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정통무협 단장기(斷腸記)- 115회

등록 2005.02.08 08:09수정 2005.03.12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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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0 장 일월쌍륜(日月雙輪)

“자네는 자네가 한 짓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위험을 가져올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보았나?”


섭장천의 탄식어린 말에 흑모전서 균달은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마치 막다른 골목에 갇혀 고양이 앞에 몰린 쥐처럼 그는 애처로운 눈길과 전신을 떨고 있었다. 그것은 그의 버릇이기도 했지만 지금은 달랐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이토록 크게 느껴진 적이 없었다.

“소… 소인은… 아무 짓도 하지 않….”

그는 숨이 막히는 것을 느꼈지만 끝까지 잡아떼어야 했다. 자신의 입으로 실토하는 순간 자신은 더 이상 숨을 쉬지 못할 터였다. 살 방도는 전혀 없었다. 보는 것만으로 주눅이 드는 이 거인 앞에서 도망간다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 지나가는 것 보다 더 힘든 일이었다.

“노부는 자네의 어리석음을 말하고 있네. 표식을 남기려면 좀 더 현명하게 처리해야 자네가 원하는 사람에게 전달되는 법이네. 음호(陰號)를 사용하려 했다면 좀 더 은유적이고 다른 사람이 전혀 눈치 채지 못할 것을 사용해야 했네.”

균달은 더욱 심하게 몸을 떨었다. 이미 섭장천이란 거인은 자신이 한 행위를 모두 알고 있었다. 이제는 자신이 부인한다 해도 소용없을 터였다.


“자네가 더욱 어리석은 것은 자네가 위하고자 했던 자네의 친구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결과만 가져왔다는 것일세. 어찌 그 정도도 생각하지 못하고 자네는 자네의 친구에게 오룡번의 행방을 알릴 생각을 한 것인가?”

그 말에 균달은 작은 눈을 째질듯 크게 떴다. 회색빛 머리와 피부가 검붉은 빛으로 물드는 것 같았다.


“그… 그를 죽였습니까?”

자신의 처지도 잊은 채 그의 목소리에는 다소 분노의 기색이 담겨있었다. 자신의 친구는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자신에게 있어서 유일한 친구였다. 어릴 적부터 그 친구는 유독 균달을 이해했고 그를 보살펴 주었다. 남들은 친구를 포악하다고 하고 잔혹하다고 했지만 그 친구는 균달에게 모든 것을 주었다. 어릴 적 자신이 남에게 맞으면 반드시 그 친구는 때린 사람을 찾아가 그 대가를 치르게 했다. 남들이 균달을 업신여기면 반드시 그 업신여긴 대가를 치르게 했다. 그는 균달의 진정한 친구였고, 유일한 친구였다.

“우리는 그를 죽이지 않았네. 하지만 아마 지금쯤은 누군가의 손에 죽었을 것이네.”

섭장천은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들이 손을 쓰지 않았다면 분명 그러할 것이다.

“노야… 그 친구가 위험에 빠졌습니까?”

균달은 이미 섭장천이 추궁하는 것을 인정한 셈이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깨닫는 것보다 그 친구의 안위를 먼저 걱정했다. 그는 사정했다.

“섭노야… 그 친구를 살려주십시오. 제발… 다른 사람의 손에 죽지 않도록 살려주십시오.”

여전히 몸을 떨며 말을 하는 그의 눈과 얼굴 전체에는 너무나 간절한 빛이 떠올라 있었다. 자신이 죽음 앞에 있다는 사실도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자신의 친구… 그 친구가 살아야 했다. 무림에 나와 좀도둑이 된 이후에도 그는 친구에게서 목숨의 구함을 세차례나 받았다.

“자네가 저지른 일이네. 자네의 어리석음이 빚어낸 일이네. 더구나 노부가 무엇 때문에 노부 일행을 노렸던 자네의 친구를 살려주어야 할 것이라 생각하는가? 우리 손으로 죽이지 않은 것은 바로 자네를 생각했기 때문일세.”

균달의 작은 눈에서 굵은 눈물방울이 흘러 내렸다. 그는 털썩 섭장천을 향하여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고개를 숙여 머리를 바닥에 찧으며 울음 섞인 목소리로 외쳤다.

“제발…섭노야…. 소인의 목숨은 당장에 가져가더라도 그 친구만큼은 살려 주십시오. 제발….”

