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 대신 징용가다 세 번이나 도망

15살 내 아버지는 강제 징용자였다-①

등록 2005.02.02 18:10수정 2005.02.02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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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1944년 봄 일제의 강제징용으로 아오지 탄광에 끌려가신 뒤 8·15가 한참 지난 뒤에야 고향에 가까스로 돌아오신 용(龍)자 섭(燮)자 쓰시는 내 아버지 이야기로 '일제강점하 강제동원피해 진상조사신청 및 피해신고' 접수 첫날인 1일에 맞춰 그 진실을 밝힌다.

이런 날이 오리라곤 생각도 못했지만 몇 해 전 저 세상으로 가신 아버지의 응어리가 조금이라도 풀리기를 바라며 몇 차례로 나눠 연재하고자 한다. 덧붙여, 이야기를 재구성한 것일 뿐 가감은 없다는 걸 밝힌다...<글쓴이 註>


정유재란(丁酉再亂)을 피해 경주(慶州)를 버리고 사육신 김문기 후손인 복자(福字) 할아버지 일행이 도착한 곳은 전라도하고도 동복현 백아산 낯선 산골이었다. 지금으로 말할 것 같으면 화순군 북면 방리 1구인 현재 내 고향 양지마을에서 바라보이는 건너편에 항월이라는 옛 마을 터다.

몇 해 전 작고하신 아버지도 선산까지는 아직 올라가지 못하고 밭이었던 언덕에 묻혀있다. 그곳엔 감나무와 대나무 그리고 깨진 기와가 굴러다닌다. 열댓 가구가 모두 김가(金哥)들 집이었다.

요새(要塞)와 같은 골짜기라 쉽게 눈에 띄지도 않고 겨울에도 바람막이가 든든한 좁은 골짜기에 최초로 자리 잡은 경주 김씨(金氏)는 한번도 외부의 부침 없이 평온한 삶을 살고 있었다.

대대로 조그만 앞뜰을 부쳐 먹을 정도는 되었다. 증조부를 거치고 조부 때부터는 향반(鄕班)들의 몰락 끝자락에 걸친 몰락한 집안의 전형이 그렇듯 가장인 할아버지는 세상 물정 모르고 담뱃대 물고 글공부만 하던 분이었다. 생김새도 지금 나와 거의 닮았다고 하는데 일손 한번 거들지 않고 춘추가 쉰을 넘기자 기운 가세를 말하듯 바깥 거동을 하지 않으시니 몸이 나약할 대로 허약해졌다.

3대째 독자에다 글밖에 모르는 사람이 할 줄 아는 건 아무 것도 없었고 농번기에도 양반네들이 그렇듯 부인인 할머니와 두 딸, 세 아들이 끙끙대며 일을 해도 뒷짐이나 지고 감 놔라 배 놔라 할뿐 손 하나 까딱하지 않으셨다.


세계가 변하고 이웃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자 비분강개는 했으나 단지 심지만을 곧게 할 뿐이셨다. 큰 아들은 일찍 죽고 둘째가 장남 노릇에 글깨나 했기에 효자였고 모든 게 빠릿빠릿했던 막내인 경오생(庚午生) 정월 열닷새에 태어난 내 아버지가 자청하여 열다섯 살인 1944년 일본 순사에 끌려 기차에 몸을 실었다.

그 때까지는 보은 속리산, 안동 화산, 남원 운봉, 부안 호안, 무주 무풍, 영월, 예천, 계룡산, 합천 가야산, 풍기 차암 금계촌에 버금가는 십승지(十勝址)라 할 만큼 깊은 곳이었다.


이런 안전지대도 현대식 무기를 동원한 일본제국주의 앞에는 속수무책이었으니 앞으로 운명이 어찌될지 아무도 몰랐다. 이후 한국전쟁이 교착상태에 빠져 3500여명이 되는 빨치산이 지리산, 백운산, 덕유산, 추월산, 조계산 등지에서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집결한 곳도 이곳이다.

당시는 이 일대를 차지하려고 빨치산과 토벌대가 밤낮으로 싸우는 암울한 시기였는데 이런 시기가 오리라곤 상상도 못할 만큼 이곳은 깊숙한 곳이다.

