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바다 한가운데 그루퍼 한마리

[책읽기가 즐겁다 112] 환경소설 <블루백>을 읽다

등록 2004.12.07 12:09수정 2004.12.08 1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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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자연으로 돌려주는 게 있어야 할 텐데

지난 주에 겨울 나들이를 즐겼습니다. 이곳저곳 둘러보다가 전라도 장수에서 농사 짓는 분 댁에도 놀러갔습니다. 혼자서 슬슬 여러 곳을 둘러보며 전국 나들이를 하는 맛도 퍽 괜찮더군요. 장수에서 터를 잡고 농사 짓는 아저씨와 막걸리 한잔을 나누며 이야기를 하다가 이런 얘기를 들었습니다. "볏짚은 벼가 가장 좋아해요."


요새 웬만한 시골에서는 볏짚을 기계로 묶어서 내다 팝니다. 가을걷이를 마치면 볏짚 묶는 일을 하는 사람이 알아서 찾아와서 척척 묶습니다. 이렇게 묶은 것을 소 공장(소를 키우는 곳. 옛날 같으면 축사라고도 하겠지만, 이제는 닭이나 돼지나 소나 '공장'처럼 되었으니 '소 공장', '닭 공장', '돼지 공장'이라 해야지 싶습니다)에 몇 만원씩 주고 판답니다. 농사일도 도시 물이 들어 돈벌이 중심이 되다 보니 그러는 건데, 이렇게 볏짚을 팔고 빈 들판에는 온갖 비료와 농약을 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겨우 땅심을 북돋워 이듬해 농사를 지을 수 있습니다.

.. 두 사람은 전복 무리에서 하나에서 두 마리씩만 캐고 나머지는 제대로 자랄 수 있도록 남겨두었다. 해초와 바위 틈 사이에서 작은 물고기들이 튀어나와 남은 전복 살점들을 뜯어먹거나, 그들이 휘저어놓은 침전물들을 집적거렸다 .. <블루백> 15쪽

고기잡이가 바다에서 새끼 고기까지 싹쓸이하듯 다 잡아 버리면 그 바다 생태계는 어떻게 될까요? 농사꾼이 논밭에 남겨 놓는 것이 없으면 그 논밭은 어찌 될까요? 뻔하지요? 하지만 우리는 '더 많이 잡고 키워서 얻는' 쪽으로만 눈이 갑니다. 경제 성장을 꼭 해야만 하나요? 지금 있는 그대로를 즐기면서 오붓하게 살아갈 수는 없을까요?

범, 이리, 여우가 산과 들에서 살아간다면 사람들은 무척 무서워할 거예요. 하지만 산과 들에 범, 이리, 여우가 있어야 자연 생태계가 제자리를 찾고 어울릴 수 있습니다. 먹이사슬이 지켜져야 하거든요.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범, 이리, 여우는 씨가 마르거나 있어도 어디 있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아니, 한 군데 있군요. 동물원에요.

<2> 도시에서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


a 겉그림입니다

겉그림입니다 ⓒ 눌와

<블루백>이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이 책이 처음 나오던 2000년께에도 환경 문제에 눈길을 두고 있었으나 이 같은 환경소설까지는 읽을 엄두를 못냈습니다. 그러다가 지난 달에 <블루백>이란 책을 다시 만났고, 지금 와서 읽어 보니 '이렇게 도움이 되고 가슴 아리면서도 살가운 책을 왜 진작 읽을 생각을 못했을까?' 싶더군요.

