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커피 자판기 미스리?"

왜 커피 자판기 이름이 '미스 리'일까?

등록 2005.01.15 21:46수정 2005.01.16 0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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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오전. 쉬는 토요일인데 일이 생겨서 지하철 2호선 성수역에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가까이에 있는 매점에 설치된 작은 커피 자판기에서 커피 한잔을 뽑아 들었다. 바깥으로 통하는 입구에서 불어오는 찬바람 때문인지, 커피 중독 탓인지, 연거푸 두잔을 뽑아 마셨다.

식당이나 규모가 작은 매점에서 무료, 또는 300원 정도의 가격으로 판매되는 커피를 쏙쏙 뽑아내고 있는 이 기계의 이름은 '미스 리'이다. 그리 놀랄 일도 아니다. 나는 97년, 98년 무렵에 이 요상한 이름의 기계를 학교 건너편 식당에서 보았다. 그리고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 왜 커피 자판기 이름이 '미스 리'란 말인가? 왜 '미스 리'여야만 하는가? '미스터 김'도 아니고 '미즈 김'도 아닌…. 무섭게 현실을 반영한, 어쩌면 와닿는 네이밍일런지도 모른다.

"**씨, 커피 한잔 할까?"
"미스 *. 커피 한잔만 부탁해요."
아직도 많은 직장에서 여성이 커피 심부름을 하는가? 잘 모르겠다. '미스 리'란 이름은 지금에 와서는 시대에 뒤떨어진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아직도 많은 이들의 머릿속에는 '커피를 타 주는 역할은 여성'라는 식의 개념이 많이 박혀 있는 듯하다.

아직도 다방에서는 아가씨가 커피를 타 주고, 배달한다. 어떤 회사에서는 사장님이 회사에서 "**씨, 커피 한잔 할까?"라는 말은 커피를 타오라는 의미로 읽히기도 한다. 또 어떤 회사에서 여직원이 자신의 커피를 타고 있을 때, "나도 한잔만"이라고 말하는 것은 커피를 타다달라는 완곡한 부탁일 것이다. 회사에 손님이 왔을 때는, 여직원에게 커피를 타왔으면 하는 눈짓으로 무언의 압력이 가해진다. 심지어 신입 사원이 여직원이라면, 그녀 스스로 자신의 커피를 타면서도 "커피 한잔 하시겠어요?"라고 묻는 것이 예의가 아닐까 하고 망설이기도 한다.

물론 요즘 회사 분위기는 많이 달라졌다. 남자 사원들이 커피를 내오기도 하고, 대체로 자판기가 설치되어 있거나 1회용 커피믹스가 비치되어 있기도 하다. 커피를 이유로 다른 사람(특히 여직원)의 업무를 방해하는 것은 비효율적이라는 생각을 하기 때문일 것이다. 또 직장 내 여성의 지위가 과거보다는 상승한 것이 이유일 거라 짐작된다.

1회용 커피와 자판기- '커피는 알아서 타먹어라'

커피 회사들은 커피와 프림을 따로 파는 것보다는 간편하게 타 먹을 수 있는 1회용 포장, 개인형으로 적절한 양을 배분해서 여러 개를 파는 것이 더 많은 이익을 낸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이제는 커피믹스를 가정뿐만 아니라 각 회사나 공공 기관에서도 많이 소비한다.


또 커피 자판기는 바깥에서도 커피를 마실 수 있은 아주 편리한 기계다. 1회용 커피와 자판기는, 직장 내에서 커피 타는 역할을 하는, '꽃'인 여성들의 보이지 않는 스트레스를 다소나마 해방시켜 준 고마운 발명품이다. 세탁기와 식기 세척기가 가사 노동시간을 줄여 주부들의 자기 시간을 늘리고 활용하는 데 기여함으로써 여성해방을 앞당겼다는 주장처럼 말이다.

이런 시점에 커피 자판기의 이름이 '미스 리'인 것은 다소 유감이다. '미스 리'란 직장 여성의 대표 명사가 다방 아가씨의 대표 명사인 것이 똑같아서 약간은 불편한 마음을 지울 수 없다.


예전 같으면 출근하면서 이랬겠지?
"안녕하세요? 미스 리. 커피 한잔."

요즘에는 이렇게 하나?
"안녕하세요, 커피 자판기 미스 리."

나는 이렇게 답하고 싶다.
"별로 안녕하지 못하네요. 미스터 김"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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