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정통무협 단장기 122회

등록 2005.02.18 07:50수정 2005.02.18 1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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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상돈


“아직 죽지 않았소.”

얼굴에 가면을 쓴 듯 표정이라고는 한점도 없는 사십대 중반의 사내가 돌아보며 말했다. 목소리도 단조롭고 감정이라고는 한올 섞이지 않은 음성이었다. 그는 숨을 간헐적으로 몰아 쉬고 있는 섬도 심홍엽의 상체를 조심스럽게 일으켜 세웠다. 이미 의식을 잃은 신홍엽의 상체가 뼈없는 동물처럼 흐느적거렸다. 전신은 십여 군데의 치명적인 검상(劍傷)을 입고 있어 숨을 쉬고 있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었다.


“다행이군.”

말을 한 노인은 염소수염에 덩치가 큰 인물이었다. 기이한 것은 그의 등이 굽어 있었는데 그렇다고 척추가 휘어진 것이 아니라 특이하게도 어깨 쪽이 휘어져 있어 남보다 훨씬 큰 머리가 앞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더구나 그의 양 손은 보통사람보다 두배나 될 정도로 커서 어찌보면 평생 농사를 지으며 살아 온 몸집 큰 촌노같기도 했고, 막일을 해 온 사람같기도 했다.

“그 아이의 몸이 움직이지 않도록 잡아 주겠나.”

노인의 커다란 덩치가 움직이는가 싶더니 이장 정도 떨어져 있는 심홍엽의 앞으로 다가선 것은 그의 말이 채 끝나지 않을 때였다. 저런 덩치가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미끄러져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노인은 빠르게 심홍엽의 아홉군데 대혈(大穴)를 기묘하게 두들기더니 배심혈(背心穴)에 장심을 갖다 대고는 진기를 주입하기 시작했다.

“제대로 살기 힘들겠어. 살아나더라도 앞으로는 다시 도를 잡지 못할 것 같군.”


한동안 진기를 넣어 주던 노인은 배심혈에서 손을 떼어 내더니 영대혈(靈坮穴)을 가볍게 쳤다. 그러자 심홉엽의 입에서 시커면 죽은 피가 토해졌다. 그러고보니 피를 토함과 동시에 불규칙했던 그의 숨결이 어느정도 고르게 자리 잡아 가고 있었다.

“편안하게 뉘어 놓게.”


노인은 몸을 일으키며 피비린내 나는 주위를 보며 그의 뒤에 아무말 하지 않고 있는 십여명의 인물들을 보면서 입을 열었다.

“이해할 수 있겠나?”

그의 질문에 얼굴이 훤앙하고 고급스런 자색의 명주옷을 입고 있어 집안이 부유하고 예의바른 귀공자로 보이는 삼십대 초반의 청년이 한걸음 나섰다. 그의 약간 큰 듯한 눈은 은은히 현기를 갈무리하고 있어 지혜롭게 보이기도 했고, 어찌보면 겁이 많은 듯도 보였다.

“참으로 이상한 일입니다. 육노조(陸老祖)께서도 그들 짓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육능풍(陸凌馮)은 언제부터인지 아랫사람들에게 그 어떠한 명칭으로 불리우는 것 보다 노조라는 명칭으로 불리는 것을 더 좋아했다. 그 명칭은 큰 어른을 의미했고, 그런 의미라면 당연히 육능풍만이 들을 자격이 있었다. 철혈보 내에서 실권을 가진 인물 중 가장 나이가 많았고, 철혈보주마저도 그에게 함부로 대한 적이 없을 정도여서 누구나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보이는 그대로를 보겠는가? 아니면 보이지 않는 그 무엇을 찾겠나? 자네 생각은 어느 것이 옳을 것 같나.”

자의의 청년은 육능풍이 대뜸 물어오자 잠시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언제나 느끼는 것이지만 육능풍는 불가의 고승이나 학관(學館)의 글선생처럼 대답을 하는 것 보다 질문을 하는 인물이었다. 자신의 대답이 올바르지 않으면 또 다시 질문을 할 터였다. 그렇게 자신의 생각이 옳지 않지 않음을 깨닫게하고, 자신의 의문을 자신 스스로가 깨달을 수 있도록 가르쳐 주는 인물이었다.

“우선은 보이는 그대로를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일이 왜 발생하게 되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상대를 알게되고 그들의 목적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청년은 조심스럽게 답을 했다. 비록 정식의 사제지연(師弟之緣)은 맺지 않았지만 육능풍의 눈에 들어 그의 사사(師事)를 받은지 벌써 십오년이 넘었다. 과거의 조급한 성격은 육능풍의 가르침을 받은지 단 일년 만에 그를 신중한 성격으로 변화시켜 놓았고, 행동하기 전에 충분히 생각하는 습관은 그에게 시달린지 육년 만에 자신도 모르게 생겨났다. 그것은 중요한 것이었다. 오직 자신이 가진 실력과 두뇌 만을 인정하고, 학연(學緣)이나 지연(地緣)은 물론 혈연(血緣)조차 인정하지 않는 철혈보 내에서 자신의 신분(身分)을 떠나 후지기수 중 가장 선두를 달리게 된 요인이었기 때문이었다.

