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녹색 피라미드 (55회)

등록 2005.03.24 10:56수정 2005.03.24 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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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서쪽 하늘에 노을이 걸려있었지만 이곳은 한밤처럼 컴컴한 골목이었다. 번화한 시내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았는데도 이곳 서탑 뒷골목은 이상할 정도로 더러웠다. 낙서 투성이의 낡은 벽, 쓰레기 더미, 연탄재, 기름 찌꺼기. 시커먼 길 옆 도랑에는 도시가 배설해 내는 온갖 오물이 고여 악취가 코를 찔렀다.

골목을 걸어가자 곳곳에서 우리말을 쉽게 들을 수 있었다. 이곳은 조선족이나 탈북자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때문에 이들을 상대로 한 값싼 여인숙이나 쪽방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노무일꾼으로 일하는 조선족들은 20평 밖에 안 되는 공간에 30명씩 콩나물처럼 빼곡이 끼어 살기도 했다.


그녀가 말한 낡은 건물은 골목을 몇 번이나 돌아 겨우 찾을 수 있었다. 캄캄한 골목길 끝의 후줄근한 2층집이었는데, 멀리서도 볼 수 있도록 투명한 기름종이에 쌓인 전등 한 알이 문 위에서 빛나고 있었다. 기름종이 전등갓에는 방을 세놓는다는 자오주라는 붉은 종이가 걸려있는 게 보였다. 2층으로 올라가 널빤지로 만든 문을 두드리자, 위쪽의 네모진 투시구가 열렸다.

"무슨 일이오?"
"소개를 받고 여길 찾아왔습니다만……."
"누구 소개로 왔다는 게요?"

김 경장이 채유정의 이름을 대자 그제야 문을 열어주었다. 노인의 표정은 날카로워 보였다. 붉게 충혈 된 흐릿한 눈과 불그스레한 얼굴, 흉터가 있는 뺨과 간교해 보이는 입매가 그를 경계하고 있는 듯 했다. 그 노인은 잠시 동안 김 경장을 살펴보다가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따라오시오."

복도는 좁았으며 흐릿한 전구 몇 개만이 켜져 있어 간신을 앞을 분간할 정도였다. 그 복도를 사이에 두고 수십 개가 넘는 방들이 나란히 붙어 있었다. 어둡고 습기 찬 복도를 걸을 때마다 나무 바닥에서 삐그덕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군데군데 나무 판자가 벗겨져 무너지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였다.


복도는 밖에서 볼 때와 달리 길게 보였으며 노인이 안내한 곳은 그 복도의 맨 끝 쪽에 있는 방이었다. 그 방 맞은편에는 비상구 용도로 쓰이는 출입문이 보였다. 공안이 들이닥치면 곧장 이문으로 빠져나가면 될 듯 싶었다. 채유정이 이것까지 고려하여 여기 방으로 예약해 놓은 것이다.

자신이 묶을 방 앞에 서자 김 경장이 주머니를 뒤적였다.


"요금이 어떻게 되죠?"
"그 아가씨가 미리 지불했소이다."

노인이 그렇게 말하고는 휙, 하고 가버렸다. 김 경장은 문을 열고 방안으로 들어섰다. 실내는 매우 낡고 어두워 보였고, 가구는 침대와 간이 탁자 하나가 놓인 게 전부였다. 창문도 얼굴만 겨우 내밀 정도로 좁아서 빛이 잘 들어오지 않았다. 그 창문에 두터운 커튼이 가려져 있었다.

김 경장은 방안의 공기가 너무 답답하여 커튼을 치고는 창문을 활짝 열어놓았다. 그러자 바깥의 소음이 그대로 쏟아져 들어왔다. 여인숙 바로 앞 골목에는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노동자 차림의 두 남자였는데, 그 중 한 명은 웃통을 벗어 부치고는 발길질을 하고 있었다. 그 기세에 밀린 상대편 남자가 바닥에 놓인 병을 깨어 손에 집어들었다. 자칫하면 큰 싸움이 벌어질 판이었다. 그러자 보다 못한 구경꾼들이 둘을 뜯어말리기 시작했다.

"이제 그만들 하라우!"

그들이 사용하는 말은 모두 우리말이었다. 아마 조선족이나 탈북자끼리 시비가 붙어 싸움이 벌어진 듯 싶었다. 이곳은 우리 나라의 작은 도시를 영락없이 옮겨놓은 형세였다. 촘촘히 앉은 가게와 식당들, 그리고 노래방이며 술집들은 모두 우리말 간판을 달고 있었다. 공안들도 그걸 감안해서 조선족에게 나름대로 자치권을 주는 듯 했다. 대대적인 단속이 있지 않는 한 여기 출입을 꺼려한다고 했다.

그게 자신의 안전을 보장해 줄지, 아니면 그들의 단속에 걸릴 확률이 더 많을지 분간이 서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여기 지리를 거의 모르는 그로서는 채유정의 도움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지금이라도 당장 공안에게 자수를 하면 한국으로 갈 수 있을 것이다. 입국하면 문책을 당하긴 하겠지만, 이런 고생은 하지 않아도 된다. 순간 편히 지니고 싶은 유혹을 억지로 참으며 윗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이건 단순한 사건이 아니다. 한 개인만의 사건이 아니며, 엄청난 음모가 숨어 있는 중요한 일이다. 만약 자신이 이 일에 손을 뗀다면, 모든 것이 그들의 손안에서만 움직일 것이다. 안 될 일이었다. 어쩌면 자신은 그들보다 더 어떤 진실에 가까이 다가선 지도 모른다. 그들이 자신을 노리고 쫓아내려고 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실은 암담했다. 확률 없는 기대를 빼고 나면 모든 것은 다시 원점이었다. 도대체 이 일을 어떻게 풀어야 할까? 바닥에 누운 채 몇 번이나 뒤척여봐도 핵심에 접근할 건덕지라곤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휴, 하는 한숨과 함께 스르르 눈이 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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