그러다가 이런 생각도 들었어요. 그때(이 책이 갓 나온 2000년) 이 책을 집어서 읽었더라도 이 책이 주는 맛, 감동을 제대로 못 느꼈을 거라고, 오히려 네 해가 흐른 지금 와서 읽었기 때문에 내 가슴을 뭉클하게 움직일 수 있던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 아벨은 답답했다. 도회지에서는 사람들이 포도송이처럼 한데 몰려 있었고 사람들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듯했다. 아벨은 결코 혼자가 아닌 것같이 보였다. 사람들 틈에 휩쓸려 학교로 갔고 그들 틈에 뒤섞여 숙소로 돌아왔다. 어느 곳에서든 쾅쾅 문을 여닫는 소리, 탁탁 신발을 걷어차는 소리, 목청을 돋우는 사람들의 아우성 소리가 들려왔다. 심지어 밤에 잠자리에 들 때조차도 숙소는 기침 소리, 고함 소리, 배수관을 타고 물 흐르는 소리로 가득 차는 것이었다. 아벨은 사방팔방으로 포위되어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54쪽>

<블루백>은 자연과 어울리면서 살아가는 사람 이야기를 담습니다. 롱보트만에서 태어나서 그곳을 한번도 떠나 보지 않고 살던 어머니 도라와 하나 있는 아이 아벨, 뒷날 아벨과 만나서 혼인하는 스텔라, 아벨과 스텔라가 혼인해서 낳은 아이 도라, 이렇게 네 사람 세 세대가 이어지는 역사를 짤막한 이야기로 담아서 보여 주는 <블루백>입니다.

'블루백'은 크기가 엄청나게 큰 그루퍼란 물고기에게 아벨이 붙여 준 다른 이름(별명)입니다. 바다가 안고 있는 신비스러움, 자연스러움,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을 듯한 블루백이에요. 어쩌면 아벨을 낳은 도라의 어머니 때부터 살았을지 모르는 블루백이고, 이 커다란 물고기는 세 세대를 잇는 마지막 어린 딸 도라까지도 만나면서 늘 그대로, 자신이 사는 바다 한켠에서 조용히 지내요.

남다른 고빗사위가 없이 차분하게 흘러가는 이야기를 즐기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자연스러움을 잃은 우리들은 돈과 물질과 기계로 '자연스러움'을 찾으려고 아득바득 애쓰지 않는가, 하지만 그게 될까, 아직까지는 돈으로 마시는 물을 살 수 있고, 공기도 그렇게 돈으로 사서 마실 날이 올지 모른다, 앞으로는 또 어떻게 될까, 언제까지나 돈으로 모든 것을 다 살 수 있겠느냐, 앞으로는 햇볕마저 돈으로 사서 쬐야 할는지 모르지 않겠느냐…….

도시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은 거의 모두 돈으로 모든 것을 사고 즐기고 누립니다. 어쩌면 환경 재앙이 불어닥쳐서 우리 삶이 죄다 무너져 버려도 다시 '돈'으로 일어설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할 수도 있겠죠. 그런데 그게 사람 삶인가요? 사람도 똑같은 목숨붙이인데, 목숨을 목숨답게 잇는 모습일까요?

보름쯤 앞서 진천을 잠깐 다녀오면서 깜짝 놀랐습니다. 그 한갓지고 고즈넉한 곳이 온통 시끌벅적하고 어수선한 도심지처럼 달라진 모습을 보았거든요. 진천에서 일을 본 뒤 빠져 나오면서 후유 하고 한숨을 쉬었습니다. 울긋불긋 번쩍번쩍 눈이 아플 뿐 아니라 눈둘 곳을 찾기 어려운 그런 도심지가 무엇이 좋다고 사람들은 득달같이 모여들까요?

.. 그해 여름 아벨은 자연에는 탐욕스러운 인간만큼 잔인하고 야만적인 존재는 없다는 사실을 배웠다 .. <93쪽>

맞습니다. 들짐승, 산짐승이 야만스럽거나 무섭거나 잔인하지 않습니다. 사람보다 야만스럽고 무섭고 잔인한 짐승이 어디 있어요? 범이나 이리나 여우 때문에 사라진 짐승이 있습니까? 사자나 코끼리나 캥거루나 토끼나 물뚱뚱이(하마) 때문에 사라진 짐승이 있나요? 이 지구에서 사라진 짐승은 거의 100% 사람이 사라지게 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3> 자연도 사람도 돈으로 사고팔 수 없다

우리들 사람은 어떻게 살아가는가요? 찬찬히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무엇을 믿고 무엇을 얻으며 무엇을 바라면서 살지요? 이름, 명예, 성적, 학벌, 재산, 물질, 권력……. 이런 것이 소중한가요? 이런 것이 믿을 만한가요?