쿵---쿵---!

바닥이 울리고 균달의 이마에서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울음이 섞여 또렷하지 않은 목소리로 외쳤다.

“그는 소인의 하나밖에 없는 친구입니다. 친 혈육보다 소중한 친구입니다. 생명의 은인입니다. 제발….”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섭장천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균달의 외침은 너무나 애절해서 들어주고 싶었다. 하지만 사람은 아무리 경천동지할 능력이 있어도 죽은 사람을 살려낼 수는 없다.

“이미 늦었네. 그가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우리와 같이 있는 것 뿐이었네. 하지만 그는 한시진 전 우리에게서 지광계부부를 빼내가기 위하여 자신의 협력자를 구하러갔지. 그는 자신이 협력자라고 알고 있는 그들에게 죽음을 당했을걸세.”

그 순간 균달의 동작이 멈췄다. 바닥에 머리를 찧는 것도 멈추었고, 울음소리도 그쳤다. 이미 섭장천은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자신이 그 친구를 알고 있는 것보다 섭장천 일행은 그 친구를 더 잘알고 있었다. 그 친구가 무엇을 하는지, 무엇을 하려고 했는지까지 알고 있었다. 그의 친구가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다 하더라도 애당초 이들과 맞서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이미 이마를 흘러내려 코끝을 타고 내리는 핏물 사이로 작은 눈을 힘없이 뜨면서 나직히 말했다. 그는 이미 모든 것을 포기했다.

“소인을 죽여주시오.”

어차피 이 자리를 벗어날 수 있다 해도 그는 살 수 있는 목숨이 아니었다. 그가 모습을 보이는 순간 오룡번을 노리는 자들은 흉폭한 이빨을 드러내고 자신을 갈기갈기 찢어발길 터였다. 무엇보다 더 이상 죽음에 대한 두려움 속에서 떨고 싶지 않았다. 이미 이들을 배반한 것은 자신이었고 이런 경우에 돌아올 것은 죽음 밖에 없었다. 더구나 그 친구가 죽었다는 소식은 그에게 삶의 의욕마저 빼앗아 가 버렸다.

하지만 섭장천의 입에서 나오는 감정없는 목소리는 의외였다.

“우리는 한번 사귄 친구를 쉽게 버리는 사람들이 아니네. 인간은 누구나 실수를 하네. 현명한 자는 한번 실수로 족하지만 어리석은 자는 반복해서 실수를 하지. 자네는 매우 중요한 일을 했고, 우리는 아직까지 자네를 친구라고 생각하네.”

섭장천의 말은 균달을 살려준다는 것이었다. 두 번 다시 실수를 하지 않는다면 언제까지 균달은 그들의 친구라는 의미였다. 균달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 위로 섭장천의 목소리가 그의 고막을 울렸다.

“더구나 자네는 가장 소중했던 친구의 죽음을 외면하고 죽어 버리고 싶은가? 그 친구의 목숨을 빼앗아간 그들에게 복수하고 싶지 않은가? 우리는 자네의 친구네. 친구를 위해서 친구가 원하는 것을 해주는 것은 친구로서 해야 할 당연한 일이네.”

이들은 자신을 용서해 주었다. 그리고 자신이 꿈도 꾸지 못할 일을 이야기 하고 있었다. 자신의 능력으로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도저히 이룰 수 없는 꿈. 친구의 복수. 그렇다. 그가 죽은 친구를 위하여 할 수 있는 일은 복수였다. 그는 오체복지했다. 그리고 외쳤다.

“노야…. 소인은 지금 이 자리에서 노야께서 죽으라 하시면 칼을 물고 죽겠습니다. 노야께서 원하시면 펄펄 끓는 기름 속이라도 들어가겠습니다.”

균달은 더 이상 떨지 않았다. 남들이 동정을 해 줄만한 표정도 짓지 않았다. 아마 균달은 앞으로 떠는 일이 없을 것이다. 친구가 죽은 그 순간부터 그는 어차피 덤으로 사는 삶이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는 더 이상 두려워 할 것이 없었다.

섭장천은 손을 내밀어 오체복지하고 있는 균달을 부드럽게 잡아 일으켰다.

“우리는 지금 곧 출발해야 하네. 만약 자네의 친구가 유일하게 마련해 준 이 시기를 놓치면 우리는 곤욕을 치르게 될 것이네.”

그 말에 균달은 지금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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