“매우 옳은 말이다. 우선 보이는대로 보아야 한다고 했는데 자네는 무엇을 보았나?”

자신의 대답은 잘못된 것이 없었다. 하지만 청년은 육능풍의 얼굴에서 자신의 대답이 미진했다는 표정을 읽고 있었다. 그것은 이제부터 육능풍의 질문에서 그가 곤란을 겪게 될지 모른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곡당주(曲堂主)께서는 소림의 칠십이종절예 중 하나이자 소림권(少林拳) 중 가장 익히기 어렵다고 하는 탄자권에 당했으며, 그것은 장안루에서 발견된 적령추살 도삼득의 시신에 나타난 것과 동일합니다. 또한 형율당의 심좌령(沈佐令)께서는 화산파의 매화검법에 당했으며, 조한(曹寒) 부사령(副司令)은 점창(點蒼)의 분광십팔검(分光十八劍)에 당했습니다. 그리고..”

“설명은 이제 되었네. 자네가 말하고자 하는 요지는 본 보의 형제들이 구파일방의 인물들에게 당했다는 것 아닌가?”

청년의 설명이 길어지자 육능풍은 그의 말을 중간에서 끊었다. 청년은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자네는 이런 일이 왜 일어 났는지 이미 생각해 둔 게 있겠군.”

“너무 명백해서 이상할 지경이지만 구파일방도 오룡번을 노렸다고 생각합니다. 지광계는 구파일방과 연락을 취하고 있었습니다. 개방의 홍비개는 지광계의 의도를 몇번이나 소림과 개방에 알린 적이 있었습니다. 실제로 지광계가 장안루에서 만나고자 했던 인물은 무당(武當)의 속가제자인 풍철한(馮澈漢)이었습니다. 또한 지광계가 풍철한을 선택한 것은 매우 올바른 판단이었습니다.”

말을 하면서도 청년은 육능풍의 얼굴에 나타나는 변화를 읽으려 애썼다. 분명 자신의 판단에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는 육능풍이 뭔가 미진한 부분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다행스러운 것은 그가 자신의 말을 끊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풍철한은 자신의 형인 풍철영과는 달리 친구를 사귀기 좋아하고 남의 일에 끼어 들기를 좋아하는 인물입니다. 더구나 무당의 속가제자로는 드물게 비전(秘傳)인 양의신검(兩儀神劍)을 전수받은 관계로 당금 무림에서 무시할 자가 없을 정도입니다. 의리가 있어 친구도 많으며, 엉뚱한 결과를 초래하긴 하지만 무림의 크고 작은 일들을 참견해 해결한 자이니만큼 구파일방에서도 제격인 자였습니다. 무엇보다 지광계와 풍철한은 스스로들 풍류남아라 자칭하던 자들이었고 절친한 친구였으니 말입니다.”

“지금 이 사건과 그 일과의 관계가 무슨 상관이지?”

묻기는 하지만 흥미롭다는 표정이었다. 이미 육능풍의 얼굴에서 긍정의 기색을 읽은 청년은 지금까지의 판단이 옳다고 생각했다. 그는 주저없이 말을 이었다.

“헌데 약속을 한 풍철한은 장안루에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약속 하나만큼은 죽는 한이 있더라도 지킨다는 풍철한으로서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렇다고 구파일방에서 막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은근히 개입하기는 싫었지만 방관하기에 꺼림직했던 구파일방으로서는 풍철한을 내세워 일을 처리하는 것이 오히려 바라던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헌데 일이 꼬였습니다. 중원이 좁다고 이리저리 휘젓고 다니던 풍철한은 조사해 본 결과 이개월 전부터 모습을 보이지 않는 상태입니다. 그가 어디에 있는지, 왜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이전에도 보름 정도는 모습을 보이지 않은 적이 몇 번 있었으나 이개월이면 처음 있는 일입니다. 그의 성격으로 보아 어딘가에 이개월씩이나 처박혀 있을 위인은 절대 아닙니다.”

“그가 모습을 보인 마지막 곳은?”

청년은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물어 오는 육능풍의 의도를 짐작하면서 처음으로 입가에 미소를 띠웠다.

“그의 형인 파산신검 풍철영의 신검산장이었습니다.”
“그는 거기에 있다고 봐야 하겠군.”
“지광계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한가지 입니다. 그를 찾아 갔을 겁니다. 물론 이 사건을 벌인 놈들과 함께 말입니다.”

청년의 얼굴엔 은연 중 만족할 만한 기색이 어리고 있었다. 육능풍은 여기까지 결론을 내리는 동안 질문을 하지 않았고, 그것은 자신의 판단이 옳다는 것을 의미했다. 하지만 육능풍은 옳은 결론에 이르면 평소 박수를 세 번치면서 ‘잘했네’라고 말했는데 지금은 하지 않고 있었다. 무엇이 또 미진한 것일까?

“그렇다면 이곳에서 본 보의 형제들을 죽인 자들은 누구인가?”

그 물음에 청년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까지 다 설명하지 않았던가? 너무 명백해서 이상하기는 하지만 분명 보이는대로 읽힌 상황으로 본다면 이들의 상처는 분명 구파일방의 절기에 당한 것이고, 구파일방의 무공을 사용할 자는 구파일방의 인물들 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쉬운 이치를 몰라 묻는 것은 아닐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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