외지 사람들이 몰려와 이곳 마을 인심을 흉흉하게 흩뜨려 놓기 전까지는 서로 도우며 오순도순 살아가는 평온한 마을이었다. 밀고에 밀고가 거듭되어 서로 죽이고 물고 늘어지는 바람에 예전 사람들이 아니었지만 제무시(GMC/GM차량을 가리킴)가 들어오기 전까지 고향 산천도 수백 수천 년간 그대로였다.

아버지의 묘소. 오른쪽 멀리 보이는 곳이 어른들이 사셨던 황월이라는 마을 자리였다.
아버지의 묘소. 오른쪽 멀리 보이는 곳이 어른들이 사셨던 황월이라는 마을 자리였다.김규환
태평양전쟁이 격화되자 우리 마을도 예외는 아니었나 보다. 면에서 사람이 나와 이장과 명부를 작성하여 일일이 돌아다니자 마지막 선택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 집안도 강제징용을 비켜가지는 못했다.

아버지: “아버님 제가 댕겨오께라우.”
할머니: “아야 니가 어딜 끼대 간다고?”
아버지: “아녀라우. 성님은 가업을 이어가야헌께 지가 댕겨올라요. 걱정 붙들어 매싯쇼.”
할머니: “그래도 안 돼야. 채라리 니 엄씨가 밥 챙겨다 줄텡께 둘은 산으로 들어가 있고 영감은 아푼척 누워 계싯쇼. 제아무리 악독한 놈들이라도 죽어가는 사람 끌고 가겄소.”
할아버지: “험”
큰아버지: “엄니 글러부렀어라우. 순사들이 쫘악 깔려각고 집집마다 댕기믄서 한명씩은 가야 된다고 헙디다.”
할머니: “견치 갈라고?”
큰아버지: “용십아 내가 가마.”
아버지: “아녀 성님은 남아서 집안을 지켜야제.”
큰아버지: “어린 니가 가서 뭘 어쩐다고?”
아버지: “글도 내가 성님보다 힘은 세잖녀? 암시랑토 않당께. 살아서 돌아올 꺼구만.”


여기까지 말씀하신 아버지는 이미 취해 있었는데도 다시 약주를 찾으신다. 술 취하신 아버지는 어머니에게만 귀찮은 존재가 아니라 취하면 성품이 어떻게 변할지 몰라 온 가족이 늘 긴장해야 했다. 말리는 것보다 한잔이라도 적게 드시면서 말씀으로 술이 깨도록 어린 우리가 옆에서 말똥말똥 듣는 척 해야 했다.

우리 시대 여느 아버지들처럼 내 아버지도 일정(日政) 때에서 인공(人共) 시대 그리고 이박사, 박대통령 시대를 거쳐 산 이야기며, 산판을 하여 돈을 벌어 이태 만에 열 닷 마지기 논을 샀던 이야기, 노름에 빠져 머리보다 높이 올라간 돈을 따고서도 잠깐 존 사이 죄다 훔쳐가서 알거지가 된 이야기 등 이야기 보따리를 쉴 새 없이 풀어놓았다.

조목조목 조리 있게 말씀하시니 이해하기는 쉽지만 졸린 건 어쩔 수 없다. 억지로 하품을 참아보지만 자연적인 생리현상을 막을 수는 없었다.

“하~암”

아버지: “졸리냐?”
나: “아녀라우.”
아버지: “글면, 막둥이 아들 한 잔 따라봐라.”
나: “아부지 그만 드싯쇼.”
아버지: “야 이 놈아 한잔 더 따르라니까 뭔 잔소리가 그리 많어. 어여 따라.”
나: “예.”


으슥한 밤 아버지의 잔소리 반 애절한 한풀이가 그칠 줄 모른다.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부터 고등학교 다닐 때까지 아버지 말씀은 끊이지 않았다. 밤이면 밤마다 들었던 아버지의 기나긴 잔소리에 당신이 미워지기까지 했다.

