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을 그냥 보낼 수 없었습니다

합천 대안학교 원경고에서 열린 '시 낭송의 밤'

등록 2004.12.27 15:11수정 2004.12.30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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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합천의 대안학교인 원경고등학교에서 작년에 이어 올해도 방학 전 행사인 '시 낭송의 밤'이 열렸습니다.

겨울 방학을 하루 앞둔 23일 저녁, 공동체 생활을 함께 한 교사와 학생들이 방학으로 인한 헤어짐의 아쉬움을 나누고, 학생들에게 수준 높은 문화적 체험을 제공하여 한 학년을 뜻깊게 마무리하고자 원경고등학교 선생님들이 준비한 무대였습니다.

a 원경고등학교 선생님들의 여는 시 낭송

원경고등학교 선생님들의 여는 시 낭송 ⓒ 정일관

사실 겨울 방학을 앞둔 시점이라 교사들은 성적 처리와 연수 계획, 내년 교육과정 준비로 매우 분주하였고, 학생들은 기숙사를 정리하고 짐을 챙기고 청소하느라 바빴기 때문에 '시 낭송의 밤'을 준비하는 일은 참으로 벅찼습니다.

그러나 원경고 교사들은 방학이 되었다고 아이들을 그냥 보낼 수 없었습니다. 바쁜 가운데서도 틈을 내고 짬을 내어, 대자보를 붙여 공고하고 낭송할 시와 배경음악을 모으고, 시 낭송에 참가할 학생들의 신청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학생 12명을 선발하고 교장 선생님을 비롯한 교사 7명을 섭외하여 총 22편의 시를 낭송하게 하였습니다.

a 김대건, 강연정 학생의 시 낭송

김대건, 강연정 학생의 시 낭송 ⓒ 정일관

그리고 무대를 아름답고 포근하게 꾸미기 위해 크리스마스 트리를 켜고, 억새풀을 꺾어서 항아리에 담고, 발을 치고 벤치와 탁자, 소파, 양탄자를 배치하였습니다. 또한 올해는 낭송할 시의 내용을 파워포인트로 만들어 스크린에 아름답게 비추어줌으로써 시를 듣는 동시에 볼 수 있게 하여 시 낭송의 효과를 더 크게 하였습니다.

마침내 방학식을 하루 앞둔 23일 저녁 7시, 아름다운 제2회 '시 낭송의 밤'의 무대가 열렸습니다. 필자와 조소정 학생회 부회장의 사회로 진행된 '시 낭송의 밤'은 2시간 동안 아름답고 따뜻하며 은근한 분위기 속에서 모두의 시심을 수놓았습니다.

a 선생님과 학생들이 함께 꾸민 수화 공연-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선생님과 학생들이 함께 꾸민 수화 공연-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 정일관

먼저 무대 위에 촛불을 밝히고 합천에서 피아노를 가르치고 있는 정명화님의 피아노 연주로 시작을 알렸습니다. 이어 '여는 시'에서 성일환, 김현숙 교사가 나와 유치환 시인의 '행복'을 함께 낭송하며 분위기를 고조시켰습니다. 이 두 교사는 또한 프로스트의 시 '가지 않는 길'을 영어 원문으로 낭송하여 영시의 경험을 아이들에게 전해주기도 하였습니다.


계속해서 정성훈·권소희 학생은 황동규의 '조그만 사랑노래', 신경림의 '갈대'를, 오윤미·김인욱 학생은 김남조의 '편지'와 정호승의 '수선화에게'를, 임지선·서동기 학생은 김춘수의 '꽃'과 함민복의 '선천성 그리움'을, 강연정·김대건 학생은 이해인의 '황홀한 고백', 윤동주의 '서시'와 류시화의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를 낭송하였는데, 특히 김대건 학생은 두 편의 시를 외워 낭송하여 많은 박수를 받았습니다.

a 교장 선생님과 여 선생님의 시 낭송

교장 선생님과 여 선생님의 시 낭송 ⓒ 정일관

그리고 박력·박미경 학생은 각각 안도현의 '기다리는 사람에게'와 김소월의 '가는 길'을 낭송하였고, 최은비·임영진 학생은 정지용의 '호수1'과 안도현의 '너에게 묻는다' 등 짧은 시를 낭송하여 짧은 시가 주는 느낌을 나누기도 하였습니다.


