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정통무협 단장기(斷腸記)- 116회

등록 2005.02.10 08:34수정 2005.03.12 15:57
0
원고료로 응원
전독마조 척응은 장안루 내원에서 문을 통하지 않고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야산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야산은 장안루를 끼고 도는 위하(渭河)의 깎아지른 절벽에 손님들이 다가가지 않도록 인공으로 만든 것인데 그 북쪽으로는 소롯길이 나 있어 장안루를 빠져 나갈 수 있었다. 그 소롯길 바로 옆에 척응의 시신이 난자당한 채로 발견되었던 것이다.

전날 적령추살 도삼득의 죽음으로 긴장감이 감돌던 장안루 안은 척응의 시체가 발견되면서 더욱 스산한 분위기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모습을 보이지 않던 무림인들은 서로 마주치기 싫은 듯 조심스레 움직이며 척응의 시체를 살피고 돌아갔지만 장안루 안은 급작스런 동요와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었다. 척응의 시신을 본 무림인들은 시신이 말하는 소리를 들은 듯 했다.


-- 빨리 도망가라. 되도록 멀리 도망가라.

공포(恐怖). 그것은 극도의 공포였다. 아마 척응이 죽지 않았다면 그 공포로 미쳐 버렸을지도 몰랐다. 아니 이미 미친 후에 죽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한 공포는 척응의 시신을 보는 모든 사람들에게 전이되었다. 그들은 서둘러 장안루를 떠나고자 마음먹었다. 척응이 죽은 이유는 말하지 않아도 분명했다. 척응은 오룡번에 다가갔을 것이다. 무언가 알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 이유로 그는 죽은 것이다.

사람의 몸이 이렇게 난자될 수 있다는 것도 사람들은 처음 알았다. 그가 자랑하던 마조는 이미 열손가락이 모두 잘려 나가 아무 소용이 없게 되었고, 마치 살을 포 떠놓은 듯 전신은 온통 날카로운 병기에 의해 빽빽하게 혈흔이 그어져 있었다.

조금 전 척응의 시신을 보고 온 남궁산산은 다시 그 모습이 떠오르자 몸을 파르르 떨었다. 그녀의 얼굴에도 은은히 두려움이 비치고 있었다. 전독마조 척응은 고수였다. 단지 고수가 아니라 누구도 그를 상대하기 꺼려할 정도로 가공할 고수였다. 사갈같이 냉정하고 늑대같이 잔혹하며 매처럼 빨라 잡은 먹이는 절대 놓치지 않는 맹수의 본능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런 인물이 공포에 절은 채로 전신이 난자당해 죽었다는 것은 보고도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누가 그토록 잔인하게 죽였을까요? 왜 그랬었어야 했을까요?”


남궁산산이 얼굴을 풀지 않고 입을 열자 모용수가 침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경고하고 있는 거야. 경고하고자 하는 의미는 여러 가지이지만 확실한 것은 이곳을 떠나라고 강요하는 것이지.”


그만이 느끼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일행 모두가 그렇게 느끼고 있었다.

“왜? 무엇을 노리고?”

팽악의 의문에 대답해 줄 사람은 없었다. 담천의는 무언가 생각하는 듯하더니 모용수를 향해 물었다.

“혹시 두 가지 종류의 기형병기를 사용하는 사람을 알고 있소? 하나는 검이나 도와 같이 매끄러운 날을 가진 병기와 거치도(锯齿刀)와 같이 기형병기를 함께 사용하는 자 말이오. 그것도 아니라면 하나의 도신에 한쪽은 매끄러운 날을 있고 칼등에는 거치(锯齿:톱날)와 같은 날을 가진 병기를 쓰는 자라도 상관없소.”

모용수는 담천의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담천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가 묻는 의미를 모를 모용수가 아니었다. 하지만 자신이 생각했던 것과 약간 달랐다.

“담형은 지금 전독마조 척응이 한 사람에 의해 죽음을 당했다는 것이오? 소제는 오히려 오랫동안 합격술을 익힌 두 명에 의해 살해 되었다고 생각했소.”

