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요! 소주 한 병 더 주세요"

<서울일기 20>봉천동에서의 겨울나기

등록 2005.01.27 15:02수정 2005.03.17 1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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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겨울, 나는 눈을 흠뻑 뒤집어 쓰고도 파란 잎사귀를 내민 마늘처럼 추운 겨울나기를 하고 있었다
그해 겨울, 나는 눈을 흠뻑 뒤집어 쓰고도 파란 잎사귀를 내민 마늘처럼 추운 겨울나기를 하고 있었다이종찬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
너와 헤어져 돌아오는
눈쌓인 골목길에 새파랗게 달빛이 쏟아지는데
가난하다고 해서 두려움이 없겠는가.
두 점을 치는 소리
방범대원의 호각소리, 메밀묵 사려 소리에
눈을 뜨면 멀리 육중한 기계 굴러가는 소리.
가난하다고 해서 그리움을 버렸겠는가.
어머님 보고싶소 수없이 뇌어보지만
집 뒤 감나무에 까치밥으로 하나 남았을
새빨간 감 바람소리도 그려보지만.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내 볼에 와 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네 숨결
돌아서는 내 등 뒤에 터지던 네 울음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신경림 '가난한 사랑노래-이웃의 한 젊은이를 위하여' 모두


그해, 서울에서 처음으로 겪은 겨울은 몹시 추웠다. 귓전을 쌩, 하고 스치는 바람이 바늘처럼 따갑기만 했다. 하늘은 늘상 뒤가 마려운 듯 잔뜩 찌푸려 있었다. 내 고향 창원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함박눈도 참 자주 내렸다. 눈, 하고 이름만 떠올려도 또, 하면서 엉덩방아 찧는 내 모습이 절로 떠오를 정도로.

그랬다. 신림시장 국밥집 아주머니가 어디론가 자취를 감춘 그날, 나는 달빛이 눈처럼 새파랗게 쏟아지는 그 골목길, 군데군데 하얗게 빛을 내는 눈 쌓인 봉천동 골목길 포장마차에 앉아 소주를 홀짝홀짝 마셨다. 캄캄한 골목길 저만치 방범대원이 불어대는 호각소리가 그리도 슬프게 들릴 수가 없었다.

사각사각 눈을 밟는 소리, 판잣집 골목길 사이사이에서 잊을만 하면 기억처럼 아득하게 들리는 '찹쌀~떠억~ 메밀묵 사려~' 하는 소리가 내 가슴을 자꾸만 후벼 팠다. 눈 시리도록 맑은 소주잔 속에는 고향의 풍경이 어른거렸다. 흐릿한 전등불에 바늘을 비추며 실을 꿰기 위해 안간힘을 쓰던 어머니의 얼굴도 떠올랐다.

서러웠다. 신림시장 국밥집 아주머니가 그렇게 떠나고 나자 갑자기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만 같았다. 캄캄한 서울하늘 아래 나만 홀로 뚝 떨어진 것만 같았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그 처녀에게 그냥 매달려 볼 것을 하는 그런 생각도 들었다. 가난 때문에, 그놈의 얼어 죽을 돈 때문에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여기요! 소주 한 병 더 주세요."
"늦은 시간에 혼자서 그렇게 많이 드셔도 되겠어요? 벌써 세 병짼데."
"제 집이 바로 코 앞에 있습니다."
"그래도 내일 일하러 나가야 되잖아요?"
"아따! 누가 보면 누님이 내 친누님이라도 되는 줄 알겠네."
"그게 아니라 나도 인제 슬슬 마치고 들어가려고 그래요. 손님도 더 이상 오실 것 같지도 않고."


그날 나는 그 포장마차에 너무 오래 앉아 있었다. 그때 시간이 이미 새벽 4시가 가까워오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날따라 이상하게 술이 취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포장마차 누님에게 짐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먹다 남은 소주와 떡볶이를 비닐봉지에 주섬주섬 싸들고 그 포장마차를 나왔다.

드문드문 불이 꺼지고 드문드문 불이 켜진 가난한 봉천동. 그 빼곡한 판잣집 지붕 위에도 새파란 달빛이 는개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지붕을 덕지덕지 기운 판잣집 사이에 허새비처럼 서서 메마른 가지를 부비고 있는 나무들이 솟대처럼 보였다. 가난한 사람들의 서러운 가슴을 다독이는 희망의 끄나풀처럼.


손에 들고 있는 소주를 내던지고 그대로 서울역으로 달려가 밤기차를 타고 고향으로 내려가고 싶었다. 추운 날씨만큼이나 모진 서울의 삶이 싫었다. 귓전을 따끔거리는 매서운 겨울바람처럼 악다구니를 쓰며 마음에 한 치 여유도 없이 숨 가쁘게 살아가는 서울사람들이 싫었다. 그 틈바구니에서 함께 악다구니를 쓰며 살아가는 나 자신도 정말 꼴 보기 싫었다.

하지만 어쩌랴. 누군가 나더러 서울에 가서 살라고 등을 떠민 것도 아니었다. 누군가 식의주가 해결되게 해 줄 테니 서울로 올라오라고 한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피붙이가 있는 것도, 속내를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동무가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저 나 스스로 문학에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 무작정 올라온 서울이 아니던가.

새벽 4시쯤 사글세방으로 돌아온 나는 연탄불에 라면을 끓여 안주로 삼아 창밖이 푸릇푸릇해지도록 소주를 마셨다. 특히 그 다음날은 토요일이었기 때문에 학습지를 돌리지 않아도 됐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소주를 홀짝홀짝 마시며 혼잣말을 마구 지껄이던 나는 자신도 모르게 방바닥에 쓰러져 잠이 들었다.