.. 사람들이 아무리 많은 돈을 내놓든 어머니는 꺾이지 않는다는 것을 아벨은 알고 있었다. 어머니는 한 그루 나무처럼 완강하고 또 굳건했다. 하지만 그런 일들이 얼마나 어머니를 지치게 하고 어머니의 시간을 허비하며 어머니의 신경을 곤두서게 했을까. 사람들은 그 땅이 단순한 부동산이 아니라는 것을 알 리 없었다. 그들은 롱보트만이 아벨의 어머니에게는 한 생애이자 친구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리고 이 땅이 어머니에게 남편같은 존재였다는 것도 역시 몰랐을 것이다 .. <100쪽>

어머니 도라와 아들 아벨이 사는 그곳 롱보트만을 관광지로 꾸미고 골프장을 세우고픈 개발업자와 자본가들이 있었답니다. 이 사람들은 어머니 도라를 끔찍하게 아끼는 척하다가는 끔찍하게 괴롭혔다는군요. 하지만 어머니 도라는 언제나 한결 같은 바다 같은 모습으로 이네들을 물리쳤어요. 아니 바다도 뭍도 사람도 있는 모습 그대로 살아갈 수 있도록 지켜냈습니다.

엊그제 계룡산 국립공원을 뚫으며 길을 내는 법안을 아주 자연스럽게(?) 통과시켰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어디 계룡산뿐입니까. 천성산도 그렇고 성미산도 그렇고 북한산도 그렇습니다. 기차든 버스든 무엇이든 타고 다니다 보면 전국 곳곳에 이어지지 않는 길이란 없습니다. 길이 엄청나게 많습니다. 그런데 또 길을 내고 굴을 뚫고 얼마 남지도 않은 자연 생태계를 무너뜨립니다.

이런 일을 왜 할까요? 모든 목적은 하나로 모입니다. 바로 '돈'입니다. 뜯어 먹고 뜯어 먹어도 자꾸자꾸 뜯어 먹을 수 있는 자연이기 때문에, 자연을 뜯어 먹는다고 자연이 그렇게까지 '앙탈(?)'을 부리지 않으니 마음 놓고 뜯어 먹습니다. 또한 자연을 뜯어 먹는 건 거저인 줄 압니다.

<4> 자연스럽게 자연으로 돌아간 어머니

책으로 이야기를 돌아가서, <블루백>은 어머니 도라가 숨을 거두고 손녀 도라(손녀 이름은 어머니 이름을 따서 지었다는군요.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바다를, 자연을 있는 그대로 껴안으면서 사랑스럽게 살아 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요)가 바다와 처음 만나는 모습까지 보여주면서 끝을 맺습니다.

.. "... 어머니는 예나 다름없이 바다를 이해하는 분이시오. 어머니는 그 어디로도 간 적이 없소. 어머니는 채소를 키우고 물고기를 드시고, 그러면서 한 장소를 구한 거요. 나는 명색이 과학자, 제딴은 명사지만, 결코 어느 한 곳도 구하지 못했소. 어머니는 한 자리에 머무르면서 다만 지켜보고 들으면서 터득한 것이오. 모든 것을 느낌으로써 말이오..." .. <130쪽>

어린아이였던 아벨을 키운 어머니 도라는 "바다를 바다 그대로이게끔 내버려 두고" 그 안에서 자기와 바다가 하나가 되어 산 사람입니다. 아벨은 이제 사랑하는 아내를 만나 혼인을 해서 아이를 낳았고, 어머니 도라는 나이 들어서 자연스럽게 숨을 거두었습니다.