아버지: “근께 말이다. 내가 열다섯 살 때 약해빠진 니기 큰아부지를 두고 어쩔 수 없었다. 네 살 위인 니 큰애비가 공부는 야학에서 제일 잘했어도 약골이었응께. 니 하래비 앞으로 나온 강제 지녁('징용'이라 한 말을 잘못 들은 것) 소집 딱지를 들고 가겠다고 딱 나선 것이여.”
나: “뭐라구라우? 지녁살이라고 허셨소?”
아버지: “말할 작시면 징용이제. 일본 놈들이 끌고 간 것 말여. 근다고 내가 순순히 따라 갈 성 싶냐? 아녀 절대 아니랑께. 세 번이나 도망쳐부렀다. 한번은 소쟁이 들판 앞으로 잡으로 와서 한꾼에 따라가다가 감난쟁이 쪽으로 내빼분게 못 쫓아오더라. 총알 몇 발 날아오드만 끝이었다. 갹꼬 어떻게 돼부렀냐믄 헌병들이 담날 항월 집으로 온 것이제.”


아버지 말씀을 듣다보면 시간가는 줄 모른다. 재미가 있었다. 말솜씨가 대단하여 웬만한 사람 혼을 빼놓기도 했다. 그건 세상살이가 순탄치 않은 사람이 술 한 잔 마시면 인생역정을 술술 실꾸리잡고 풀어놓은 거나 마찬가지다.

“같이 가겠다고 나온 송단이 아제들은 그래도 열아홉 스물을 다 넘겼어. 니 아부지가 가겠다고 핵꾜 모탱이에 나타난께 헌병들이 그러대.”

“야 돌빵여시가 여그 뭣헐라고 왔냐. 어미 젖 좀 더 먹고 오니라.’고 함시롱 약을 올려."


“그래서 내가 예끼 여보쇼. 사람무시하지 말랑께라우. 이래봬도 쌀 두가마니는 너끈히 지요. 춘부장 대신 나왔응께 그리 아싯쇼.”하며 나선 첫 번째와는 달리 두 번째는 무등산 뒤쪽 화순으로 넘는 고개가 하나 있는데 밤새 산을 넘다가 도망 왔다고 한다.

시골은 겨울밤은 한량없이 길다. 오후 5시부터는 문고리 잠그고 나오지 않고 새끼를 꼬거나 조리를 만들기도 하고 잠자는 것이 일인데 가끔 출타를 하시면 밤 8시경 오셔서 11시가 넘도록 말씀이 이어진다.

“일본 놈들이 얼마나 징상스러운 놈들인지 알어? 공출이라면 지금도 이가 갈린다. 집안 못은 물론이고 말목, 꺽쇠, 핑경, 니기 할매 비네에다가 오강도 쇠붙이면 걷어가부러. 지미럴 놈들이 밥은 어찌코롬 해묵으라고 솥단지랑 숟구락, 저금까장 죄다 거둬들이고 관솔을 모으라 피마자기름에 유채기름도 짜라고 한 놈들이다. 인공 때는 그려도 죽창으로만 찔르지 않았으면 지기들 먹을 것만 한보따리 챙겨갔응께 그래도 조선 놈은 조선 놈이여."

마지막 줄행랑이 궁금했지만 기력이 없으셨는지 그날은 이걸로 끝이었다.

덧붙이는 글 | 김규환 기자는 2년 남짓 써왔던 고향이야기 600여 편 중 몇 개를 묶어 <잃어버린 고향풍경1>을 냈다. 고향의 맛을 찾는데 열심인데 올 2월에 음식과 홍어를 다룬 책이 따로 나올 계획이다. 홍어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모임(cafe.daum.net/hongaclub) 대표이며 올해 말에 전남 화순 백아산으로 귀향하여 <산채원(山菜園)>을 만들 작은 꿈을 꾸고 있다.

덧붙이는 글 김규환 기자는 2년 남짓 써왔던 고향이야기 600여 편 중 몇 개를 묶어 <잃어버린 고향풍경1>을 냈다. 고향의 맛을 찾는데 열심인데 올 2월에 음식과 홍어를 다룬 책이 따로 나올 계획이다. 홍어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모임(cafe.daum.net/hongaclub) 대표이며 올해 말에 전남 화순 백아산으로 귀향하여 <산채원(山菜園)>을 만들 작은 꿈을 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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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환은 서울생활을 접고 빨치산의 고장-화순에서 '백아산의 메아리'를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6, 70년대 고향 이야기와 삶의 뿌리를 캐는 글을 쓰다가 2006년 귀향하고 말았지요. 200가지 산나물을 깊은 산속에 자연 그대로 심어 산나물 천지 <산채원>을 만들고 있답니다.도시 이웃과 나누려 합니다. cafe.daum.net/sanchaewon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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