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성산 일출봉에 오르겠어요"

[2004 나만의 특종] 몸이 불편한 익진이가 성산 일출봉에 오른 사연

등록 2004.12.28 15:00수정 2004.12.28 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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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4월 28일 성산 일출봉 정상에서
2004년 4월 28일 성산 일출봉 정상에서김환희
T.S. 엘리엇은 그의 작품 <황무지>에서 4월은 잔인한 달이라고 했다. 그 잔인한 달 4월에 왠지 나에게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바로 제주도 수학여행.


지금까지 줄곧 1학년과 3학년 담임만 해온 터라 올해 초 2학년 담임으로 배정 받았을 때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다. 마치 어린 시절 명절을 기다리는 마음 같았다. 나는 고등학교 2학년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학기 초부터 수학여행을 기다렸다.

수학여행을 앞둔 4월 둘째주 토요일. 퇴근 무렵 교무실로 돌아와 보니 책상 위해 편지 한 통이 놓여 있었다. 편지 속 낯익은 글씨체의 주인공은 내가 1학년 때 가르쳤던 '(김)익진이'.

익진이는 뇌성마비 장애로 행동과 말이 부자연스러운 학생이다. 지금은 내가 가르치지 않아 만나는 횟수가 줄어들었지만 익진이에 대한 관심은 계속 가지고 있었다. 익진이 또한 학년이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고민이 있으면 항상 나를 찾아와 이야기했다. 익진이에 대한 나의 관심이 진심으로 전해졌기 때문이리라.

저도 수학여행에 가고 싶어요

편지에서 익진이는 수학여행 참가 여부를 놓고 고민하고 있다고 했다. 뇌성마비인 자신의 처지를 잘 알고 있었기에 본인 스스로도 고민이 되었던 모양이다. 나도 쉽사리 익진이에게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있는 사항은 아니었다.


다음 주 월요일 점심 시간. 수학여행 문제를 의논하기 위해 나는 익진이를 교무실로 불렀다.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몰라 한참을 망설이다가 말문을 열었다.

"그래, 수학여행 정말 가고 싶니?"
"……."


익진이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 의미를 알 수 없어 난감해진 나는 다시 물어 보았다.

"솔직하게 얘기해 보렴. 선생님이 도울 수 있다면 도와 주마. 가고는 싶은 거니?"
"…예."

잠시 망설인 후 익진이는 자신없는 듯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미안하게도 나는 익진이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사내 녀석이 그렇게 박력이 없어서 어디에 쓰겠어? 그러면 선생님하고 몇 가지 약속을 해야겠다. 그 약속 못 지키면 넌 못 가는 거야. 알았지?"
"선∼생님, 그 약속이 뭔데요?"

익진이는 '약속'이라는 말에 귀가 솔깃해 상기된 표정으로 나를 쳐다 보았다.

"아무리 힘들어도 참고 견디어야 한다. 그리고 다소 무리인 줄은 알지만 성산 일출봉에는 꼭 올라 가는 거야. 할 수 있겠니?"

내 말이 부담스러운 듯 익진이는 쉽사리 대답을 하지 못했다.

"…… 그런데 성산 일출봉에는 꼭 올라가야만 하는…."

자신이 없었는지 익진이는 말끝을 흐렸다.

"안 되겠다. 그러면 넌 수학여행 가지 말고 학교에 나와 공부나 해."

내 말에 익진이는 기가 죽었는지 갑자기 고개를 떨어뜨렸다. 나는 익진이에게 며칠을 더 신중하게 생각해 보고 답을 달라고 했다. 뒤돌아서 절뚝거리며 교무실 문을 빠져나가는 익진이의 어깨가 더 처져 보였다.

꼭 성산 일출봉에 오르겠어요

사실 그랬다. 장애가 없는 사람도 올라가기가 쉽지 않은 일출봉을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익진이에게 주문한 것은 무리였다. 또 몸이 불편한 익진이가 단체 여행인 수학여행을 따라 가며 여러 사람에게 적지 않은 불편을 끼치게 될 것이었다. 초·중학교를 다니는 동안 익진이는 수학여행을 가 본 적이 없다고 했다.

때문에 나는 익진이에게 다소 무리한 주문을 한 것이다. 나는 그 일에 있어서 본인의 의지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만약 익진이가 가겠다는 의지만 있다면 부모님을 비롯해 다른 사람들을 설득해서라도 도와주고 싶었다.

2004년 4월 28일 성산 일출봉 정상에서  친구들과 함께
2004년 4월 28일 성산 일출봉 정상에서 친구들과 함께김환희
내 주문이 부담을 주었는지 며칠이 지나도 익진이에게서 대답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익진이가 수학여행을 포기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어느 날, 퇴근을 앞두고 책상을 정리하다가 교무수첩을 들자 잘 접혀진 편지 하나가 책상 위에 떨어졌다. 익진이가 몰래 두고 간 것이다. 며칠을 고민하고 신중하게 결정 내린 듯 글씨체에는 정성이 들어가 있었다. 편지는 그리 길지 않았지만 익진이의 의지를 엿볼 수 있었다.