아벨은 어머니 주검을 바다에 놓아 주고, 갓 태어난 딸아이를 돌보면서 비로소 느껴요. 바다를 아는 일은 바다를 있는 그대로 보고 놓아 주어야 비로소 알 수 있다고, 바다를 가지려 하거나 억지로 지킨다고 해서 알거나 가지거나 지킬 수 있는 게 아님을 느낍니다.

.. 아벨과 어머니는 그들 나름대로 고기를 잡고 과일과 야채를 가꿨다. 오리와 닭을 쳐서 고기와 알을 마련했고, 염소 한두 마리를 키우면서 그 젖으로 우유를 대신했다. 롱보트만으로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다. 빗물 말고는 물이라고는 없었으며, 텔레비전도 없었다. 그들처럼 사는 것은 때때로 힘든 일이 아닐 수 없었지만, 아벨은 그와 다른 방식의 삶을 전혀 몰랐다. 아벨은 날마다 국립공원 숲 속을 이리저리 뛰어다녔고, 바다에서 헤엄쳤다. 가끔 외롭기도 했지만 어머니와 함께 있는 것이 좋았다 .. <26~27쪽>

책을 덮은 뒤 처음부터 다시 쭉쭉 살펴보았습니다. 사람이 즐겁게 사는 일, 행복을 찾고 누리는 길이란 무얼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가진 것이 없어 보이지만 많이 가진 사람이 있고, 가진 것이 많아 보이지만 가진 것이 없는 사람이 있어요. 물질을 가지려면 정신을 잃어야 하고, 정신을 가지려면 물질을 잃어야 해요. 둘 모두를 함께 가지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누구나 갈림길에 섭니다.

자, 두 가지 갈림길에서 어느 쪽 길을 골라서 여기까지 걸어오셨습니까? 앞으로는 어느 쪽 길로 곧게 가시겠습니까? 물론 둘을 어우르면서 즐길 수도 있습니다. 꼭 어느 한쪽만 고집하거나 매달리는 일은 안 좋을 수도 있으니까요. 그렇다면 우리가 살아가고 꾸리는 삶에서 무엇을 중심에 놓으시겠습니까? 물질입니까, 정신입니까?

'촌스럽다'는 "세련된 맛이 없이 어수룩하다"를 뜻하는 말이랍니다. 이 말은 '도시스러움'이 "세련된 맛이 있고 번드르르하다"를 뜻한다는 비뚤어진 생각에서 나온 것입니다. 생각해 봐요. '촌스러움', '시골스러움'이 얼마나 구수하고 수수합니까. 꾸미지 않고 감추지 않고 속이지 않은 있는 그대로 모습인 '시골스러움'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자연스러움'이란 말을 생각해 봐요. 사랑이든 일이든 놀이든 '자연스러울' 때가 가장 좋다고 하죠? 집안 살림살이나 온갖 물건도 '자연스러움'을 앞세워서 광고하면서 팔잖아요? 그렇다면 이게 뭐겠어요. "자연과 같이, 자연과 어울려서, 나 자신도 자연 가운데 하나로 녹아 들어가는" 게 가장 아름답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 '시골스러움'이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환경 소설 <블루백>은 바로 이 자연스러움이 가장 아름다우며, 자연스러움이란 있는 그대로를 보고 즐기고 나눌 수 있는 마음임을 차근차근 풀어서 들려줍니다. 작은 책치고 책값이 비싸다고 생각했는데(2000년에 처음 나왔을 때는), 이제는 네 해 사이 물건값도 많이 올라서 퍽 값싸고 알맞다는 느낌이 드는군요. 이 책이 새책방에서 오래오래 팔리고 사랑받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블루백

팀 윈튼 지음, 앤드루 데이빗슨 그림, 이동옥 옮김,
눌와,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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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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