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마뱀아, 너 포즈 좀 취할래?

개구리 짝짓기로 감악산 봄은 시작한다

등록 2005.04.03 23:22수정 2005.04.04 1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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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악산 작은 계곡 개울가에 버들개지가 피었다.
감악산 작은 계곡 개울가에 버들개지가 피었다.한성희
지난 겨울은 지루할 정도로 길었다. 남쪽에선 벌써 꽃소식이 온 지 오랜데 이곳 북쪽은 이제 기지개를 펴기 시작한다. 늦게 온 봄은 의무를 다하느라 다급해서 바쁘게 돌아다닌다. 그러나 기나 긴 겨울 끝에 너무 늦은 봄은 심한 우울증을 몰고 왔다.

일요일 오후, 오전의 급한 일을 끝내자 경기도 파주의 감악산 미타암으로 간다는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나도 갈래. 나도 데려가!"


감악산에 간다는 말에 오후 일정을 무시해버리고 나도 간다고 소리치자마자 밖으로 뛰어나갔다. 봄의 우울증에 시달리던 지난 며칠을 봄바람에 날리고 감악산의 봄을 느끼고 싶었다.

미타암이 있는 계곡에 얼음이 녹지 않은 채 물이 흐르고 있다.
미타암이 있는 계곡에 얼음이 녹지 않은 채 물이 흐르고 있다.한성희
파주시 적성면 최북단에 있는 감악산은 한수 이북의 오악 중 하나에 들어갈 정도로 명산이고, 파주시의 대표적인 아름다운 산이다. 설악산처럼 웅장한 맛은 없지만 아기자기 하면서도 오밀조밀한 바위와 계곡이 설악산 못지않을 정도로 예쁘다.

미타암은 감악산 북쪽 줄기에 있다. 아는 사람만 다니는 곳이라 사람이 없는 호젓한 미타암을 처음 간 것은 몇 해 전이었다. 미타암 계곡의 풍광에 반해서 그 밑에 있는 김 보살님 집에 들러서 토종닭 백숙과 손수 농사지은 배추와 고추로 만든 맛있는 김치를 먹고 산 공기를 쐴 겸 가끔 가곤 했는데 거의 1년 넘게 가보지 못했다.

속이 들여다보일 정도로 맑지만 손이 시려워 오래 담글 수 없다.
속이 들여다보일 정도로 맑지만 손이 시려워 오래 담글 수 없다.한성희
미타암에 가려면 객현리로 들어서서 산 밑자락 마을을 지나면 포장되지 않은 산길을 따라 올라가야 한다. 차가 덜컹대는 이 산길은 험해서 승용차는 갈 수도 없고 디젤 엔진 차라야 가능하다. 미타암 입구부터 입산금지 표시가 있지만 겨울이 지나도 길을 아는 등반객이나 지나갈 정도로 조용한 산 속이다.

50대 중반인 후덕한 아주머니인 김 보살은 보살이라 하지만 절에 몸담고 있는 것은 아니고 미타암과 이런 저런 연관이 있어서 그냥 보살이라 부르는 것뿐이다. 김 보살 집에 도착해보니 문이 잠겨 있어 차를 세우고 옆에 있는 계곡으로 내려갔다.


기묘한 포즈로 짝짓기 하는 개구리 한 쌍. 밑에 있는 암놈이 죽은 줄 알았다.
기묘한 포즈로 짝짓기 하는 개구리 한 쌍. 밑에 있는 암놈이 죽은 줄 알았다.한성희
감악산의 계곡은 봄이 늦다. 작은 계곡에 내려서자마자 개구리들이 후닥닥 물로 뛰어든다. 아직 그늘진 곳에는 얼음이 군데군데 남아 있어 낙엽이 가라앉은 맑은 물에 손을 넣어보니 따스한 햇볕이 내리쬐는 양지바른 계곡의 물도 얼음물처럼 이내 손이 시리다.

"엇! 이거 뭐지?"


죽은 듯이 다리를 쭉 뻗은 개구리 등 뒤에 목을 움켜쥐고 올라탄 검은 개구리가 찰싹 붙어 있다. 막대기로 물 속에 넣고 톡톡 건드려 봐도 다리를 뻗친 개구리는 미동도 않고 검정개구리만 다리를 움직인다. 막대기로 건드려도 올라탄 개구리는 죽어라 목을 쥐고 놓지 않는다.

죽은 놈을 빨아먹고 있나? 개구리가 개구리를 먹기도 하나? 이상하다싶어 계속 건드려도 죽은 척 미동도 않던 놈의 다리가 갑자기 조금 움직인다.

"아하! 이거 짝짓기 중이네."
"옆에도 있다. 얘들이 짝짓기 철을 맞았나보다."

이 개구리 한 쌍은 막대기로 건드리자 밑에 있는 암놈이 움직이며 낙엽 밑으로 숨었다.
이 개구리 한 쌍은 막대기로 건드리자 밑에 있는 암놈이 움직이며 낙엽 밑으로 숨었다.한성희
옆에 있는 한 쌍의 개구리 등에 붙어 있는 놈도 검정색인 걸로 봐서 개구리의 수놈은 검정색인 모양이다. 이 놈들은 옆의 놈들과 포즈가 다르다. 둘 다 다리를 오므린 전형적인 개구리 포즈로 짝짓기를 하고 있다가 막대로 건드려보자 밑에 있는 암놈이 폴짝 움직인다. 짝짓기도 각자 개성인지 가지가지 포즈네.