난자된 척응의 시신을 보면 확실히 한 가지가 아닌 두 종류의 병기에 의한 상처였다. 미세한 차이이지만 상처 부위에 난 모양이나 깊이, 그리고 출혈의 방향 등을 보면 확실히 다른 병기에 의한 것이 분명했다. 특히 구분되는 것은 상처가 시작된 곳이 아니라 살을 헤집고 나온 마지막 부위에서 그 차이는 확연했다.

“한명이오. 아무리 합격술을 오랫동안 완벽하게 익힌 인물들이더라도 두개의 병기가 지나는 상처의 흔적 간에 한 줄도 겹쳐지는 상처가 없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오. 마치 포를 뜨듯 그토록 잔혹하게 그어진 수많은 상처들 간에 겹쳐지는 상처가 없었다는 것을 생각해 보시오. 한 사람이라도 그렇게 만들기 어려울 거요.”

그의 말에 모용수는 다시 척응의 시신을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자신은 담천의가 지적했던 것을 놓쳤다. 잔혹하게 살해된 척응의 시신은 생각하기 싫었지만 담천의의 지적은 옳은 것 같았다. 모용수는 부끄러웠다. 자책감까지 들었다. 어떤 일이든 조사하고 그 조사된 내용을 가지고 판단하는 것은 자신의 몫이었다. 그런데 너무나도 중요한 단서를 놓친 것이다. 그의 귀로 담천의의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

“그 상처는 두 가지를 알려주고 있소. 하나는 상대가 단지 삼초식만 사용해서 척응의 전신을 난자해 죽였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그가 삼 초식만으로 척응을 죽일 수 있는 가공할 고수라는 사실이오.”

이 세상에 척응을 단지 삼 초식 만에 난자해서 죽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인물이 누굴까? 척응을 공포에 질려서 죽어가게 만들 인물은 누구인가? 일행은 담천의가 추측한대로 두 가지 기형병기를 쓰는 가공할 고수가 누구일지 생각했지만 특별하게 떠오르는 인물은 없었다.

모용수를 비롯해 일행들의 얼굴에 곤혹스러운 기색이 떠올랐다. 그것은 그들이 아직까지 그 상대가 누구인지 떠올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자 지금까지 그들의 이야기만 듣고 있었던 구양휘가 문득 입을 열었다.

“일월쌍륜(日月雙輪)이라면 가능해.”

경험이란 돈을 주고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읽고 듣는 것이 지식을 쌓는데 도움이 되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직접 보고 느끼고 겪는 것과는 차이가 크다. 지금까지 구양휘는 자신의 의제들이 대화하고 추론하는 것을 듣는 입장이었다. 그들은 비상한 두뇌를 가지고 있었고, 직관력과 합리적인 판단력을 갖추고 있었으며 올바른 결과를 도출해 왔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풍부한 경험이 부족했고, 그것은 그들의 한계였다.

“대형은?”

모용수가 심각한 표정으로 되묻자 구양휘는 고개를 끄떡였다.

“철혈보를 받치고 있는 네 개의 기둥 중 첫째이며 철혈보의 서열 이 위라 알려진 일월쌍륜 육능풍(陸凌馮)이지. 그들이 온 거야.”

일륜(一輪), 일창(一槍), 일편(一鞭), 일도(一刀).
철혈보의 네 개의 기둥 - 사천주(四天柱)라 불리는 이들은 철혈보의 보주를 제외한 서열 이위부터 오위까지의 인물들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대(代)를 이어가며 철혈보가 중원제일의 문파의 위명을 지켜나가게 하는 공신들이었다. 이 중에 무림에 모습을 드러내는 인물은 주로 일창(一槍)인 철혈대주 독고좌였고, 나머지 세 명은 모습을 드러낸 바가 거의 없었다.

“일월신륜을 직접 본 것은 아니다. 그것을 본 인물은 누구를 막론하고 죽었지. 하지만 한 쌍의 일륜과 월륜은 그 모양이 다르다고 들었다. 일륜은 악마의 이빨을 가지고 있고 월륜은 매끄러운 날을 가지고 있다고 하지.”

