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아지를 설득하느라 늦게 서야 피난길에 오른 계화는 곧 피난민들이 허둥대는 모습을 보며 어디로 가야 할지를 정하느라 또 한 차례를 지체해야 했다. 대다수는 일단 무조건 남쪽으로 내려가겠다는 결정을 내렸지만 궁정에 있던 시비들과 무수리들은 강화도로 가느냐, 남한산성으로 가느냐를 두고 의견이 분분했다.
“상께서 강화도로 가실 것이 분명한데 남한산성이라니 당치 않다.”
“분명히 남한산성으로 가셨습니다. 어가가 늦었는데 이 눈발에 어찌 강화도까지 행차할 수 있겠습니까?”
결국 그들은 둘로 나누어 길을 잡았고 계화는 좀 더 안전하리라는 판단에 강화도로 가는 쪽을 선택했다.
“우리 병사들은 대체 어디서 뭘 하기에 사방에 난리가 나도록 아무런 수도 쓰지 않았단 말이오?”
계화일행이 가는 길에는 참혹한 정경이 펼쳐져 있었다. 민가는 불에 타고 있었고 길에는 이따금씩 시체가 눈에 띄었다. 그때마다 계화일행은 몸서리를 쳤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눈에 익숙한 정경이 되고 말 지경이었다.
“저 앞에 먼지가 일어나오.”
무수리 하나가 가리키는 곳에는 과연 먼지가 자욱했다. 좀 더 자세히 보니 말을 탄 병사였는데 복색이 분명 조선군은 아니었다.
“에구머니나!”
세 기(騎)의 기병은 청나라 군의 대오를 이탈한 몽고병이었다. 당시 조선 땅에 들어온 청나라 병사의 구성은 만주, 몽고, 한인의 연합부대였는데 이중 몽고병은 수시로 대오를 이탈해 약탈을 자행하곤 했다. 몽고병들은 계화일행을 둘러싸며 알 수 없는 말을 지껄이며 마구 웃어 젖혔다.
“이놈들! 물러서라!”
당찬 상궁 하나가 나서 몽고병들에게 소리를 질렀지만 그들의 칼날은 무자비하게 상궁의 목에 떨어졌다.
“아악!”
계화일행은 너나 할 것 없이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고 몽고병은 그들을 낚아채기 위해 말에서 비스듬히 몸을 기울였다. 순간 화살 하나가 날아와 몽고병의 등을 꿰뚫었다. 화살에 맞은 몽고병이 말에서 맥없이 떨어져 죽자 당황한 나머지 병사들은 도주하기 시작했다.
“괜찮으시오!”
활을 쏘아 계화일행을 구한 자들은 복색으로 보아 사냥꾼인 듯 했다. 계화일행은 안도의 한숨을 내 쉬는 한편 죽은 상궁을 잡고 통곡하기 시작했다.
“다들 어디로 가는 길입네까?”
그 와중에 제정신을 차리고 있는 계화가 대답했다.
“강화도로 가는 길이오이다.”
“이미 그 곳은 늦었소. 배가 없다오. 우리를 따라 가오.”
계화가 그 일행을 보니 모두 다섯인데 등에 모두 활 통을 매고 있었고 게 중에 가장 나이 들고 삐쩍 마른 자가 대장인 듯싶었다. 다른 시비와 무수리들은 낯모르는 남자들과 길을 갈 수 없다며 한사코 강화도로 가려고 했다.
“그렇게 험한 꼴을 당하고서도 모르시오? 얼마 못 가 험한 꼴을 당할 것이외다!”
“목숨을 구해준 것은 고마운 일이오나 우리는 궁중의 사람들이외다. 함부로 그대들과 함께 할 수 없소.”
상궁하나의 대답에 삐쩍 마른 사내는 코웃음을 치며 일행에게 그만 가자며 손짓했다. 계화는 강화도로 가고 싶지 않아 상궁을 무시한 채 삐쩍 마른 사내쪽으로 갔다.
“전 이 길을 따를 것이옵니다. 여인들끼리 가기는 위험한 길이옵니다.”
상궁은 계화를 꾸짖어 말했다.
“천한 것이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냐! 궁중사람들은 전하를 보필하는 것이 그 책임이거늘 어딜 제 멋대로 남정네들과 빠지겠다는 것이냐? 네 돌아와도 다신 궁중으로 올 생각은 하지 말거라!”
계화는 속으로 상궁의 어리석음을 비웃었다. 어차피 한양에 두고 온 김아지를 생각한다면 궁중과의 인연은 끝났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거 통성명이나 합세다. 내래 이진걸이오.”
삐쩍 마른 사내의 말에 계화는 조용히 자신의 이름을 대답해 주었고, 내일 일을 알 수 없는 상황에 막막함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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