개구리 짝짓기 하는 건 처음 본다. 물 속을 들여다보니 올챙이 한 마리가 쏜살같이 낙엽 밑으로 숨어버린다. 작은 물고기도 더러 왔다 갔다 하는 것이 보인다.

노란 생강나무 꽃.
노란 생강나무 꽃.한성희
한참 개울 속을 들여다보다가 버들개지가 핀 계곡을 건너 산에 잠깐 올랐다. 아직 겨울의 그림자가 남아 있는 산에 생강나무 꽃이 피었다. 시간은 어김없이 흐르고 계절도 변함없이 돌아오고 있다. 샛노란 생강나무 꽃을 이곳에선 동백꽃이라 불렀다. 노란 동백꽃이 피면 봄이 온다는 신호였다.

길도 나지 않은 산을 조금 올라가니 진달래 꽃망울이 보인다. 올해 처음 보는 연분홍 진달래 꽃망울이다. 고개를 돌려보니 새끼손톱만한 크기의 이름 모를 연두색 벌레가 물오른 나뭇가지에 앉아 있다.

나무줄기 모세관에서 힘차게 펌프질하는 물소리가 산에 가득한 듯싶다. 땅이 풀린 봄의 감악산 나무마다 바쁜 삼투압 현상이 눈에 보이는 것 같다. 뿌리에서 물을 빨아올려 꽃과 잎을 피울 준비를 하는 나무들의 작업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감악산의 봄은 얼마나 시끄러울까.

따스한 봄 햇볕을 쪼이러 나왔다가 포즈를 취해준 도마뱀.
따스한 봄 햇볕을 쪼이러 나왔다가 포즈를 취해준 도마뱀.한성희
따스한 햇살 때문일까? 도마뱀이 일광욕을 나왔다가 인기척에 놀라서 이리저리 도망을 간다.

"사진 좀 찍게 너 좀 가만히 포즈 잡고 있을래?"

이 도마뱀, 말을 알아들었는지 도망가기를 단념하고 순순히 포즈를 취해준다. 이렇게 착할 수가. 말 잘 듣는 도마뱀이네. 이제부터 파충류라고 머리 나쁘다하지 않을게. 중얼중얼 대면서 셔터를 누른다. 됐다, 이제 너 가고 싶은 데로 가렴.

고개 돌려! 옳지! 고놈들 말 잘 듣네.
고개 돌려! 옳지! 고놈들 말 잘 듣네.한성희
개울을 건너 김 보살 집 마당에 다시 오르자 강아지 두 마리가 쫄랑쫄랑 마중을 나온다.

"너도 사진 좀 찍게 포즈 좀 잡을래? 이쪽 좀 봐라. 옳지, 옳지! 말도 잘 듣네."

쳐다보라는 말에 강아지 두 마리가 동시에 고개를 돌리고 나를 빤히 쳐다본다. 나른한 봄날과 귀여운 강아지는 정말 잘 어울리는 그림이다.

미타암 산신각이 바위 위에 얹혀 있다.
미타암 산신각이 바위 위에 얹혀 있다.한성희
이제 미타암을 보러 갈 차례다. 슬슬 길을 걸어 미타암으로 올라갔다. 미타암은 나에게 현공사를 연상케 해서 이곳에 오면 꼭 한 번 쳐다보고 간다. 정확하게는 미타암이 아니라 미타암 옆의 산신각이다. 커다란 바위 위에 지은 산신각은 보면 볼수록 신비함을 자아낸다.

언젠가 미타암을 들러서 이곳 주지 스님에게 차를 얻어 마신 적은 있지만 절에 들어가는 일은 거의 없다. 계곡을 건너자마자 있는 바위 위에 얹힌 퇴락한 산신각을 넌지시 올려다보며 감상하는 것이 내가 미타암을 보러 오는 이유의 전부다.

미타암 산신각.
미타암 산신각.한성희
바위의 생김새도 기묘하지만 그 위에 올라앉은 산신각은 더 신비해 보인다. 인적 드문 호젓한 산 속에 커다란 바위와 산신각이 옆에서 흐르는 계곡과 어울린다.

외출했다가 뒤늦게 돌아온 김 보살이 돌아왔다는 전화가 온다. 김 보살의 집에 잠시 들러 고로쇠 수액 한 잔을 얻어 마셨다.

"아이고오, 참말로 오랜만에 오셨네. 긍게 왜 그리 안오셨대잉?"

수다스러울 정도로 정이 뚝뚝 흐르는 김 보살은 인사를 몇 번이고 하면서도 바쁘게 냉장고를 뒤지며 이것도 함 들어보라며 우유에 수삼과 인삼 엑기스를 넣고 갈아 손수 만든 인삼음료를 따라준다.

이곳은 인삼 농사를 많이 짓는 곳이라 손수 재배한 인삼의 자투리를 갈아 만든 것이다. 쌉쌀하면서도 달콤한 인삼음료를 마시자 감악산의 봄을 보느라 거의 다 달아났던 봄의 우울증이 마저 물러가 버린다.

덜컥거리는 산길을 내려오자 길 옆에서 호랑나비 한 마리가 날아간다. 봄이라 나오긴 나온 모양이지만 아직 꽃이 안 피었는데 쟤들은 무얼 먹고 살지? 생강나무 꽃도 많이 피진 않았던데. 잠시 걱정하다 산을 다 내려오자 이내 나비는 잊어버린다.

나무든 풀이든 마음이든 산에 있는 것은 산에 두고 와야지. 어느새 임진강에 노을이 내려오려고 물결을 반짝이며 준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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