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흐르면 마음도 편해질거야"

아버지는 대장암, 아들은 척수종양...유난히 힘들었던 한 해

등록 2004.12.13 20:52수정 2004.12.14 0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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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녀석 준수가 척수종양으로 수술을 받은 지 두 달 열흘이 지났습니다. 하반신 마비를 벗어나기 힘들 거라던 의사의 선고에 절망하며 보내온 나날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갑니다.

준수가 수술을 받은 후 발가락의 움직임에 온 신경을 쏟으며 살아오면서 아내와 제가 주문처럼 주고받던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앞으로 살면서 이보다 더 어려운 일은 없겠지?"
"그래. 준수가 걷게만 된다면 어떤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을 거야."

어려운 상황을 이겨내기 위한 주문이기도 했지만 진심어린 말이었습니다. 세상의 유혹을 이겨낼 수 있다던 사십대에 맞이한 시련은 우리 부부에게는 그야말로 형극의 고통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보다 더 큰 시련은 없을 거라고 믿으며 살아왔던 것이지요.

그런데 준수가 수술을 받은 지 두 달쯤 지난 후 이번에는 아버지가 병원에 입원하셨습니다. 맹장으로 여긴 병이 게실염(憩室炎)으로 판정되어 수술을 받고 그로부터 3주 뒤에 대장 내시경 검사 결과 대장암으로 판명이 나면서 두 번째 수술을 받으셨습니다.

가혹하단 생각밖에 다른 생각이 없었습니다. 내가 무슨 죄를 많이 지어서 이렇게 가혹한 일을 당해야 하나 원망도 많이 했습니다. 원주 기독교 병원에 입원한 아버지 병실에서 서울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한 준수의 병실을 오가며 환자 침대 곁의 보조 침대에서 새우잠을 자다 잠이 깨면 식은땀이 흘러내리기 일쑤였습니다.

절망이란 말을 가슴에 담고 살았습니다. 고통의 무게에 짓눌려 이 상황에서 도피하고 싶은 심정이 들 때도 있었습니다. 그 어려운 상황에 한가지 힘을 얻게 된 건 아홉 번째 수술을 받은 남편을 간호하시던 백발의 할머니가 제게 건네준 말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두 번째 수술 후 고통을 호소하며 괴로워하실 때 같은 병실에 있던 그분이 제 손을 꼭 잡아주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시간이 약이라네. 시간이 흐르면 부친 고통도 줄어들고 자네 마음도 편안해질 거야."

할머니 말씀을 들을 때엔 그다지 가슴에 와 닿는 말은 아니었습니다. 침대에 누워 고통을 호소하시는 아버지의 절규가 온 신경을 헤집고 있던 상황에서 그 말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지요.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 말이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내가 당한 고통보다 더한 고통을 당하며 괴로운 생활을 하는 주변 사람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지요.

준수의 하반신 마비라는 절망스런 상황에 힘들어하던 제게 전신마비의 상황에서 재활치료를 하는 다른 이들의 아픔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못하는 아들을 휠체어에 싣고 작업치료실에 들어와 팔과 다리를 움직여주며 재활을 꿈꾸는 또 다른 부모의 간절한 희망이 비로소 눈에 들어왔습니다.

암 선고를 받고 입·퇴원을 반복하며 항암치료와 수술을 번갈아 하면서도 환자를 간호하며 꿋꿋하게 사는 보호자들의 간절한 희망은 병실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일입니다.

척수종양 수술을 받은 지 두 달 열흘이 지난 준수는 이제 평행봉을 잡으며 걷기 훈련을 하고 있습니다. 하반신을 움직일 가능성이 1%도 없다던 의사의 말과는 달리 두 다리에 힘이 붙고 다리의 움직임이 눈에 띄게 좋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앞으로 영영 걸을 수 없다면 산에 들어가 중이 될 거라며 엄마의 가슴을 헤집어 놓던 준수 녀석도 이젠 걸을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열심히 재활치료를 받고 있습니다. 평행봉을 잡고 걸음마 연습을 하고 있는 녀석을 보면 그간의 고통이 봄날 눈 녹듯이 사라집니다.

두 번째 수술을 받으신 아버지도 차츰 회복되고 있습니다. 물론 암이라는 병이 앞으로 얼마나 많은 시련이 되어 아버지를 괴롭히고 우리 가족의 멍에가 될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최선을 다하렵니다.

2004년 한 해는 영원히 잊을 수 없는 해가 될 겁니다. 아들 준수는 척수종양으로, 아버지는 대장암으로 수술을 받고 입원 치료하고 있습니다. 절망의 수렁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허우적대며 살아온 나날들입니다.

그래도 희망을 얘기하렵니다. 한 할머니가 알려주신 비방을 믿고 희망을 찾으렵니다. 시간이란 명약의 효험을 믿으며 현실에 최선을 다하며 살다보면 아침 햇살의 눈부심처럼 우리 가족에게도 웃음과 행복이 돌아올 거라는 희망을 간직하고 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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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서 있는 모든 곳이 역사의 현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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