"총각! 아직 자?"
"아, 예. 무…무슨 일이십니까?"
"이것 좀 먹어. 방금 구워서 따끈따끈해."
"무얼 이런 걸 다. 하여튼 고맙습니다."
"어휴~ 술 냄새! 총각도 술 적당히 마셔. 혼자 사는 사람이 그러다가 잘못하여 골목에 쓰러지기라도 하면 어떡할려고 그래."


내가 옆방 새댁이 건네주는 부추전을 받으며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는 오후 3시가 가까워오고 있었다. 이런 이런! 나는 서둘러 세수를 한 뒤 곧바로 을 나섰다. 그리고 2호선 지하철을 타고 마포쪽으로 향했다. 서울에 올라올 때부터 꼭 한번 가보고 싶었던 <자유실천문인협의회>로 가기 위해서였다.

속이 몹시 쓰렸다. 입에서는 술 냄새가 풀풀 났다. 어디 식당에라도 들어가 북어국이나 동태국 같은 것이라도 한 그릇 후루룩 마시면 금세 속이 풀릴 것만 같았다. 그때 문득 신림시장 국밥집 아주머니가 떠올랐다. 이럴 때 국밥집에 가면 아주머니께서 뜨거운 순대국물에 밥이라도 말아 주실 텐데.

이윽고 지하철 2호선이 아현역에 닿았다. 나는 아현역에 내려 <자유실천문인협의회>사무실이 있는 공덕동을 향해 천천히 걸었다. 아현동과 공덕동을 잇고 있는 야트막한 산등성이에도 봉천동과 꼭 같은 판잣집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그렇게 내가 공덕동 로터리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오후 5시가 다가오고 있었다.

"자실(자유실천문인협의회)에 한번 가보지 그래."
"그렇잖아도 아까 갔다가 찾지 못하고 그냥 돌아왔습니다. 모두들 가투를 나갔는지 전화도 받지 않던데요?"
"하긴, 그쪽도 요즈음 정신이 없을 거야. 출판탄압과 문인들 구속에 따른 투쟁하랴, 민주화운동단체들의 가투에 참석하랴, 꽤 바쁠 거야."


그날 저녁, 나는 출판업을 하고 있는 강00 선생을 봉천시장으로 불러냈다. 그리고 소주를 마시며 그동안 <자유실천문인협의회>에서 일어났던 여러 가지 소식과 요즈음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들었다. 정말 세상은 요지경 속이었다. 전두환 군사정권은 재야인사들과 학생들의 구속과 탄압도 모자라 출판탄압까지도 서슴지 않고 있었다.

표현의 자유와 양심의 자유, 우리 사회의 민주화를 기치로 내건 <자유실천문인협의회>소속의 수많은 문인들도 툭 하면 구속되거나 연행되기 일쑤였다. 진보적인 출판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조금이라도 군사독재정권을 비판하는 책이 나오면 이적표현물이라 하여 그 책을 모두 압수했고, 그 책을 출판한 발행인과 필자까지 구속하거나 연행하는 것을 예사로 여겼다.

"자실에서 곧 무슨 선언을 한다던데? '87 문학인 선언'이라고 하던가? 하여튼 자세히는 잘 모르겠어."
"하긴, 문인들이 쿠데타 정권의 동네북이 아닌 이상 가만히 당할 수만은 없지 않겠습니까. 무슨 선언을 해서라도 빼앗긴 표현과 양심의 자유를 되찾고 사회의 민주화를 위해 싸워야겠지요."
"그렇게 한다고 해서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이 눈이나 깜빡하겠어?"
"그래도 어쩌겠습니까. 만약 문인들의 요구가 계란으로 바위치기라면 결국 화염병이나 짱돌이라도 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해(1987년) 2월, 나는 정말 답답했다. 서울에서 학습지를 돌리며 입에 풀칠을 하고 있는 나의 삶도 답답했고, 내가 가고자 하는 문학의 길도 참으로 답답하게만 보였다. 내가 가고자 하는 실천문학의 길에는 좋은 글만이 화두가 아니었다. 아무리 좋은 글을 쓰더라도 발표할 곳이 없었다.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이라는 철벽이 실천문학의 앞길을 철저하게 가로막고 있었다.

그렇다고 그렇게 마냥 주저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다. 무언가 돌파구가 필요했다. 그때 문득 '펜은 칼보다 강하다'라는 말이 떠올랐다. 나는 그때부터 스스로에게 약속했다. 말과 글을 저들의 총칼보다 더욱 단단하게 갈고 닦아야 하며, 또한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그 모순의 현장에 내가 직접 뛰어 들어가야 한다고.

덧붙이는 글 | <계속 이어집니다>

※그동안 독자 여러분의 많은 사랑을 받았던 연재기사 <내 추억속의 그 이름>을 오는 27일로 끝내고, 31일부터 새로운 연재기사 <음식사냥 맛사냥>이 나갈 예정입니다. 앞으로 <서울일기>는 연재기사가 아닌 '사는이야기'로 계속 이어집니다. 독자 여러분의 더 큰 사랑과 따스한 매질 기다립니다.

덧붙이는 글 <계속 이어집니다>

※그동안 독자 여러분의 많은 사랑을 받았던 연재기사 <내 추억속의 그 이름>을 오는 27일로 끝내고, 31일부터 새로운 연재기사 <음식사냥 맛사냥>이 나갈 예정입니다. 앞으로 <서울일기>는 연재기사가 아닌 '사는이야기'로 계속 이어집니다. 독자 여러분의 더 큰 사랑과 따스한 매질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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