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우린 뭐야? 월세, 전세, 자가?"

[학생기초조사서 2005] 다시 생각나는 "TV 있는 사람 손들어봐"

등록 2005.03.07 00:26수정 2005.06.23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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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우리는 뭐야?"
"뭐가?"


"집 말이야."
"집? 집이라니?"

"자가, 전세, 월세 중에서…."
"그야 전세지."

"그냥 자가로 쓸까?"
"뭘 그래? 거짓말 할 건 없지."


고등학교에 입학한 딸이 거실에 앉아 뭔가를 열심히 적다가 제게 묻습니다. '우리집은 뭐냐고?'

저희는 2년 전 지금의 아파트로 이사를 왔습니다. 전에 소유했던 아파트로는 전세값 정도밖에 안 되는 제법 큰 아파트였습니다. 사실 돈이 부족해서 전세로 왔지만 설사 돈이 있었다 하더라도 우리 가족에게는 좀 큰 편인 지금의 아파트는 애당초 살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냥 한시적으로, 한창 때인 아이들에게 널찍한 방을 주려고 이사를 왔던 것이었습니다.


딸 역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집이 전세인 것은 잘 압니다. 그런데 새삼 제게 '뭐라고 쓸까?'라고 묻는 걸 보니 제 딴에도 집이 없다고 하려니 좀 창피한 느낌이 드는 모양입니다.

그나저나 저는 딸이 학교에 제출해야 한다는 '학생 기초 조사서'의 항목들을 쭉 훑어보게 되었습니다. 기본적으로 묻는 가족 관계와 주소, 연락처, 친한 친구 이름을 적는 항목들이 눈에 띕니다.


그런데 제가 학교에 다녔던 30년 전과 달라진 항목들이 보입니다. 가족들의 휴대폰 번호와 이메일 주소, 그리고 통학 방법으로 '봉고와 자가용 등교'가 들어간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또 하나 다른 것은 여성들의 사회 진출이 활발해졌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 항목입니다. 보호자의 이름과 직장을 적는 난에 엄마의 직장 전화번호와 휴대폰 번호를 적도록 한 것입니다. 예전에는 전업 주부가 많아 보호자의 직장이라면 당연히 아버지 직장만을 썼던 것 같은데 말입니다.

세월의 변화와 함께 학생들의 기초 조사도 이제는 많이 달라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변하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딸이 처음에 제게 물었던 집의 형태입니다. '자가'인지 '전세' 인지 아니면 '월세'인지를 밝히라는 것입니다.

어느 집에 사느냐가 학생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일까요? 물론 학생들의 가정 형편을 알기 위해서 그런 항목을 만들었다고 하지만 당사자인 학생들에게는 상처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또 한 가지 못마땅한 것은 보호자의 학력과 직업을 '구체적으로' 적으라고 한 것입니다. 소위 '가방 끈 긴 부모'를 둔 학생들은 당당하게 대학교졸 또는 대학원졸이라고 적는데 그렇지 못한 아이들은 괜히 주눅이 들어 손으로 가린다는 얘기를 전에 딸에게 들은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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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들을 이해하는 데 부모의 학력과 직업이 정말 필요할까요? 하긴 제가 학교에 다녔던 30년 전에도 이런 끔찍한(?) 조사는 있었습니다.

"부모님 학력을 조사하겠다. 해당 사항에 손을 들어라. 먼저, 아버지 학력이다. 대졸 이상 손들어 봐? 고졸 이상? 중졸 이상? …."

이렇게 자꾸 내려가다 보면 학교에 다니지 못한 '무학'까지 나오는데 왜 그렇게 '공개적으로' 했는지 저는 그 당시에도 이해가 안 되었습니다. 이런 식의 학력 조사가 학교뿐 아니라 사회에서도 이루어지니 못 배운 부모들은 그야말로 '한'이 되어 자식들을 몰아세우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조사는 학력뿐만 아니었습니다. 그 시절에는 집에 있는 물건들을 공개적으로 조사하는 일도 많았습니다.

