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 덕분에 산교육도 시키고 좋은 아빠도 되고

아들녀석과 함께 우즈베키스탄 축구경기를 보고 와서

등록 2005.03.31 12:48수정 2005.03.31 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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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수와 관중이 하나가 된, 대한민국이 하나가 된 감동의 도가니
선수와 관중이 하나가 된, 대한민국이 하나가 된 감동의 도가니김형태
어제는 모처럼 제가 좋은 아빠로 멋지게 용오름 하였습니다. 아들 녀석이 그렇게 가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던 상암 경기장을 찾아 대한민국 축구대표팀과 우즈베키스탄과의 월드컵 아시아지역 최종 예선전을 보고 왔기 때문입니다.


자기 반 친구 중 아빠와 함께 축구장을 다녀오지 않은 아이는 거의 없다는 초등학교 4학년짜리의 푸념이 아니더라도 한번은 이런 기회를 꼭 만들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동안은 인연이 닿지 않았습니다. 제가 시간이 되는 날은 아들 녀석이 아프든가 해서 안 되고, 아들 녀석이 되는 날은 제가 바빠서 안 되고, 한번인가는 둘 다 시간은 되는데, 표를 구하지 못한 적도 있었습니다.

2002년 월드컵 때는 아이가 같이 데리고 가달라는 것을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저만 시청 앞에 나가 거리 응원을 하고 온 일도 있어 아이에게 늘 빚진 마음이었습니다.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에게 한국팀을 응원하러 월드컵경기장에 가자고 했더니, 정말이냐며 뛸 듯이 기뻐합니다. 그 모습이 마치 화사한 봄꽃 같았습니다.

최선을 다해 뛰는 우리의 태극전사들
최선을 다해 뛰는 우리의 태극전사들김형태
지난 토요일, 처음으로 주5일제 수업으로 학교에 가지 않는 날이라 아이는 아빠에게 잔뜩 기대를 했던 모양인데, 공교롭게도 그날 저는 당직이라서 정상적으로 출근을 했습니다. 그리고 저녁에는 중학교 동창모임이 있어 거기에 갔다가 아이가 잠든 후에야 귀가했습니다.


다른 집 아빠들은 모처럼 아이들을 데리고 나름대로 계획에 세워 체험학습이니 테마여행을 했다는 아내의 소리에 괜스레 아이에게 고개를 들 수가 없었습니다. 마음은 이게 아닌데, 아닌데 어쩌다 자꾸만 아이에게 무심하고 무정한 아빠가 되어 가는지.

이런 나의 마음을 어떻게 알았는지, 아내는 1등석 표를 두 개 구해놓고 아이와 함께 다녀오라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저는 일복을 타고 나서 그런지 몹시 바쁘게 사는 사람입니다.


학교에서 아이들과 온종일 씨름하랴, 틈틈이 글(창작활동)쓰랴, 기사 작성하랴, 카페 관리하랴, 종교 활동, 문인모임에, 애경사까지 정말 몸이 열개라도 부족합니다.

내가 가족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닌데, 그럼에도 가족은 늘 우선순위에서 밀립니다. 아무래도 공기나 물처럼 가족은 늘 내 옆에서 있다는 생각 때문에 그런 모양입니다.

그래서 늘 아내와 아이들에게 미안합니다, 아내는 좋은 남편은 못 돼도 좋으니 좋은 아빠만은 되어달라고 합니다. 아내의 이런 말이 나를 포기했다는 말로 들리기도 하고, 나를 이해한다는 말로 들리기도 합니다.

경기장으로 밀물처럼 몰려드는 축구를 사랑하는 사람들, 이들이 있어 대한민국의 축구는 희망이 있다.
경기장으로 밀물처럼 몰려드는 축구를 사랑하는 사람들, 이들이 있어 대한민국의 축구는 희망이 있다.김형태
전철을 이용하여 합정역에서 6호선으로 갈아타는데, 밀려드는 인파로 그야말로 아들 녀석은 숨도 제대로 못 쉬는 콩나물이 될 뻔 했는데도 즐겁다고 했습니다.

월드컵 경기장의 위용과 자태, 그리고 거의 자리를 꽉 채운 관중을 보고도 놀라는 표정이었습니다. 아이가 좋아하는 모습을 보면서 진작 이렇게 해주지 못한 것이 미안할 따름이었습니다.

아이는 자기가 좋아하는 차두리, 박지성, 이동국 선수가 나오자 조금이라도 자세히 보려고 까치발에 토끼눈을 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슬그머니 망원경을 주자 박지성 선수의 여드름까지 보인다면 호들갑을 떨었습니다.

애국가가 울려퍼지자, 붉은 악마 응원단에서는 기다렸다는 듯이 대형 태극기의 꽃이 활짝 피었습니다.
애국가가 울려퍼지자, 붉은 악마 응원단에서는 기다렸다는 듯이 대형 태극기의 꽃이 활짝 피었습니다.김형태
드디어 경기가 시작되고 붉은 악마의 응원이 물결을 이루었지만 녀석은 쭈뼛쭈뼛할 뿐 꿔다 놓은 보리자루처럼 가만히 앉아서 경기를 지켜보기만 하였습니다. 나는 라디오 주파수를 맞추고 이어폰을 녀석의 귀에 꽂아주었습니다.

