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라일락꽃 그늘 아래 - 14회(3부 : 라일락 꽃향기)

- 첫사랑은 아픈 거예요

등록 2004.12.28 09:11수정 2004.12.28 12:40
0
원고료로 응원
벽과 나비 / 그림 : 김인기 화백
벽과 나비 / 그림 : 김인기 화백
그녀가 혼자가 되면 바짝 다가가 말을 건넬 계획이었다. 그런데 좀처럼 그녀는 혼자 있지를 않았다. 그녀는 좀 전에 우리가 수업을 받았던 201 강의실 안으로 들어가 누구를 찾는 것처럼 두리번 두리번거리더니 이내 나와서는 벤치에 앉아 친구로 보이는 여학생과 한참을 얘기하고 있었다.

언뜻 보니 어깨가 처진 것이 왠지 힘이 없어 보였다. 이윽고 우리 반 박영희가 합류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바로 일어서서 어디론가 같이 가고 있었다. 미행하듯 뒤따랐다. 혹시나 들킬까봐 조심하면서. 그녀는 영희와 그리고 모르는 여학생 하나와 함께 학생회관으로 들어섰다. 역시 뒤를 따랐다.


그녀들은 자판기 앞에서 커피 한 잔씩 뽑아 들더니 그대로 음악 감상실로 향했다. 나는 음악감상실 앞에서 약간 서성거리다가 용기를 내어 그 안으로 들어갔다. 불빛이 가늘어서인지 약간은 실내가 어두웠다. 그녀들은 중간쯤에 앉아 있었다. 나는 그녀들이 잘 보이는 뒤쪽에 자리를 잡았다.

부드러운 음악이 실내를 이슬비처럼 적시고 있었다. 가만히 귀를 기울여보니, 브람스의 '바이올린 소나타 제3번 2악장'이었다. '이 곡은 마음이 우울할 때 들으면 공감할 수 있다고 했는데.' 고교 때 음악선생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브람스의 음악이 꼬리를 감추자, 이번에는 바흐의 'G선상의 아리아'가 조용히 울려 퍼졌다. '이 곡은 불안할 때 들으면 좋은 음악인데.' 또 내 나름대로 평을 하고 있었다. 이어서 드뷔시의 피아노 소나타 '비오는 정원'과 쇼팽의 '야상곡' 중 9번이 잔잔하게 물결치고 있었다.

이 두 곡은 내가 잠 못 이룰 때 즐겨 듣던 음악이었다. '아무래도 지금 음악을 들려주고 있는 저 DJ에게 안 좋은 일이 있나보다. 계속해서 우울한 음악들만 선곡하는 것을 보니, 그러나 어쨌든 내 현재의 마음 상태를 잘 읽고 있는 것 같아 싫지는 않군.'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곡이 끝나자 바로 DJ의 말이 스피커를 통해 흘러 나왔다.

"지금까지 들으신 네 곡은 모두 '허초희와 그 친구' 분들이 신청한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잘 들으셨나요? 신청한 음악으로 보아 슬프거나 답답한 일이 있어 보이는 데, 다음 곡을 감상하시면서 힘을 좀 내십시오. 우리는 젊지 않습니까?"


그러는 것이 아니겠는가! '지금까지의 음악을 초희씨가 신청했다고, 그렇다면 그녀에게 안 좋은 일이…. 그랬구나! 무슨 안 좋은 일일까? 설마 나를 보기 좋게 바람맞힌 일? DJ가 들려주는 모차르트의 '호른협주곡 제3번 1, 2, 3악장'을 감상하면서 내내 그 생각에 골몰하고 있었다.

모차르트의 음악이 호흡을 멈추자 그녀는 친구들과 함께 일어섰다. 나는 그녀가 나를 알아 볼까봐 얼른 고개를 돌렸다. 다행히 나를 보지 못하고 음악감상실 문을 나섰다. 나도 일어나 음악감상실을 빠져 나왔다.


그녀들은 이번에는 써클룸(동아리방)으로 향했다. 역시 뒤따랐다. 그녀와 친구들이 어떤 한 방으로 들어갔다. 가까이 가서 보니 팻말을 보니 서예반이었다. '아! 써클 활동을 한다더니 붓글씨를 하고 있었구나.'

나는 들어갈 수도 없고, 할 수 없이 조금 떨어진 곳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약 2시간 정도 기다리니까 그녀가 나왔다. 이번에도 친구들과 함께였다. 학생회관 앞에서 친구 하나와 헤어졌다. 이제는 영희와 둘이서 영탑지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어느새 어둠이 깔리고 있었다. 눈을 들어 보니 시계탑의 시계가 7시 3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중앙도서관 앞에 이르자, "초희야, 너 먼저 가. 나는 도서관에 잠깐 들렀다 갈게."
"같이 가줄까?"

"아니야, 너 피곤할 텐데 먼저 가서 쉬어."
"그래 그럼 먼저 갈게. 천천히 볼 일 보고 와."
그러면서 둘이 헤어지는 것이 아닌가! 기다리고 따라다닌 보람이 있었다.

