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녹색 피라미드 (13회)

등록 2004.12.31 16:12수정 2004.12.31 17:20
0
원고료로 응원
막 밖으로 나서려는 데 부엌 쪽에서 다시 소리가 들려왔다. 쥐 한 마리가 휴지통의 종이를 갈고 있다가 김 경장과 눈이 마주치자 얼른 달아나는 모습이 보였다.

문득 휴지통을 뒤져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 경장은 바닥에 주저앉아 구겨진 종이들을 하나하나 펴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이런 내용의 편지 하나를 찾아냈다.

제가 이 것을 알리면 기존의 모든 주장들이 무너지면서 학계 전체가 난리가 날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 것은 진리의 문제입니다. 타협이나 흥정의 대상이 될 순 없습니다. 제가 대한민국의 국민이 아니라 중국이나 일본의 국민이라 할 지라도 이 사실을 알렸을 것입니다. 학자적 양심을 걸고 새로 드러난 이 사실 앞에 겸허하게 대처해 주셨으면 합니다. 진리와 함께 사라지는 일이 없도록 말입니다.

김 경장은 이 편지를 채유정과 함께 몇 번이나 읽고 또 읽었다. 죽은 안 박사가 어떤 엄청난 사실을 발견한 것은 분명해 보였다. 그 사실을 자신 혼자서만 안 것이 아니라 이미 누구에게 알렸다는 것을 편지는 보여주고 있었다.

채유정이 고개를 갸웃거리면 물었다.

"편지를 다 적지는 못했군요."

"아마 적다가 아니다 싶어 종이를 구겨 버린 것 같은데요."

"이 편지를 상대에게 붙였을까요?"

"그것보다 누구에게 전하려 했던 것인가가 더 중요하겠죠?"

"박사님이 발견한 그 무엇을 다른 사람도 알고 있다는 말이군요."

"내용상으로는 그런 것 같네요."

"그렇다면 박사님을 살해한 사람이……."

"그럴 가능성이 많겠죠."

둘은 휴지통을 더 뒤졌다. 하지만 편지는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혹시나 기대를 했던 편지봉투도 없었다. 다른 종이조각을 뒤져도 마찬가지였다. 알 수 없는 메모를 휘갈긴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김 경장은 책상 앞으로 다가갔다. 살해된 박사가 가장 많이 머물렀던 공간일 것이다. 여기에서 어떤 단서를 찾아내야 한다. 책상은 보통의 것보다 반 이상은 커 보였다. 책상 위쪽에는 두터운 책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고, 그 앞에는 필통과 메모철이 보였다. 그 메모철 옆에는 뚜껑이 벗겨진 만년필 한 자루가 놓여 있었다. 얼른 메모철을 살폈다. 하지만 아무 내용도 적혀 있지 않았다. 메모지를 떼어간 흔적만 남아 있었다.

제 경정은 팔짱을 낀 채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가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필통을 집어들었다. 거기서 연필을 하나를 꺼내어 메모철 위를 시커멓게 색칠했다. 그러다가 아, 하는 감탄사를 내질렀다.

"알아냈어요."

채유정이 돌아보았다.

"뭘 알아냈다는 거예요?"

"박사님이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연락을 했던 사람. 어쩌면 그 편지의 수신인일지도 모르죠."

"그걸 어떻게 알아냈다는 거예요?"

김 경장은 연필로 시커멓게 칠해진 메모철을 들어 보였다. 메모철에는 위의 종이에 눌러 적었던 볼펜 자국만 남고 모두 시커멓게 칠해져 있었다. 한문으로 휘갈겨 적은 이름. 거기에 나타난 글자들을 분명하게 알아볼 수 있었다.

김 경장은 종이에 나타난 이름을 채유정에게 보여주었다. 순간 그녀의 표정이 경직되며 얼굴 한쪽 근육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아니, 이럴 수가……."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캐나다서 본 한국어 마스크 봉투... "수치스럽다"
  2. 2 황석영 작가 "윤 대통령, 차라리 빨리 하야해야"
  3. 3 300만명이 매달 '월급 20만원'을 도둑맞고 있습니다
  4. 4 '25만원 지원' 효과? 이 나라에서 이미 효과가 검증되었다
  5. 5 샌디에이고에 부는 'K-아줌마' 돌풍, 심상치 않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