"선생님,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수학여행 갈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편지로나마 익진이의 의지를 확인한 나는 부모님과 담임 선생님과 상담한 후, 익진이도 수학여행에 가는 것으로 확정했다. 그 결정이 내려진 날, 천진난만하게 웃어 보이던 익진이의 모습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수학여행을 가기 전 나는 익진이를 다시 불러 그 약속을 상기시켰다.

그리고 마침내 익진이까지 함께 하는 우리 학교 수학여행이 시작되었다. 여행 내내 나는 우리 반 아이들보다 익진이에게 신경이 더 쓰였다. 예상했던 것보다 익진이는 아이들과 잘 어울렸으며 아이들 또한 익진이를 친절하게 배려했다. 돌아다니면서 살펴보니 익진이는 힘들어하는 내색 없이 아이들과 사진도 찍어 가며 수학여행을 즐기고 있었다. 답답한 학교 생활에서 볼 수 없었던 행복이 묻어나는 듯했다.

수학여행 이틀 동안 좋지 않았던 날씨가 성산 일출봉으로 떠나는 날 아침에는 맑게 개였다. 따스한 봄 햇살이 우리가 탄 버스의 창에 와닿았다. 날씨가 좋아 그나마 다행이었다.

성산포에 다다르자 학생들은 차에서 내려 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런데 나는 걱정이 앞서기 시작했다. 멀리서 봐도 일출봉은 그리 완만한 경사가 아니었다. 솔직히 말해 익진이가 저 험한 일출봉에 진짜로 올라가겠다고 하면 어떻게 하지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올라가지 않으면 익진이도 올라가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나는 그냥 차에 남기로 했다. 지금까지 몇 차례 제주도에 왔지만 그때처럼 날씨가 좋은 날이 없었기 때문에 왠지 섭섭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버스에서 내리지 않고 잠이나 자겠다는 요량으로 자리에 앉아 있는데 다른 차에서 내린 익진이가 내가 탄 차로 절뚝거리며 다가왔다. 그리고는 의기양양한 목소리로 말했다.

"선~생님! 결전의 날이 왔어요. 꼭 약속 지킬게요."

익진이의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말했다.

"익진아, 약속은 지킨 걸로 하마. 그러니 제발……."

익진이는 내 말에 대꾸도 하지 않고 친구 둘과 함께 다리를 절뚝거리며 일출봉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나는 익진이가 곧이 곧대로 내 말을 따를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어쨌든 나의 말 한마디가 익진이에게는 큰 의미로 다가간 것이다. 할 수 없이 나도 차에서 내려 익진이를 뒤따라갔다.

결국 익진이는 해냈습니다

난 익진이가 힘들면 올라가다가 중도에 포기하고 내려오리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먼저 몇 미터 앞에 올라가 바위 뒤에 숨어서 익진이가 올라오는 모습을 마음 졸이며 지켜 보았다. 그런데 익진이는 좀처럼 포기하려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비록 친구 두 명의 부축을 받기는 했지만 자신의 약한 모습을 보여 주지 않으려고 애쓰는 모습이 얼굴에 역력히 나타났다. 경사가 가파르게 진 곳을 땀을 뻘뻘 흘리며 올라오는 모습을 볼 때는 안타까운 마음에 뛰어 내려가 부축해 주고 싶은 충동까지 들었지만 혹 익진이의 마음이 약해질까 꾹꾹 참았다.

결국 익진이는 몇 시간의 고투 끝에 성산 일출봉 정상에 올랐다. 자신도 믿기지 않는 듯 친구들에게 자기를 꼬집어 보라며 팔을 내밀기도 했다. 익진이의 얼굴 위로는 환희의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 눈물은 정상에 올라왔다는 감격보다는 자신과 싸워 이겼다는 극기의 눈물이었으리라. 그것은 도전하는 자만이 얻을 수 있는 기쁨이었다.

나 또한 몸이 불편한 익진이가 일출봉에 오른 것이 너무나 자랑스러웠다. 정신력이 얼마나 중요하고 위대한 힘을 발휘하는지 알게 되는 순간이었다. 익진이는 정확하지 않은 발음으로 "야~호"를 크게 외쳤다. 그 모습이 어찌나 대견스러운지 달려가 그놈을 와락 안아주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세상에서 가장 멋진 포즈를 취하며 사진을 찍었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포기하고 결국 성산 일출봉 정상에 오른 사람은 50여명 정도였다. 그 중에서도 익진이가 보여준 도전 정신의 한 편의 드라마라고 해도 부족하지 않았다. 익진이는 그 잔인한 달 4월에 황량한 땅에서도 희망을 꽃피울 수 있다는 것을 온몸으로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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