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정통무협 단장기 134회

등록 2005.03.08 07:45수정 2005.03.08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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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4 장 형제지약(兄弟之約)

조국명은 내심 당황하고 있었다. 그는 장주를 바라보았다. 풍철영은 자신과는 달리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이들이 이리도 빨리 신검산장으로 들이 닥칠지는 예상하지 못한 터였다. 더구나 사전 연락도 없이 이렇게 찾아오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조국명의 예상으로는 하루나 이틀 뒤에나 찾아 올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들의 행보는 빨랐다.


“장주께 피해를 드리려는 것은 아니오. 노부는 이해할 수 있소.”

말을 하는 인물은 육십에 가까운 노인으로 손에는 한 덩이의 벽옥(碧玉)으로 깍아서 만든 비연호(鼻煙壺:일종의 향수병)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사실 비연호는 여자가 즐겨 가지고 다니는 것으로 남자가, 그것도 육순이나 된 노인이 마치 노리개처럼 그것을 가지고 다니며 만지작거린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그들이 이곳에 있다 해도 이 장원 내에서는 손을 쓰지 않겠소. 장주가 그들을 숨겨주었다 해도 장주 탓을 하지 않겠소. 그들이 이미 이곳에 있건 아니건 간에 그들은 반드시 이곳에 올 것이라는 사실이오. 노부가 부탁드리는 것은 노부 일행은 이곳에서 그들을 기다리게 해달라는 것이오.”

풍철영은 이미 이들의 말 속에서 금적수사 부부가 이곳에 왔다는 사실을 알고 찾아 왔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누구를 속이는데 익숙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아무런 결정도 내리지 않은 상태에서 금적수사 부부가 이 안에 있으니 데려가시오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더구나 상대는 거물이었다. 중원에서 만향지(滿香指) 진독수(秦獨秀)를 무시할 사람은 없었다. 그는 철혈보 내에서 서열 칠위(七位)였고, 만향지라는 그의 외호 앞에는 항상 우단사련(藕斷絲連)이란 말이 붙기 때문이었다.

우단사련이란 본래 연을 자르면 끈끈한 액이 실처럼 흘러나와 끊김없이 이어진다는 것으로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되었지만 그에게 붙인 우단사련이란 말은 그가 일단 그의 독문지공을 펼치면 상대가 쓰러질 때까지 끊임없이 공격이 이어진다는 것과 그의 십지(十指)에서 펼쳐지는 지공은 마치 실처럼 퍼져나가 상대가 빠져 나갈 수 없는 무공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풍철영의 신경을 자극하는 인물은 정작 만향지 진독수가 아니었다. 그의 옆에 앉자 지금까지 입을 열지 않고 있는 오십대 전후로 보이는 인물이었다. 그는 왼쪽 뺨에 길게 그어진 검흔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의 외모나 기도로 보아 그는 분명 냉혈도(冷血刀) 반당(班堂)이 분명했다. 일륜(一輪), 일창(一槍), 일편(一鞭), 일도(一刀)라 알려진 철혈보의 네 개의 기둥인 사천주(四天柱) 중 형율당(刑律堂)을 맡고 있는 일도(一刀) - 바로 그 자였다.

“본 장에는 말씀드리기 어려운 일이 발생했소. 그 때문에 손님을 받지 못하는 것이지 귀보라 해서 이리 말씀드리는 것은 아니오.”


조국명은 어렵게 입을 떼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풍철영은 이제 자신이 나서야 한다고 생각했다. 철혈보는 은원이 명확한 문파였다. 그가 태도를 분명히 하지 않으면 이곳에서는 곤란하고 불편한 일들이 발생할 가능성이 높았다. 갑작스럽게 자신의 신검산장이 회오리에 휘말리고 있음을 느꼈다. 동생인 풍철한의 일로 그는 큰 충격을 받은 상태에서 무림의 일에 끼어든다는 것은 일을 더욱 복잡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이삼일 내로 사문(師門)의 사형이 이곳에 당도할 터였다.

오룡번이나 무림문파간 알력은 그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지금 이곳에서 밝혀질 일은 그 어느 것보다 중요했다. 그로 인해 그의 하나 뿐인 동생의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었다. 그 와중에서 엎친데 덮친 격으로 이 중요한 시기에 오룡번에 휘말린 인물들이 신검산장으로 몰려들고 있다는 사실이 그의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본 보에서는 귀 장에 대한 일에 전혀 관여하지 않겠소. 만약 도움을 청한다면 기꺼이 도와드리겠소. 본 보에서는 장주 및 장주의 동생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소.”