설명하는 구양휘의 표정은 어두웠다. 철혈보의 사천주는 무림의 전설과도 같은 인물들이었다. 철혈보에 중대한 일이 발생하지 않으면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는 이들이 나타난 것은 이번 일이 그들에게 심각한 일이라는 의미였다.

“그들도 우리와 같이 생각한 거야. 금적수사 부부를 빼돌린 인물들이 이곳에 숨어 있을 거라 생각한 거지. 더구나 척응을 그리 잔혹하게 죽이고 그것을 이곳에 있는 무림인들에게 보인 것은 철혈보의 주력이 이곳에 있으니 관련되지 않는 인물들은 모두 비켜달라는 의미야. 또한 우리가 모르는 가운데 그들은 철혈보와 금적수사를 빼돌린 인물들과 치열한 암투를 벌이고 있었던 것이라 생각해야겠지.”

담천의는 고개를 끄떡였다. 구양휘의 생각은 어느 정도 자신이 생각하던 것과 같았다. 담천의가 몰랐던 것은 나타나야할 철혈보 인물들의 내력이었다. 일월쌍륜에 대한 구양휘의 설명에 그는 자신의 미진했던 부분을 끼어 맞출 수 있었다.

“척응은 우리 예상대로 흑모전서로부터 정보를 얻었소. 그는 조심스런 자였으니 일단 상대의 전력을 파악하려 했을 거요. 그는 자신과 동행하고 있는 적령추살 도삼득을 부추켜 접근을 시켰으나 도삼득은 아주 간단하게 죽임을 당했소. 그는 분명 상대가 자신이 어찌해볼 수 있는 자들이 아니었음을 깨달았 을거요.”

“그렇다면 적령추살은 철혈보의 짓이 아니라 금적수사를 빼돌린 자가 죽였다는 뜻이오?”

“그럴 가능성이 농후하오. 물론 적령추살이 소림의 비전지기에 의해 죽음을 당했다는 점에서 이해하지 못할 부분이 있지만 그들이 죽였다고 생각하는 것이 합리적이오. 그러자 척응은 그들과 맞설 수 있는 힘을 가진 곳, 구파일방일 가능성도 있고 철혈보일 가능성도 있소. 그들과 접촉을 가지려 했을 거요.”

“그런 상황이었다면 철혈보에서 척응을 죽일 이유가 없잖소. 그를 이용하는 것이 백번 옳은 것 아니오?”

모용수는 지금 자신의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 자신은 이렇듯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추론하는 방향이 어긋나기 시작하면서 그의 뛰어난 사고능력이 멈춰버린 것 같았다. 그러한 일은 사실 누구에게나 올 수 있는 일이었다. 자신이 똑똑하다고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자라면 더욱 자신의 아집에 빠질 수 있었다.

“우리는 금적수사를 빼돌린 인물들이 섭장천 일행이라 생각하고 있지만 그러한 사정을 모르는 철혈보나 다른 인물들이라면 척응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겠소? 척응은 흑모전서와 친구요. 그는 장안루에 나타났고 그의 친구는 금적수사 부부를 빼내갔소.”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오마이뉴스와 저 인생의 후반기를 풍미하게 될지도 모를 무협작품을 함께하고자 합니다.

이 기자의 최신기사 천지는 만인의 것이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얼굴 창백한 계산원을 보고 손님이 한 행동 얼굴 창백한 계산원을 보고 손님이 한 행동
  2. 2 유럽인들의 인증샷 "한국의 '금지된 라면' 우리가 먹어봤다" 유럽인들의 인증샷 "한국의 '금지된 라면' 우리가 먹어봤다"
  3. 3 일타 강사처럼 학교 수업 했더니... 뜻밖의 결과 일타 강사처럼 학교 수업 했더니... 뜻밖의 결과
  4. 4 꼭 이렇게 주차해야겠어요? 꼭 이렇게 주차해야겠어요?
  5. 5 알고도 대책 없는 윤 정부... 한국에 유례 없는 위기 온다 알고도 대책 없는 윤 정부... 한국에 유례 없는 위기 온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