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당 선언'을 읽자

데이비드 보일의 <세계를 뒤흔든 공산당 선언>

등록 2005.03.16 00:50수정 2005.03.16 14:36
0
원고료로 응원
1848년 1월 말, 서른 살의 청년 맑스는 런던의 ‘공산주의자 동맹’에 보낼 선언문을 급하게 작성한다. 2월 1일까지로 되어 있는 마감 기한을 넘기지 않기 위해서였다. 커피, 브랜디, 그리고 시가를 연료삼아 미친 듯이 작성해서 맑스가 드디어 보낸 원고의 첫 줄은 역사상 가장 유명한 도입부 중 하나가 되었다.

“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떠돌고 있다.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세계를 뒤흔든 공산당 선언>
<세계를 뒤흔든 공산당 선언>그린비
프랑스 혁명 이후 다시 왕정으로 돌아가 버린 듯한 1848년 유럽의 보수적 분위기는 사실 곧 이어 유럽 전역에서 터져 나올 혁명의 폭풍 전야와도 같은 고요함이었다.

맑스와 엥겔스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 귀족을 몰아내는 부르주아, 부르주아를 몰아내는 프롤레타리아의 혁명을 꿈꾸며 이 문건을 작성한다. 1848년 2월, <공산당 선언>의 독일어 초판 1천부가 배포되었지만, 이 책이 큰 역할을 하지는 못한다.

책과는 무관하게 유럽 각국에서 절대왕정을 몰아내려는 민중들의 분노가 폭발했지만, 오히려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전초기지가 될 줄 믿었던 영국에서 노동자들은 잠잠했다. 맑스와 엥겔스는 프랑스와 독일에서 혁명을 성사시키려 백방으로 뛰었지만 그들이 바라던 결과는 일어나지 않았고, 민중들은 무자비하게 진압되었다.

하지만, <공산당 선언>은 <성서>와 <코란>에 버금갈 만큼 각국의 언어로 번역되어 퍼져나갔다. 공산주의 운동 역시 이 책과 함께 전 세계로 확산되었다. 1871년의 파리꼬뮌, 1917년의 러시아 혁명, 그리고 1968년의 ‘68혁명’ 등 세계를 뒤흔든 혁명의 근저에는 언제나 <공산당 선언>이 놓여 있었다. 억압받는 자들이 일어나 싸우는 정치적 봉기에 가장 큰 영향을 준 단 한 권의 책이 <공산당 선언>이었다 말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이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첫 출판 이후 157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맑스의 분석들이 여전히 자본주의의 현실을 제대로 설명하고 있다는 점이다. “부르주아지는 개인의 존엄을 교환가치로 녹여버렸고, 특허장으로 확인받은 파기할 수 없는 수많은 자유들을 단 하나의 파렴치한 자유―상거래의 자유―로 대체했다”(49p)는 말보다 우리 사회의 척박함을 더 날카롭게 묘사하는 말이 있는가?


“노동자들은 부르주아 계급, 부르주아 국가의 노예일 뿐만 아니라, 매일 매시간 기계와 감독자,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기가 일하는 공장을 운영하는 부르주아 공장주의 노예로 살아간다”(55p)고 맑스가 말할 때, 우리가 70년대 전태일이 일했던 봉제공장이나 지금 우리 주변의 외국인 노동자들이 일하는 노동환경을 즉시 떠올릴 수 있는 것은 어찌된 일인가?

노동자가 아무리 좋은 빌딩의 사무실에서 많은 월급을 받고 일한다 해도, 그는 결국 자본가의 말 한 마디에 바로 해고되어 노숙자가 될 수도 있는 ‘노예’ 상태 아닌가? 우리는 이런 상황을 이미 IMF때부터 지금까지 겪고 있지 않은가?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Eric Hobsbawm)이 이 책의 출판 150주년을 기념해 편집한 <공산당 선언> 서문에서 말하듯, 이 책이 분석한 현실은 오늘날 더욱 더 분명해지고 있고, 이런 점에서라도 이 책은 ‘고전’이라는 이름에 값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맑스, 엥겔스와 파리의 사회주의자들, 1844년.
맑스, 엥겔스와 파리의 사회주의자들, 1844년.그린비
<세계를 뒤흔든 공산당 선언>(유강은 역, 그린비, 2005)은 영국의 저널리스트인 데이비드 보일(David Boyle)이 <공산당 선언>의 원문과 함께 배경, 영향, 유산 등을 정리하여 2004년에 펴낸 책이다. 보일은 <공산당 선언>의 전후 사정을 아주 간결하고 친절하고 풍부하게 설명하고 있어서, 맑스, 엥겔스 혹은 <공산당 선언>을 들어보긴 했으되 어려울 것이라 지레 짐작하고 읽지 않은 독자들에게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특히 이 책에 실린 고병권의 해제 '오늘날의 <공산당 선언>'은 맑스주의가 가질 수 있는 함의가 얼마나 넓어질 수 있는지를 잘 설명해 주는 귀한 글이다.