학생들의 시 낭송 사이 사이에 교직원들도 둘씩 짝을 지어 무대에 올라갔습니다. 교장 선생님은 정호승의 '희망을 만드는 사람이 되라'를, 전경인 교사는 곽재구의 '새벽 편지'를 낭송하였고, 교감 선생님과 백윤정 교사는 도종환의 '내가 사랑하는 당신은'을 함께 낭송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미경·고미경 교사도 각각 류시화의 '그리움의 덧문을 닫을 시간'과 이외수의 '가끔씩 그대 마음 흔들릴 때는'을 낭송하였고, 시인인 필자는 자작시 두 편을 낭송하였습니다(아래 상자기사 참조).

a 2학년 박력 학생의 시 낭송-기다리는 사람에게

2학년 박력 학생의 시 낭송-기다리는 사람에게 ⓒ 정일관

찬조 출연자들의 도움도 컸습니다. 학교 내에서 관악 연주와 피아노 연주, 그리고 수화 공연에 여러 학생들이 참가하였고, 외부에서도 피아노 연주에 정명화님, 부산에서 살다가 합천 가회에 귀농하여 농사를 지으면서 노래 교실을 운영하고 있는 석갑주님, 오카리나를 멋지게 연주한 김화엽님이 참가하여 '시 낭송의 밤'을 더욱 빛나게 하였습니다.

아이들의 환호 속에 '시 낭송의 밤'은 끝이 나고, 식당에 모여 선생님들이 미리 준비해둔 '오뎅탕'을 나누어 먹으며 1년을 무사히 보내고 방학을 맞이하는 모두를 자축하였습니다. 뜨거운 오뎅탕 국물처럼 겨울밤이 따뜻하게 데워지는 것 같았습니다.

a 진행을 맡고 있는 선생님과 학생. 탁자 위의 촛불이 아름답다

진행을 맡고 있는 선생님과 학생. 탁자 위의 촛불이 아름답다 ⓒ 정일관

겨울은 쓸쓸하였으나 아이들은 방학 기대로 들떠 있었고, 갑신년 한 해가 저물어가는 즈음에 학교의 마지막 행사를 '시 낭송의 밤'으로 마감한 것은 의미가 새롭고 크다 하겠습니다.

시를 아름답게 만나기가 쉽지 않은 요즘 교과서에서만 시를 접하는 아이들, 시는 어렵고 재미없다는 선입견들 속에서 시와 아이들의 벽을 허무는 소중한 계기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나아가 방학이 되면 아이들을 보내기 바쁜 학교가 아이들에게 의미 깊은 행사를 제공하여 즐겁고 속 깊은 추억을 쌓아가게 함으로써 공동체 모든 가족들이 성숙하면서 따뜻하고 정겨운 교육을 회복해나가는 데 더 큰 의미가 있다 할 것입니다.

<낭송 시> 황정리 편지 3.
노을

오늘은 저녁이 환하였습니다. 하루의 먼지를 털고 옷을 갈아 입은 후, 글쓰기가 잘 되지 않는 수근이 보충공부를 하기 위해 들어선 운동장에서 저는 노을빛에 온통 젖었습니다.

해가 서산을 넘어가다가 머뭇거리는 사이 켜켜이 구름 겹겹이 빛을 머금고 있다가 금빛으로 되쏘는 노을로 운동장이 환하게 물들고, 도서관 벽이 엷은 금칠을 하여 석양에 젖은 서부 영화를 보는 듯 하였습니다.

구월이라 알속 여물어가는 나락도 금빛으로, 검은 꽁무니로 뽑아 지은 거미줄도 금빛으로, 꽃을 피우려 애쓰는 코스모스 키 큰 줄기도 금빛으로, 논두렁 무성한 콩포기들도 금빛으로, 느티나무 잎사귀들도 금빛으로 출렁이고, 지나가는 아이들, 공부 못하는 아이들 얼굴도, 노을은 대웅전 부처님처럼 장엄을 하였습니다.

가슴이 벅차 올랐죠. 운동장 한 가운데 서서 지기 전의 해가 자아내는 영상물을 관람하면서 저는 세상을 온통 금빛으로 물들였다가 다시 그 빛을 거두어가는 짧은 찰나를 아쉬워하였습니다.

한동안 어둠에 싸여 저기 먼 불빛이 따뜻하게 보이는 황정리의 저녁, 빛과 어둠이 교행하는 시간의 열차를 타고 수근이와 글읽기를 하였습니다.
/ 정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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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합천의 작은 대안고등학교에서 아이들과 만나고 있습니다. 시집 <느티나무 그늘 아래로>(내일을 여는 책), <너를 놓치다>(푸른사상사)을 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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