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든 세상, 봄을 붙들고 한 목숨이 걸어 나오다

-박진성 시집 <목숨>(천년의 시작, 2005) 출간

등록 2005.03.05 11:08수정 2005.03.05 16:57
0
원고료로 응원
a

ⓒ 천년의시작

2001년 <현대시>에 '슬픈 바코드'외 4편이 당선된 후, 아픈 몸을 가지고 문학과 불규칙적 호흡을 규칙적으로 지속해온 박진성 시인이 첫 시집 '목숨'을 내놓았다.

시는 영혼의 독백이라는 진부한 이야기에 바탕 한다면, 시집은 시인이 품은 영혼의 지류가 합류하는 저장고다. 이렇다는 것은 시 아닌 시집이 보다 큰 울림의 강도를 갖는다는 의미인데. 시인은 시집이라는 노출된 제3의 지점에서 자신의 구체를 알몸처럼 재확인한다. 많은 시인들이 시집을 낸 후 자신의 시집을 당분간 펴보지 않는다는 말은, 아마 이와 관련하여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박진성의 시를 읽는 사람들은 그 영혼에 대해 여러 의문을 갖게 된다.


눈을 감으면 보였다 병원 근처 대나무 숲
또 밤이 오면 눈발이 대나무에 달라붙었다
나는 詩人이 될 거야, 간호사들은 비웃었지만 나는
대나무에 달라붙어 옹이가 되었다
그 해 겨울, 칼날 같이 빛나던 빙판길에서
어머니는 울었다 거리가 온통 병실이구나
마구 자빠지는 사람들은 편안해 보였고
아침의 빛다발 속에서 아무것도 부활하지 않았다

…하략…
-'대숲으로 가다'-1996년

서시격인 이 시는 시인에 대한 두 가지 정보를 제공해준다. 먼저 그가 누구보다도 시인이 되고 싶어 했다는 점이다. 병원에서 그는 건강보다 먼저 문학을 생각했다. 문학은 그의 실존에 앞선 존재태인 셈이다. 또 하나의 정보는 “거리가 온통 병실이구나”란 구절에 이르러서다. 그가 거리를 병실로 본다는 것은 병원 안팎이 그에게 “아무것도 부활하지 않”는 모습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요컨대 시인에게 세상은 병원의 모습에 다름 아니다.

그의 시집 도처에는 병, 가족, 목숨이 있다. 그의 시는 문학평론가 박수연의 말대로 “부재하는 기원과 시의 형식”으로 명명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언어들은 의미의 확산을 위해 있지 않고 분위기의 일관성과 집중을 위해” 있다.

1
피를 뽑으라뇨 검사를 하시겠다? 엑스레이를 찍으라뇨 흉부에 이상 있을지 모르겠다? 혹시 모르니 소변을 보자구요? 나는 비등점이란 말입니다 내 안의 것들 타닥타닥 소리내며 몸 비틀고 있단 말입니다 응급실에 한두 번 오나요?

…중략…

3
내 몸에 묻은 어머니 지문들로 소용돌이치네 보름달은 어지러울 때도 둥글 뿐, 내 몸 하나 간신히 누일 침대에서 어머니랑 나, 오래도록 살았네 밤의 응급실이 나의 고향이었네 보름달 속이었네

-'나쁜피-응급실'

이 시는 시인이 겪었던 정황을 고스란히 그 분위기와 함께 재생시킨다. 어쩌면 그는 응급실에 수시로 드나드는 단골환자이며, 그의 병증은 거대한 뿌리를 거느리고 그의 삶을 압도하고 있는지 모른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에 대한 시인의 태도이다. 그는 “밤의 응급실이 나의 고향이었네 보름달 속이었네”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그의 대담함, 혹은 지루한 병력에서 연유한 내성에서 기인된 것이라기보다는 그가 세상을 보는 눈과 결부된다.

앞서 그에게 세상은 병원이라는 진술을 여기에서 다시 연장하자면 그가 선 자리는 모두 병실이 되는 셈이다.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삶을 살아냈겠는가. 이러한 인식의 현실, 삶의 모습이 없었다면 박진성은 평론가 장석주가 추천글에서 말하는 “호흡법과 리듬, 언어의 선택, 진정성, 그리고 심미적 깊이에서 뛰어”난 시를 잉태하지 못했을 것이며, 시집을 가진 시인으로 거듭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주치의 춘천으로 발령나서
새 병원 찾아가는 길
잘못 나온 꽃잎 몇 개
안녕,
대기실 의자에 앉아
아까 본 목련 꽃잎을 자꾸만 바라보는데
간호사 하나가 나를 힐끔힐끔 쳐다보는거라
허만하 시집 갈피 사이 수직으로 떨어지는 모래알.
안녕, 이라고 애써 고개 파묻고 있었는데
박진성님……카운터로 걸어가는데
뒷목덜미를 꽃이 잡아끌었는데
저기, 진성이 아니니… 간호사가, 안녕,
고등학교 동창 선경이가,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표정으로
안녕,
미래 신경정신과 수간호사가 되어 있는거라
상습 불면, 자살충동, 공황발작,
차트를 오래오래 쳐다보는거라
조제실에서 알프라졸람과 바리움을 봉지에 넣고 있는
스물일곱의 네 손가락은
기다란 의자에 않아 약을 기다리는 스물일곱의 내 엉덩이에
근육이완제를 주사하겠지
…하략…

-'안녕'

이 시는 개인적 삶의 정황을 보다 구체적으로 보여주는데, 그가 앓는 병에 대한 진단이 보다 객관적 위치에서 노출되고 있다. 그 노출은 고등학교 동창생인 간호사에 의한 것인데,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표정으로” 이 둘이 나눌 수 있는 말이란 고작해야 창밖 분분이 떨어지는 목련처럼 ‘안녕’이 전부다. 스물일곱의 청춘이 겪는 드라마와 같은 슬픈 비극은 이내 곧 스크랩되어 독자의 가슴에 얼룩진 자국을 덧댄다.

