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방울만 있어도 즐겁기만 했던 시절

등록 2005.01.11 09:45수정 2005.01.11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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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치원 다니는 조카 녀석이 놀러 오면 컴퓨터 앞에서 벗어날 줄 모릅니다. 사촌형의 도움을 받아 제 수준에 어울리는 게임을 하느라 다른 데는 아예 관심도 없습니다. 어떤 때는 밥 먹는 것조차도 귀찮아할 정도입니다.


굳이 컴퓨터를 거론하지 않더라도 요즘 아이들이 가지고 놀 장난감은 많기도 합니다. 다양한 기능에 세련된 디자인의 장난감이 아이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습니다. 가지고 놀 장난감이 산과 들에 있는 자연 말고는 없었던 시절에 비한다면 풍요롭기 그지없습니다.

풍요로운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요즘 아이들에 비해 장난감을 돈을 주고 살 일이 없었던 시절의 생활이 그다지 불행하게 생각되지 않는 건 어쩐 일일까요? 추억이란 이름으로 포장된 때문일까요, 아니면 컴퓨터와 세련된 장난감에 사로잡혀 사는 아이들의 삶이 안쓰러워 보이기 때문일까요?

이기원
솔방울만 있어도 즐겁기만 했던 시절이 있었지요. 추운 겨울 꽁꽁 언 얼음판 위에서 솔방울 하나만 있으면 편을 갈라 축구를 할 수 있었지요. 썰매 타는 아이들과 솔방울로 축구하는 아이들이 뒤섞인 얼음판의 왁자한 소란은 방안에 틀어박힌 아이들조차 불러냈습니다.

얼음판에서 하는 솔방울 축구는 운동장에서 하는 축구와는 다릅니다. 발재간이 뛰어난 녀석이 꼭 솔방울 축구를 잘하는 건 아닙니다. 운동장 축구에선 뒷전에 밀려 골대 부근에 서서 수비수 노릇을 하던 녀석도 얼음판 축구에선 한몫 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미끄러운 얼음판 위에선 발재간을 발휘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솔방울 축구에선 뒷전으로 밀려나는 아이들이 별로 없습니다. 너나없이 즐겁게 뛰고 넘어지고 웃고 즐길 수 있는 놀이입니다.

겨울이 오면 솔방울은 중요한 땔감이 되기도 했습니다. 교실 한가운데 놓인 난로의 연료가 조개탄이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조개탄을 얻어 난로에 넣어 불을 붙이기 전에 먼저 솔방울을 한 무더기를 난로에 부어 불을 붙입니다. 솔방울에 불이 붙은 후 조개탄을 쏟아 붓고 뚜껑을 닫아두면 조개탄이 빨갛게 타오릅니다.


조개탄 난로의 밑불이 되던 솔방울은 학교에서 제공해주는 게 아닙니다. 그 시절 학교에는 '자유학습의 날'이란 게 있었습니다. 매주 토요일이 되면 가방 없이 학교에 등교하는 것입니다. 말이 좋아 '자유학습의 날'이지 대부분은 수업이 아닌 작업을 하기 일쑤였습니다.

겨울이 되면 '자유학습의 날' 중에 비료포대를 가지고 산으로 올라가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각자 솔방울을 한 포대씩 채워서 학교로 가지고 가는 것입니다. 요즘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그런 일을 시키면 당장 큰 일이 벌어질 테지만 그 시절에는 아무도 거기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해야 되는 일을 하는 것인 양 여긴 건 아이들도 학부모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산에 올라 솔방울을 따는 일도 아이들에겐 힘든 일이 아니라 즐거운 일이었습니다. 답답한 교실이 아닌 탁 트인 공간에서 친구들과 재잘대며 솔방울을 딸 수 있다는 게 마냥 좋기만 했던 시절입니다.

나무를 잘 타는 녀석은 소나무에 올라가 솔방울을 땁니다. 소나무 아래에서 가지를 휘어잡아 따는 녀석도 있습니다. 죽은 나뭇가지 꺾어 들고 소나무 가지를 두드리며 따는 녀석도 있습니다.

솔방울엔 관심도 없이 솔방울에 긴 막대기 꽂아 입에 물고 담배 피는 어른 흉내 내는 녀석도 있습니다. 양지바른 곳에 모여앉아 재잘대며 얘기하다 선생님 눈에 띄어 야단맞는 녀석들도 있습니다.

애써 따 모은 솔방울 포대를 들고 비탈길을 내려가다 주르르 미끄러져 넘어지면 포대가 비탈길로 굴러 내려갑니다. 포대에 들어있던 솔방울도 쏟아져 사정없이 비탈길 아래로 굴러 내립니다.

울상이 된 녀석이 비탈길을 타고 내려가 솔방울 포대를 주워들 때면 남아 있는 솔방울은 몇 개 되지 않습니다. 그렇게 모은 솔방울이 겨우내 교실을 덥혀줄 밑불이 되었습니다.

솔방울만 있어도 즐거웠던 시절이 꿈결처럼 떠오릅니다. 컴퓨터도 없었고 세련된 디자인과 다양한 기능을 갖춘 장난감도 없었지만 솔방울만 있어도 겨울 추위 정도는 가볍게 이겨냈던 그리운 시절이었습니다.

덧붙이는 글 | 제 홈페이지 http://www.giweon.com 에도 실었습니다.

덧붙이는 글 제 홈페이지 http://www.giweon.com 에도 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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