2003년에 나온 황광우, 장석준의 <레즈를 위하여: 새롭게 읽는 공산당 선언>(실천문학사) 역시 권할 만하다. 노동운동가 황광우가 <공산당 선언>을 한국 현실과 함께 풀어내는 에세이들은 뜨겁고, <공산당 선언>의 번역 역시 매끄럽다.

2002년에 책세상 문고판으로 나온 이진우 역 <공산당 선언>에는 충분한 역주나 설명이 없어서 맑스를 모르는 이가 처음 읽기에는 부담스러울 수도 있다. 대신 이 판에는 <공산당 선언>의 초안이라고 할 수 있을 엥겔스의 교리문답 '공산주의의 원칙'이라는 글이 실려 있다.

소련의 몰락 이후, 자본주의는 이제 더 이상 경쟁자가 없다는 듯 야만적 신자유주의 행진을 멈추지 않고 있다.

소수의 자본가와 그들과 손잡은 권력자, 종교인들이 절대 다수의 민중을 억압하는 소위 20:80의 사회, 노동자들이 파업을 할 때마다 자본가와 국가가 나서서 탄압을 일삼는 사회, 자본주의가 마치 영원불멸의 제도인 양 교육시키고 이것을 부정하면 ‘국가보안법’으로 ‘빨갱이’를 만들어 감옥살이를 시키는 사회 ― 우리 사회에서 젊은이들이 <공산당 선언>을 다시 잡아야 하는 것은 지금 살고 있는 우리 사회의 모습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형태는 아니라는 희망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공산당 선언>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은 구체적인 분석이나 피 끓는 구호들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인간에 대한 믿음’, ‘더 나은 사회에 대한 희망’이다. 노동자들이 개, 돼지와도 같은 삶을 살았던 유럽의 현실을 목격한 맑스와 엥겔스는 바로 ‘인간애’와 ‘더 나은 사회’, ‘진정한 자유’와 같은 가치가 실현되는 정의로운 사회를 바랐던 뜨거운 가슴의 이십대 청년들이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단결”해야 할 “만국의 노동자”는 진정한 자유가 살아 숨쉬는 사회를 바라는 모든 청년, 학생, 노동자, 농민, 민중 전부다. <공산당 선언>을 읽자.

덧붙이는 글 | 문강형준님은 무크지 <모색> 편집위원이고, 홈페이지는 http://blog.naver.com/caujun.do 입니다.

덧붙이는 글 문강형준님은 무크지 <모색> 편집위원이고, 홈페이지는 http://blog.naver.com/caujun.do 입니다.

세계를 뒤흔든 공산당 선언

데이비드 보일 지음, 유강은 옮김,
그린비, 2005

이 책의 다른 기사

맑스는 여전히 불온하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유인촌의 문체부, 청소년은 건드리지 말았어야 했다 유인촌의 문체부, 청소년은 건드리지 말았어야 했다
  2. 2 "손님 이렇게 없을 줄은 몰랐다"는 사장, 그럼에도 17년차 "손님 이렇게 없을 줄은 몰랐다"는 사장, 그럼에도 17년차
  3. 3 한강 노벨문학상 수상에 '조선일보' 왜 이럴까 한강 노벨문학상 수상에 '조선일보' 왜 이럴까
  4. 4 "주변에 주식 투자로 5천만원 이상 번 사람 있나요?" "주변에 주식 투자로 5천만원 이상 번 사람 있나요?"
  5. 5 윤 대통령 측근에 이런 사람이... 대한민국의 불행입니다 윤 대통령 측근에 이런 사람이... 대한민국의 불행입니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