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소설> 사금파리 부여잡고 36

남한산성-호랑이가 울다

등록 2005.03.10 17:01수정 2005.03.10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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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는 대신들을 거느리고 남문에 거동하여 장졸들을 두루 살폈다. 그때 자신을 참봉 심광수라고 밝힌 자가 징을 울린 후 인조 앞에 엎드려 자신의 말을 들어 주기를 원했다.

“무슨 일인가?”


“전하! 적도에게 사신을 보내었으나 욕을 당했다는 소문이 파다 하온데, 한 사람을 목 베어 화의를 끊고 백성들에게 사과함이 옳을 줄로 아뢰옵니다!”

“그가 누구인가?”

“최명길입니다.”

인조는 심광수의 뜻을 충분히 알겠다고 생각했고 뒤에 있던 최명길은 슬쩍 자리를 피해 버렸다. 항상 그랬지만 최명길은 조정 내에서든 밖에서든 환대를 받지 못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단지 최명길이 청과 화친해 실리를 찾자는 말을 솔직히 했다는 것에 있었다. 가짜 세자를 보낸 일로 더 이상 화친논의가 어려워진 지금은 어차피 싸울 수밖에 없었기에 최명길이 그 자리에서 무슨 말을 한다고 해도 감정적인 논의 외에는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었다.

그렇지만 지금은 최명길이 주장해온 바에 조정대신들의 태도는 점차 동의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코앞까지 압박해 들어온 청군을 당장에 깨뜨릴 묘안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리석은 자들!’

최명길은 속으로 혀를 끌끌 찼다. 왕은 자신이 청의 사신을 배격한 탓에 이런 국난을 자초한 것이라 자책했지만, 그 뒤에는 대신들의 주청과 선비들의 상소가 있었다. 이제는 어떻게 되었건 조금이라도 평등한 입장에서는 화의가 진행될 수 없었지만, 척화를 주장했던 대신들 중 일부는 태도를 바꾸어 화의를 논하고는 했다. 최명길이라면 이를 가는 김상헌이 오히려 그런 면에서는 솔직하다고도 볼 수 있었다. 김상헌은 어떤 상황일지라도 화친하자는 논의가 있으면 그 자리에서 자신이 직접 목을 베겠노라 소리를 지르는 이였다.


“이보시오 이판.”

최명길이 돌아보니 유백증이었다. 유백증은 최명길과 한살아래에 불과했지만 워낙 강직하고 입바른 소리를 하는 바람에 요직을 거쳐 간 최명길과는 달리 조정에 들어선 후 관직에 오랫동안 머물러 본적이 없을 지경인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그 능력만큼은 뭇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며 여러 선비들로부터 존경받는 인물이기도 했다.

“취헌(유백증의 호)이 어쩐 일이오?”
“아까 일을 다 보았다오.”

최명길은 유백증 답지 않게 혹시 위로라도 하러 왔나 싶어 하늘을 보고 웃음을 지었다.

“이판에게 드릴 말씀이 있소만.”

최명길은 유백증이 지나가는 말을 하러 온 것은 아니라는 점을 깨닫고서는 자리를 옮겨 마주앉았다.

“이판께서는 조정 대신들을 어찌 생각하시오?”

할 말이 있다는 사람이 대뜸 질문부터 던진 것이 황당할 법도 했지만 최명길은 솔직히 대답했다.

“영의정 김류와 좌의정 홍서봉은 믿을 수가 없소. 척화를 주장했던 중신들이 화의를 주장하기도 하다가 김상헌에게는 아무 말도 못하니 말이오.”
“그들에게 다른 뜻이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다른 뜻이라니?”

유백증은 최명길에게 무엇인가를 한참 토로했고 최명길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 말은 못 들은 것으로 하겠소이다. 취헌은 일찍이 좌의정 홍서봉의 비리를 고하다가 김상헌과 불미스러운 일을 겪기도 했는데 물증도 없는 말이 어찌 사적인 감정에서 나온 말이 아니라 여기겠소?”

유백증은 펄쩍 뛰었다.

“무슨 말씀이시오! 하늘 아래 맹세하건데 그런 일이 아니외다!”
“그렇다면 주장전하께 상소를 올려 직접 말하시오! 그리고 다시는 그런 소리 마시오!”

최명길은 화를 내며 자리를 박차고 나갔고, 유백증은 고민스런 표정으로 한참동안 혼자 앉아 한숨을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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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소설 '고주몽', '홍경래의 난' '처용'을 내 놓은 작가로서 현재도 꾸준한 집필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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