그의 말은 입에 발린 말이 아니었다. 구파일방과 철혈보 간에는 보이지 않는 적개감이 있었다. 그것은 단일방파로서는 중원제일의 성세를 가진 철혈보에 대한 구파일방의 자존심 문제도 있었지만 은연 중 중원을 좌지우지하는 구파일방에 대한 독선을 견제하는 유일한 세력이 철혈보였기 때문이었다. 한 산에 두 마리의 호랑이가 있다는 것은 불편한 일이었다. 그런 와중에서 구파일방의 제자로 철혈보와 우호적인 관계를 가진 자는 풍철한이었다.

“음.....”

풍철영은 신음을 흘렸다. 이 정도로 부탁을 하는데 거절한다는 것은 철혈보와 명백하게 등을 돌리겠다는 의사표시나 다름없었다. 그는 지그시 눈을 감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곤란한 일이었지만 어쩌면 정면으로 부닥치는 것 또한 좋은 방책일 수도 있었다. 어차피 자신이 막는다고 이곳을 드나들지 못할 인물들이 아니었다. 그는 감았던 눈을 떴다.

“아마 귀보에서는 더 오실 분들이 계실 것 같은데....”

풍철영이 처음으로 입을 떼자 진독수는 엷은 미소를 지었다. 그 말은 머물 곳을 주겠다는 의미였고, 일행이 몇 명이냐고 묻는 것이다. 이럴 때는 솔직한 것이 좋다.

“많아야 열명 안쪽일 것이오.”

풍철영은 난감해 하고 있는 조국명을 바라보았다.

“이 분들을 백양각(白楊閣)으로 모시게.”

총관인 조국명은 고개를 끄떡였다. 장주에게는 어떠한 복안이 있을 것이다. 또한 이들을 안내해야 한다면 그 역시 이들이 머물 곳은 백양각이라고 생각했다. 백양각은 외원(外院)에 있었고, 금적수사 부부가 머무는 운봉소축(雲峰少築)과는 정 반대 방향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고맙소. 장주.”

“머무시고 싶은 동안 편히 머무시오. 본 장은 그리 야박한 곳은 아니오. 다만 본 장주로서는 흠모하는 두 분을 직접 모시는 일이 그리 많지 않을 것인즉 실례가 되지 아니하였으면 하는 바램이오.”

이왕 인심을 쓰기로 작정했다면 어떤 조건을 달지 않는 것이 좋다. 이들은 약속만큼은 철저하게 지키는 인물들이다. 그들이 신검산장 전체를 조사하고 파악해 내도 그들이 약속한대로 손을 쓰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어려운 이 시기에 알지 못할 적으로부터 이들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자리에서 일어나 포권을 취하는 냉혈도 반당에게 풍철영은 황급히 포권을 취해 보였다. 그의 예는 정중했고 하등 다른 사람과 다를 바 없었지만, 풍철영은 그의 전신에서 섬뜩한 혈향(血香)을 맡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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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저씨도 너에게 한가지 부탁을 하고 싶구나.”

자신의 우상인 장군의 말에 아이는 해연히 놀랐다. 자신에게 부탁할 일이라는 게 있을 리가 없었다.

“무엇이던 저는 할 거예요.”

“아저씨에게는 네 살 먹은 아들이 하나 있다. 형도 없고 동생도 없지. 아저씨는 네가 그 아이의 형이 되어 주었으면 싶구나.”

“물론이예요. 저 역시 형도 동생도 없어요. 저에게 동생이 생긴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어요.”

아이는 너무 좋았다. 자신의 부친과 장군은 사석에서는 호형호제를 했다. 아이는 자신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부친보다 장군은 나이가 어렸지만 더 높은 지위에 있는 것 같았다. 그의 부친은 장군을 존경했고 장군은 언제나 부친에게 형(兄)자를 반드시 붙이며 존대했다. 그것이 무슨 뜻인지 몰랐지만 그러한 관계일 것으로 생각했다.

“동생의 이름은 무엇이죠?”

“집에서는 그 아이를 자청(子晴)이라 부른단다.”

“그럼 담자청인가요?”

“아니... 그의 이름은 천의(天義)라고 한다. 담천의지.”

“약속할께요. 저는 그 아이와 피를 나눈 형제보다 더 우애 있는 형제가 될 거예요.”

사내의 약속은 깰 수 없는 것이다. 아이는 그렇게 배웠고 사내가 되었다. 어려서 한번도 보지 못한 동생이지만 그는 자신의 동생이었다. 그리고 그 약속이 있었던 일년이 지나지 않아 여동생 하나가 더 생겼다는 것을 부친을 통해 들었다. 그는 그 아이도 자신의 동생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 아이가 지금 자신의 앞에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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