러이가 분노했던 것이 김부장과 같은 참전 군인들 때문인 줄 아나. 결코 아닐세. 전쟁으로 파괴된 세대가 스스로를 바꾸는 일은 어쩌면 불가능한 일인지 몰라. 절망은 당신과 같은 다음 세대가 지난 세대를 답습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거야."

이 말 속에서 우리는 과거의 잘못된 일을 답습하고 있는 우리 자신을 발견하고 반성하지 않을 수 없다. 전쟁으로 파괴된 세대의 사고를 그대로 답습해선 안 되는 것이다. 하지만 현재의 우리들은 어떠한가. 그저 미국의 눈치만을 보며 고개를 숙이기에 급급하지 않은가.

"지금까지 당신들에게 베트남 전쟁에 개입한 책임을 묻지 않은 게 당신들에게 책임이 없어서라고 생각하나. 오해하지 말게. 그건 아직 당신네 나라가 국제 사회에서 책임을 질 수 있는 나라의 축에 들지 못하기 때문일 뿐이네.

당신이 괜찮은 사람인 줄은 알아. 그러나 만약 당신이 이 나라에서 살려고 한다면 당신의 나라가 한 일과,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어떤 것인지 좀더 정확히 알아야 할 필요가 있어. 우리 베트남은 당신네 나라보다 훨씬 가난했지만 책임 있는 나라로서 행동했네."


이 소설은 실제 작가가 베트남에 오랜 기간 거주하면서 쓴 것이라고 한다. 그가 거기에 머무르면서 어떤 생각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이것만은 분명하다. 국제 사회에서 우리나라가 책임져야 할 일들이 무엇인지, 미래를 책임질 세대가 어떤 일들을 해야 올바른 것인지를 작가는 말하고 싶었다는 것.

그래서 소설의 등장인물들은 이야기한다. 베트남의 아픈 과거를 통해, 노동 운동의 변화를 통해, 현대인들의 각박한 이기주의를 통해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자고. 그 돌이킴을 통해 미래에는 과거의 잘못을 답습하지 말 것이며, 다음 세대는 이전 세대와 같은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랍스터를 먹는 시간

방현석 지음,
창비,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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