전반전 내내 우리 팀의 볼 점유율은 높았지만, 우즈베키스탄의 철저한 수비벽에 막혀 번번이 득점과는 연결이 되지 않았습니다.

전반전이 끝나도록 골을 터지지 않고 답답한 경기만 계속되자 아이는 기다림에 초조해졌는지 이제는 한 골 넣어야 한다면서 갑자기 붉은 악마를 따라 '대~한민국' 하며 소리도 지르고 박수도 치고 노래도 따라 부르면서 열띤 응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조금 지나 조용하다싶어 옆을 보았더니 눈을 감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졸리고 피곤해서 그런가 보다 했더니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 제발 우리 팀이 이기게 해주세요!"라고 간절히 기도를 올렸다는 것입니다.

어디서 들었는지 지난번 사우디 전에서 패배했기 때문에 이번에 지면 본프레레 감독도 어려워지고 선수들도 어려워질 거라 했습니다. 독일 월드컵 본선을 위해서는 오늘 반드시 이겨야 한다나요.

또한 독도 때문에 국민들 마음이 모두 아픈데 이럴 때 통쾌하게 이겨주면 얼마나 좋으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자기가 처음으로 경기장에 나와 직접 응원을 하는데 지면되겠느냐고, 꼭 이겨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했습니다.

마냥 어린아이인 줄 알았는데 아들 녀석은 어느새 제법 커 있었습니다.
저는 아이 녀석의 가슴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대한민국을 똑똑히 보았습니다.

드디어 '타는 목마름'으로 기다리던 골이 터지고...
드디어 '타는 목마름'으로 기다리던 골이 터지고...김형태
아들 녀석의 간절한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으셨을까? 후반 들어 박지성의 도움을 받은 이영표가 겨울을 밀어내고 올라오는 새싹처럼 시원스런 첫 골을 터뜨리더니 이윽고 후반 16분, 차두리의 패스를 받은 이동국의 멋진 발리슛이 골문으로 빨려 들어갔습니다.

경기장 안은 순식간에 축제 분위기로 바뀌었습니다. 모두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이동국! 이동국! 대~한민국!을 외치고 있었습니다. 이 맛에 사람들이 경기장을 찾는 모양입니다. 정말 짜릿짜릿 했습니다.

승리의 축제를 만끽하는 붉은 악마와 관중들...
승리의 축제를 만끽하는 붉은 악마와 관중들...김형태
아들 녀석도 어른들 틈에서 펄쩍펄쩍 뛰며 누구보다도 짜릿하게 승리의 감격을 맛보고 있었습니다. 저절로 아이 입에서 대~한민국이 터져 나오는 것을 보고 백번 나라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라고 가르치는 것보다 한번 경기장에 데리고 오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고, 이것이 바로 산교육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한 골을 허용하여 무척 아쉬웠지만, 그래도 우즈벡 입장에서 보면 위안이 될 듯하다.
한 골을 허용하여 무척 아쉬웠지만, 그래도 우즈벡 입장에서 보면 위안이 될 듯하다.김형태
전에 아이가 초등학교 입학하고 얼마 안 있어 지구본을 사달라고 해서 사준 적이 있었습니다. 그랬더니 지구본에 왜 우리나라는 없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잘 찾아보라고 했는데도 아이는 중국과 러시아, 그리고 미국은 있는데 우리나라는 없다는 것입니다.

중국과 일본 사이를 잘 찾아보라고 했더니, 순간 말이 없습니다. 우리나라가 너무 작아 실망했다는 것입니다. 그 지구본의 대한민국은 정말 어른이 보기에도 너무 작아 '대'는 서해에, '국'은 동해에 있었습니다.

우리나라는 비록 작지만 큰 나라라고 강조해서 말했지만 아이는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작은 고추가 맵다는 것을, 대한민국이 작지만 큰 나라라는 것을 확실하게 느낀 모양입니다.


아빠 말이 맞아, 우리나라 정말 대단해!

그래 괜히 강소국이겠니? 정말 대단하지!

경기가 모두 끝나고, 선수들의 땀이 배어있는 잔디구장를 배경으로 대한민국의 승리 V를 그려보았다.
경기가 모두 끝나고, 선수들의 땀이 배어있는 잔디구장를 배경으로 대한민국의 승리 V를 그려보았다.김형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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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포럼 <교육을바꾸는새힘>,<학교안전정책포럼> 대표(제8대 서울시 교육의원/전 서울학교안전공제회 이사장) "교육 때문에 고통스러운 대한민국을, 교육 덕분에 행복한 대한민국으로 만들어가요!" * 기사 제보 : riulkht@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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