그녀는 책을 옆에 끼고 혼자서 후문 쪽으로 나있는 길을 터벅터벅 힘없이 걸어가고 있었다. 가로등 불빛이 길게 내려와 양쪽에서 그녀를 감싸듯 비추고 있었다. 길가 숲에서는 이름 모를 새들이 뭐라고 지껄이고 있었다. 내가 용기를 내어 바짝 뒤따라갔다.

처음에는 무심코 걷던 그녀가 인기척을 느꼈는지 갑자기 움찔하며 뒤돌아보았다. 우리 두 사람은 서로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똑같이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얼마동안 그렇게 침묵이 흘렀을까? 내가 먼저 한 발 다가가 그녀에게 말을 건넸다.

"놀라지 마세요. 전해드릴 게 있어서‥‥, 저어기‥, 이거 원래 초희씨 나오시면 주려고 준비했던 거예요. 그리고 이건 행운을 비는 마음으로 산 건데‥‥. 모두 그냥 버릴까 하다가 생각해보니 이 물건들의 주인은 이미 초희씨라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다른 생각은 없어요. 정말이에요. 가져다가 요긴하게 쓰면 좋고 필요 없으면 버리기나 남을 줘도 괜찮아요. 어차피 이건 제 것이 아니라 초희씨 것이니까요."

그렇게 말하고 나서 선물과 행운목이 든 가방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그러나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좀처럼 움직이지를 않았다.
"왜 부담스러운가요? 부담 가질 필요 없어요. 그냥 받으세요."
그래도 그녀는 미동도 하지 않은 채 계속 고개만 떨어뜨리고 있었다.

"그럼, 그냥 여기에 놓고 갈게요. 싫으면 안 가져가도 돼요. 그럼 안녕히 가세요."
그렇게 말하고 돌아서는데,
"저기요?"
하면서 그녀가 나를 불러 세웠다. 가려던 발걸음을 멈추고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울고 있었다. 눈물이 범벅이 되어 온 얼굴이 물에 젖은 듯 했다. 손수건이라도 주고 싶었지만 마음뿐이었다.
"미안해요 정말."
그녀가 그렇게 말했다. 무엇이 미안하다는 말인가? 나는 그녀가 지난 토요일에 나오지 못한 것에 대해 그렇게 말하는 줄 알고 다음과 같이 얘기했다.

"아니에요. 그럴 수도 있죠. 오히려 상대방의 의사도 제대로 파악하지 않은 채 일방적으로 편지하고 만나자고 약속한 저의 잘못이 크죠. 초희씨의 입장에 서서 생각해 봤어요. 얼마나 황당한 일이었겠어요? 이해가 되더라구요. 그 동안 많이 귀찮았을 거예요. 정말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젠 걱정 안 하셔도 돼요. 다 시는 편지하는 일 없을 것이고 초희씨 주위에서 얼쩡거리는 일도 없을 테니까요."

나는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참고 또 참았지만 끝내 눈가에 이슬이 맺히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갑자기 가로등 불빛이 뿌옇게 보였다. 내 얘기를 듣고 있던 그녀의 울먹이는 소리도 점점 커져 내 귓가에까지 들렸다.

"그게 아니에요 그게‥‥‥."
그게 아니라니, 이게 무슨 말인가? 나는 귀를 쫑긋 세우고 그녀의 다음 말을 경청했다.
"철민씨가 싫어서 안 나간 게 아니에요. 피치 못 할 사정이 있었다고요. 어쨌든 너무 너무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서 고개를 들 수가 없어요."

그녀의 말에 의하면, 그녀도 처음에는 '누가 또 장난질을 하는 구나' 그렇게 생각했단다. 왜냐하면 여고 때부터 여러 사람이 갖가지 방법으로 치근대는 것을 이미 경험한 터라 이번에도 그 중 하나이거니 했단다.

* 15회에서 계속됩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교육포럼 <교육을바꾸는새힘>,<학교안전정책포럼> 대표(제8대 서울시 교육의원/전 서울학교안전공제회 이사장) "교육 때문에 고통스러운 대한민국을, 교육 덕분에 행복한 대한민국으로 만들어가요!" * 기사 제보 : riulkht@daum.net


AD

AD

AD

인기기사

  1. 1 유인촌의 문체부, 청소년은 건드리지 말았어야 했다 유인촌의 문체부, 청소년은 건드리지 말았어야 했다
  2. 2 "손님 이렇게 없을 줄은 몰랐다"는 사장, 그럼에도 17년차 "손님 이렇게 없을 줄은 몰랐다"는 사장, 그럼에도 17년차
  3. 3 "주변에 주식 투자로 5천만원 이상 번 사람 있나요?" "주변에 주식 투자로 5천만원 이상 번 사람 있나요?"
  4. 4 한강 노벨문학상 수상에 '조선일보' 왜 이럴까 한강 노벨문학상 수상에 '조선일보' 왜 이럴까
  5. 5 한강 노벨상에 숟가락 얹는 보수, 그들에게 필요한 염치 한강 노벨상에 숟가락 얹는 보수, 그들에게 필요한 염치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