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체, 혹은 '근대'의 맹목들을 회의하기

크리스토퍼 노리스, <데리다> - "진지한" 데리다의 발견

등록 2005.04.10 01:20수정 2005.04.11 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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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노리스의 <데리다> 표지. 데리다의 해체는 모든 맹목에 도전하는 엄정한 성찰이다.

노리스의 <데리다> 표지. 데리다의 해체는 모든 맹목에 도전하는 엄정한 성찰이다. ⓒ 시공사

생전에 정치적 프로필이 모호하다고 비난받았던 데리다였지만, 동구권의 붕괴 이후 패배감에다 죽어가던 좌파 진영에게 회생의 계기를 준 것은 이 의외의 인물이었다.

동구권의 붕괴는 겨우 맑스를 읽는 다양한 방법 중 겨우 "하나"의 실패에 불과하다고 말했던 그의 발언을 도약대 삼아 맑스주의는 수많은 다른 "읽기"들을 선보이며 여러 변종으로 진화해갔던 것이다.


그가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그의 "해체"라는 방법론은 지배적인 담론과 규칙에 도전하고자 하는 모든 이들을 지원사격하며 역으로 그들로 하여금 그의 주가가 치솟는데 지원하게 만드는 묘한 매력이 있었다.

그러나 데리다 만큼 그의 주장은 이런 것이었다라고 정의하기 곤란하게 만드는 사람은 드물다. 우선 그의 생애나 그를 둘러싼 사회역사적 환경은 잊어버리자. 그는 텍스트 외부의 사실과 텍스트의 의미를 섣불리 연결시키는 것을 거부해왔으므로….(이런 의미에서 작년 10월, 타계와 함께 부쩍 빈번해진 그의 작업들의 의미를 재조명하려는 시도들을 그는 분명 불쾌해 했으리라.)

이미 그에게는 "데리다"나 "해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작업들이 한 곳에 설명되는 것 자체가 문제다. 그러나 이런 방법이 아니라면 그를 독자들에게 소개할 수 없다는 것도 문제가 아니겠는가. 필자는 양보를 구할 수밖에 없다. 누군가의 입장을 소개할 때 왜곡의 "불가피성"이라는 건 공평한 것이다. 그라고 예외일 수는 없다.

데리다의 저작들이 이미 많이 번역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노리스의 데리다는 그동안에 소개되었던 데리다에 대한 우리의 이미지와는 조금은 다른 면모를 가지고 있기에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그가 텍스트의 확정적이고 고정적인 의미를 거부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엄정한 사유방식과 개념적 비판을 거부하고 오로지 텍스트의 무제한적인 "자유놀이"를 숭상했다는 그에 대한 지적 불성실의 혐의, 그가 문학적 말장난을 일삼는 악동이라는 편견을 노리스는 반박하고자 한다.


해체론은 엄정한 사색의 작업이며 그를 백안시하는 영미학계의 분석적 전통에도 적합할 만한 진지한 문제로 제기될 수 있다는 것이 노리스의 주장이다.

구조의 필요에 의해 열등한 것으로 요청(가령 '말'과 대비되는 '문자', '남성'과 대비되는 '여성', '자연'과 대비되는 '문명')되지만 결국 그것이 구조를 지탱해주는 핵심임이 드러나면서 이항대립 자체를 흔들어버리는 "대리보충", 차이를 통해 의미를 만들어 내지만 의미는 결코 한번에 현전하지 않고 끊임없이 연기된다는 "차연", 언어와 표상의 제한된 경제를 무너뜨리고 고전적 이항대립을 넘어서는 쓰기로서의 "원문자" 등 우리에게도 유명한 그의 개념 아닌 개념들은 물론 플라톤 이래로 계속되어 왔던 음성언어 중심주의와 로고스 중심주의, 기원의 신화라는 철학의 맹목들을 흔드는 작업임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중심주의의 해체 위에서 의미의 확정 불가능성을 들어 다양한 의미와 해석을 찬양하는 것만이 해체론의 전부는 아니라고 노리스는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해체론은 모든 것에 대한 엄정한 탈신비화의 노력이다. 탈합리주의라는 편견과는 다르게 해체론의 확정적인 진리 개념을 계속해서 의문시하는 작업은 성찰하고 비판하는 것을 특징으로 하는 "이성"의 영역에 전형적으로 속하는 것이다.

철학의 근본 전제처럼 군림해오던 것들에 아무런 의심도 않았던 주류 철학자들보다 거기에 대해 근본적인 성찰과 문제제기를 해온 데리다는 그들보다 이성의 부름에 충실해온 것이 아닌가. 노리스는 이런 주장과 함께 데리다를 오히려 포스트모던 사상에 대한 도전으로 이해하며 칸트 이래의 계몽적 전통에 위치시킨다.

해체론에 대한 비판가들의 생각처럼 데리다가 어떠한 중심주의도 거부하는 것은 결코 지적 불성실의 산물이 아니다. 포스트모더니즘과 후기 구조주의의 중요한 개념적 자원을 제공하고 있는 데리다이지만 거기에 대한 편견과는 일정적인 거리를 두고 있으며 따라서 데리다에게 섣불리 비난의 딱지를 붙여서는 안된다는 것이 노리스의 저작이 말하는 바이다.

그런 견지에서 데리다에 대한 비난의 근거로 많이 인용되는 유명한 선언. "텍스트의 외부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말은 데리다가 정말로 텍스트만이 존재하는 유일한 것이라는 유아론에 빠졌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많은 사람들이 텍스트 외부의 사실(저자의 권리나 과거 철학의 전통, 저자의 생애나 저작이 쓰여지던 당시의 정황)을 들어 텍스트의 의미를 섣불리 확정하거나 뛰어넘어버리는 문제. 기존의 권위에 기대 거들먹거리며 텍스트 자체에 대한 분석을 게을리 하는 "지적 불성실"의 문제를 비판하고 싶었던 의도로 받아들여야 한다.

정신분석학과는 유사성을 보이면서도 "무의식"을 중심으로 의미를 확정하려 하는 라캉을 단호히 비판했고, 푸코나 들뢰즈처럼 광기나 정신분열자 등을 계기로 기존의 질서를 "초월"할 수 있다는 발상도 거부했던 데리다. 그러나 그가 그럼에도 여전히 후기 구조주의자로 혹은 탈근대론자로 불릴 수 있다면 구조의 균열을 발견해 그를 해체하고자 했고, 어떤 지적 맹목으로서의 "근대"에 도전했기 때문이리라.

해체론의 정치라는 것은 우리를 둘러싼 모든 지평에 대한 성찰과 문제제기이다. "근대"라는 맹목의 균열을 탐색하고 싶은가? 열심히 읽고 또 읽으며 의심하라. 지적 게으름은 용납될 수 없다. 노리스가 발견한 데리다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다.

데리다 - 시공 로고스 총서 8

크리스토퍼 노리스 지음, 이종인 옮김,
시공사,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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