"집에 TV 있는 사람 손들어 봐? 냉장고? 피아노? 공부방이 있는 사람? …"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학교에서 그런 비인간적인 조사를 했었나 하는 한심한 생각마저 듭니다. 하지만 더욱 심각한 것은 아직도 이런 식의 조사가 강산이 세 번이나 변한 지금까지도 행해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학생들을 이해하기 위해서 한다는 이런 식의 조사가 어찌 보면 학생들의 '출신 성분'을 조사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제가 지나친 해석을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이런 '배경 조사' 때문에 지난번 어느 고등학교에서 발생한 내신 조작과 같은, 배경이 든든한 학부형과의 '은밀한 거래'가 생기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교사가 학생들을 진정으로 이해하려면 이런 천편일률적인 '배경 조사'보다는 면담을 통해 학생 자체에 대한 이해가 더욱 필요할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학교에서 정작 필요한 것은 학생에 관한 정보지 부모에 대한 정보가 아닐 것이기 때문입니다.

학생들과 다정한 대화를 통해 학생들의 고민과 관심사, 그리고 학업에 대한 솔직한 얘기를 주고받으면서 교사와 학생사이에 친밀한 관계가 이루어지면 얼마나 좋을까요?

며칠 전, 저는 중학교 2학년인 작은 딸이 작성한 '저를 소개합니다'라는 '학생 기초 조사서'를 몰래 훔쳐보게(?) 되었습니다. 안 보여준다고 감췄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거기 적힌 여러 항목들을 보며 아주 흐뭇했습니다. 물론 여기에도 기본적인 인적사항은 들어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다른 조사서와는 많이 달랐습니다. 거기에 적힌 내용들을 여기에 소개하려고 합니다.

* 우리집 가정 분위기는?
* 아빠, 엄마의 좋은 점과 나쁜 점은?
* 나의 가족의 특기사항을 쓰세요. (예/ 나의 정신적 지주, 얼굴만 이쁨, 행동이 바름 등)

* 아침밥을 (먹고 온다. 거의 안 먹는다. 굶는다.)
* 방과 후 집에 있어요. 학원에 가서 ___ 시쯤 집에 와요.
* 저는 이 사람이 좋아요. (연예인, 가족, 친구)

* 나의 건강상태는?
* 이 과목은 이래서 좋고, 저 과목은 저래서 싫어요.
* 저는 이런 것은 남보다 잘 할 수 있어요.

* 이런 점은 꼭 고치고 싶어요.
* 꼭 이루고 싶은 장래 희망은?
* 이런 고등학교에 가고 싶어요.

* 선생님께 들려드리고 싶은 고민 한 가지? (비밀은 절대 보장)

* 저의 경제적 형편은? (혹시 학비 감면이나 급식 지원이 필요한지, 또 작년에 지원을 받았는지 경제적 형편을 솔직하게 적어주세요. 가난은 조금 불편할 뿐, 부끄러운 일도 불행한 일도 아닙니다.)


작은 딸은 좋아하는 사람으로 가수 '신화'를, 좋아하는 과목으로는 음악과 수학을 적었더군요. 또, 사회는 어려워서, 미술은 그림을 잘 못 그려서 싫다고 적었고요.

장래 꿈에 대해서는 가르치는 일이 보람 있고 재미있을 것 같아 '교수'가 되고 싶다고 했고, 가고 싶은 고등학교로는 '내 꿈을 키워나갈 수 있는 학교'라고 적었더군요.

작은 딸 역시 우리집 경제적 형편에 대해 제게 물어왔습니다. 하지만 큰 딸의 경우처럼 집이 '자가냐, 전세냐, 월세냐'의 살벌한(?) 질문이 아니었습니다. 더구나 그 질문 역시 급식 지원이 필요한지를 알기 위해서라고 하니 학부형 입장에선 정말 솔직하게 말하고 싶은 생각이 들게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엄마, 우리집 경제적 형편은 어때? 여기에 뭐라고 적을까?"
"풍족하지는 않지만 부족하지도 않습니다."


새 학년 새 학기의 시작인 3월입니다. 저는 작은 딸의 학교생활에 기대가 큽니다. 왜냐하면 선생님은 딸아이가 자세하게 적은 '저를 소개합니다'를 통해 이미 제 딸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부모인 저보다도 제 아이를 더 잘 알고 관심과 사랑으로 이끌어 주실 것을 기대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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