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노동자들의 고난의 기록

[서평] <제7의 인간>(존 버거· 장 모르 지음)

등록 2004.12.17 04:23수정 2004.12.17 1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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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빛

외국인 고용허가제가 지난 8월에 시행된 이후로 네 달이 지났다. 이주노동자의 인권을 보호하고 합리적 제도로 자리매김하겠다는 것이 고용허가제의 취지였지만 현실에 맞지 않는 법 때문에 시행 전부터 이주 노동자들의 반발과 시민단체들의 비판을 받았다.

우려는 현실로 나타나 이주노동자들은 강제 출국을 피해 잠적하거나 명동 성당에 천막을 치고 얼마 전까지 근 1년간 농성을 벌였다. 그리고 최근엔 강제 출국자에 대한 비인간적 대우 시비도 끊이지 않고 있다.


이런 와중에 중소기업청은 이주노동자 문제의 주요 원인이던 산업연수생을 현재보다 2배 가량 늘리겠다고 발표했다. 고용허가제로 풀릴 것 같던 문제가 다시 실타래처럼 얽혀드는 양상이다.

MBC 프로그램 '느낌표'에서 방영한 '아시아, 아시아' 코너를 본 적 있는가? 우리는 그 프로를 보고 이주노동자들이 돈만 주면 일을 하는 기계가 아니라 누군가의 아버지, 어머니 또는 누군가의 아들, 딸, 동생인 우리와 같은 인간이라는 것을 배웠다. 그들은 자국의 경제적 어려움으로 마지못해 고향을 떠나와 돈을 벌어야 하는 고달픈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다.

유럽 이주노동자들의 경험에 대한 글과 사진집인 <제7의 인간>도 인간이라는 틀로 바라 본 이주노동자의 삶을 다루고 있다. 글을 쓴 이는 영국의 비평가이자 다큐작가인 존 버거이고 사진은 존 버거와 함께 <말하기의 다른 방법> <행운아>를 작업한 장 모르가 찍었다.

존 버거의 글은 성실한 관찰자로서 통찰력을 보여주기도 하다가 때로는 이주노동자가 쓴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이주노동자의 삶에 대해 생생히 그려내고 있다. 또 장 모르의 사진은 이주노동자들이 처한 상황과 그들의 슬프고도 미묘한 감정의 떨림을 있는 그대로 잘 보여주고 있다.

이주노동의 세계적 필요성이란 무엇인가


터키와 북아프리카의 많은 사람들이 서유럽 경제의 성장기에 이주노동을 떠났다. 지금이야 이들이 각 나라에 정착해 그들의 자식을 기르며 시민으로 살지만 이주노동 초기에는 현재 우리 나라의 이주노동자들처럼 상황이 녹록하지 않은 모양이다.

물론 우리 나라처럼 구타를 당하거나 임금을 주지 않는 야만적인 상황은 아니었다. 하지만 초기 이주비용을 위해 엄청난 빚을 지고 1년 내외의 계약기간 내에 빚을 갚고 돈을 벌기 위해 닥치는 대로 힘든 일을 하는 모습은 전 세계 이주노동자들의 공통된 모습인 것 같다.


존 버거는 이주노동은 이주노동자 자신도 깨닫지 못하고 있는 역사적 필연성이 있는 것이라고 보았다. 세계 경제체제가 이주노동자들의 모국을 저개발 상황으로 몰고 간 것이 이주노동의 1차적인 원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흔히 서유럽의 노동인구가 줄어서 터키나 북아프리카의 노동력이 필요했다는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라고 말한다. 서유럽은 자본과 기술을 갖추었기 때문에 새로운 산업분야가 계속 발전하고 이에 따라 경제수준이 높아진다.

이렇게 되면 직접 생산에 투입할 자국의 노동자를 찾기가 어렵게 되고 이로 인해 저개발국의 남아도는(사실은 산업의 미발달로 노동인구를 수용할 산업이 없는 상태) 노동력이 필요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존 버거는 이주노동자의 존재가 서유럽의 노동자들에게 '계급적으로 같은 위치에 있지만 겉으로 보이는 차이들(이주노동자들의 낮은 임금, 열악한 생활 환경)때문에 자신의 처지에 대해 안도하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고 말한다. 이주노동은 이주노동을 받는 나라의 경제성장에 기여할 뿐 아니라 사회 안정에도 기여하는 것이다.

이주노동의 어려움

<제7의 인간>은 이주 노동을 해야 하는 사람들의 고통에 대해 상세히 묘사하고 있다. 프랑스의 통계조사 결과 이주노동자들의 정신병 발병률이 프랑스 시민보다 2-3배나 더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그러나 존 버거는 이것을 정신병이라기보다는 이주노동자들이 처한 불안과 불행으로 2-3배나 더 고통을 받고 있는 상황이라고 말하는 편이 더 과학적이라고 말한다.

그는 이주노동을 하러 타국으로 가는 것은 '인간들이 아니라' 기계 관리인, 청소부, 땅 파는 인부, 공원이라고 말한다. 이들이 인간(남편, 아버지, 시민)으로 재생되기 위해서는 그에게 아무 장래가 없어 떠났던 고향으로 돌아가는 때인 것이다.

존 버거는 이주노동이 마치 감옥과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 죄수가 감옥에서 보낸 시간을 찾을 수 없듯 이주노동자는 타국에서 노동하는 동안 모국에서 보내야 할 삶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그들은 감옥(이주한 나라)에서 감옥 밖의 세상(그들의 고향)을 꿈꾸며 노동에 대한 별다른 보람도 없이 감옥을 벗어나기 위한 강제노역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주노동자 40만, 무엇을 해야 하는가

우리 나라는 지금 40만, 인구의 1%가 이주노동자인 나라다. 그리고 이주노동자들의 정착 역사도 10년이 넘어가고 있다. 하지만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정책이 처음과 얼마나 달라졌는지 의문이다. 그들은 일을 할 수 있다고 해서 온 것이고 실제로 그들은 산업현장 곳곳에서 중요한 몫을 담당하고 있다. 수긍할 만한 합리적 절차를 만들어 서로 이득이 되는 길을 찾을 수는 없는 것일까.

<제7의 인간>을 보며 서유럽으로 간 이주노동자들의 어려움에 대해 공감하다가도 우리 나라 이주노동자들의 삶을 생각하면 존 버거가 만난 이주노동자들은 그나마 행복한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들은 고독은 깊었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죽음이라는 극단적 방법이나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서 최소의 인권과 노동권을 지키겠다고 투쟁하지는 않았을테니 말이다.

오는 18일은 유엔이 정한 '세계 이주노동자의 날'이다. 하지만 우리 나라의 이주노동자들은 이 날 출입국 사무소 앞에서 농성을 한다고 한다. 그들이 웃으며 기념식을 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 <제7의 인간>에 나오는 이주노동자들이 지금은 좀더 나은 상황에 있는 것처럼 말이다.

제7의 인간 - 유럽 이민노동자들의 경험에 대한 기록

존 버거 지음, 장 모르 사진, 차미례 옮김,
눈빛,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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