그리고 박진성 시의 지배소라 할 만한 “불면, 자살충동, 발작, 불시착, 불안, 뻣뻣함, 강직, 입원, 응급실, 병원”과 같은 죽음 이미지들은 그 대척점에 “안면, 고요, 평온”의 자리를 마련해 놓고 있다.


죽음(긴장·강박) 이미지의 많음은 그의 시집의 내용이며 형식인데, 이것을 떠안는 평온의 이미지들은, 시인과 관계된 대상은 때문에, “아버지, 불쌍한 내 자식,”('나는 아버지보다 늙었다')처럼 힘들 수밖에 없다. 하여, 그는 自序에서 “내 시만은 골병 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이 두 대척점 사이의 “팽팽하게 당겨진 신경선”에서 그는 겨우 버텨 나가는 것이다. 이것이 목숨을 견디어 나가는 한 방법이며, 그 방법으로 시라는 형식을 삼는 것이다.

덧붙이자면 이 시집에서 가족을 주제로 한 시편- '큰엄마', '목숨' (시편) '폐경기', '뼈를 추스르다', '폐가', '野史', '수궁에서 놀다', '나는 아버지보다 늙었다'-들은 어느 시편보다 핵심인자이며 정서의 차원에서 깊고 아름답다.

그러나 박진성의 시는 내성화의 경향으로 나아가되 주체, 자아에 함몰되지 않는다. 아픔과 병을 통한 타자와의 교류의 흔적은 가령 '계룡산 학봉리에 김열 산다', '아픈 것들은 아픈 것들끼리'와 같은 시에서 “마음 한군데가 절단 나고”, “다리 한군데가 절단”난 말띠동갑의 형과 나가 “뒤엉켜서 학봉리 온 마을을 휘저었더랬습니다”라고 말할 때, “아픈 것들은 아픈 것들끼리 같은 물관에서 눈물을 받아먹는데”, 확인되는 것이기도 하다.

고흐가 동생인 테오에게 보낸 편지형식의 시편들도 눈여겨 볼만한데, 이것은 시인이 고흐의 예술혼에 매료된 것이 일차적 소여겠지만, 소재로서 지루하다할 정도로 널리 차용된 고흐의 삶을 신선한 그리고 생생한 모습으로 되살리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이것은 일종의 연출인 셈인데, 박진성은 이러한 기법에 어느 누구보다 탁월한 미적 능력을 보여준다.

며칠 동안 똑같은 자세로 앉아 있는 크리스틴, 테오야
그녀 몸 지나간 욕망들
어떤 빛깔로 그녀를 기억하고 있을까
그녀 몸 구곡 따라가는 일은

…중략…

어떤 색으로도 다다갈 수 없는
내 영혼의 빛깔이란다
내 심장이 그녀 가슴에 닿는 순간
색칠하지 못한 이 그림의 여백은
그녀 심장 속에서나 꿈틀대겠지
귓속에서 웅성거리는 소용돌이 테오야,
그릴 수 없는 많은 것들을 우리는 무어라 불러야 하나


-「크리스틴을 그리며, 테오에게」

‘말할 수 없는 것을 우리는 무어라 적어야 하나’라는 시인의 음성은 “그릴 수 없는 많은 것들을 우리는 무어라 불러야 하나”라는 잠언적 구절로 아름답게 변주된다. 아무쪼록 말할 수 없는 것들의 현현을 위해 그의 시가 건강하게 세상과 함께 하기를 기대한다. 박진성의 <목숨>은 비극적이지만 어쩌면 가장 진정성 있는 포즈로, 허위와 타락의 병든 세상에 절름발이의 몸짓으로 가열하게 다가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덧붙이는 글 | 박정석 기자는 시인으로 2004년<현대시>를 통해 등단했습니다.

덧붙이는 글 박정석 기자는 시인으로 2004년<현대시>를 통해 등단했습니다.

목숨 - 개정판

박진성 지음,
천년의시작, 2012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집 정리 중 저금통 발견, 액수에 놀랐습니다 집 정리 중 저금통 발견, 액수에 놀랐습니다
  2. 2 국무총리도 감히 이름을 못 부르는 윤 정권의 2인자 국무총리도 감히 이름을 못 부르는 윤 정권의 2인자
  3. 3 과음으로 독일 국민에게 못 볼 꼴... 이번엔 혼돈의 도가니 과음으로 독일 국민에게 못 볼 꼴... 이번엔 혼돈의 도가니
  4. 4 저는 경상도 사람들이 참 부럽습니다, 왜냐면 저는 경상도 사람들이 참 부럽습니다, 왜냐면
  5. 5 국방부의 놀라운 배짱... 지난 1월에 그들이 벌인 일 국방부의 놀라운 배짱... 지난 1월에 그들이 벌인 일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