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수군 당포해전에서 승리하다

이야기로 읽는 임진왜란 23

등록 2005.05.05 23:44수정 2005.05.06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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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이순신은 거북선의 돌격장에게 적선이 있는 곳으로 돌진하라 독려하여 일제히 천, 지, 현, 황 등 여러 종류의 화포를 쏘게 했다.

산과 언덕 밑 배를 지키는 일본군들도 총포를 비 퍼붓듯이 쏘았다. 간혹 조선인들도 섞여 쏘고 있었다.

이순신은 더욱 분전을 독려해 앞으로 배를 돌진토록 명하였다. 여러 장수들은 일제히 모여 장편전(長片箭), 피령전(皮翎箭), 화전(火箭) 천자, 지자 총통을 우레 같이 쏘아대었다. 이때 일본군이 쏜 조총의 탄환에 군관 나대용(羅大用)의 가슴에 맞았다.

계속 독전을 격려하던 이순신도 일본군이 쏜 조총의 탄환이 왼쪽 어깨 위에 맞았으나, 중상은 아니었다. 이순신은 팔에서 피가 흐름에도 계속 전투를 독려하였다. 활을 쏘던 조선 수군, 격군들도 일본군이 쏜 조총의 탄환을 맞은 사람이 많았다.

중위장 순천 부사 권준, 중부장 광양 현감 어영담, 전부장 방답 첨사 이순신(李純信) 후부장 흥양 현감 배흥립, 좌척후장 녹도 만호 정운 우척후장 사도 첨사 김완, 좌도별장 우후 이몽구 우별도장 여도 권관 김인영 한후장이며 전라좌수영 군관 고안책, 급제 송성, 참퇴장 이응화 적선을 드나들면서 왜선을 당파하였다. 김완은 적선에서 소녀를 구출하였다.

일본 수군이 물러났는데, 화살을 맞은 자를 헤아릴 수 없고, 달아나 높은 언덕에 진을 치고서 나와 싸울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날의 정황을 난중일기의 기록에서 다시 살펴보자.


5월 29일(양력 7월 8일) <무자> 맑다

우수사(이억기)가 오지 않으므로 홀로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새벽에 출항하여 곧장 노량에 이르니, 경상우수사 원균(元均)은 미리 약속한 곳에 와서 만나 그와 함께 상의했다.


왜적이 머물러 있는 곳을 물으니, 왜적들은 지금 사천선창에 있다고 한다. 곧 거기로 가보았더니 왜놈들은 벌써 뭍으로 올라 가서 산 봉우리에 진들 치고 배는 그 산 아래에 줄지어 매어 놓고 항전하는 태세가 재빨리 튼튼해졌다.

나는 장수들을 독려하여 일제히 달려 들며 화살을 비 퍼붓듯이 쏘고, 각종 총포들을 우레 같이 쏘아대니, 적들이 무서워서 물러나는데, 화살을 맞은 자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고, 왜적의 머리를 벤 것만도 많지만,

이 싸움에 군관 나대용(羅大用)이 탄환에 맞았고, 나도 왼쪽 어깨 위에 탄환을 맞아 등을 관통하였으나, 중상은 아니었다.

활꾼과 격군중에서 탄환을 맞은 사람이 또한 많았다. 적선 열세 척을 불 태워버리고 물러나 머물렀다.


이순신은 여러 전선에서 용감한 군사를 뽑아 육지로 진격 시켜 일본군을 칠 계획이었다. 날이 저물고 산 위의 덤풀과 나무가 무성하여 진격 작전을 포기하였다. 또 적의 목베는 것을 하지 말도록 하고, 소선 몇 척을 남겨두었다.

일본 수군의 전선을 끌어내어 섬멸할 계획을 세우고 밤을 이용하여 뱃머리를 돌려 사천 모자랑포(毛自郞捕)로 옮겨 진을 쳤다.

음력 6월 1일 새벽에 경상 우수사 원균이 이순신에게 말했다.

"어제 접전할 때, 짐짓 남겨 둔 적선 2척이 도망쳤는지를 알아볼 겸 화살에 맞아 죽은 왜놈의 목을 베겠노라."

이날 정오에 이순신은 배를 띄워 고성의 사량도의 뒷바다에 이르러 군사를 쉬게 하고 위로하면서 진을 치고 밤을 지냈다.

음력 2일 진시(辰時)에 '적선이 당포 선창에 정박하고 있다'는 첩보를 접하고 사시(巳時)에 그곳에 이르렀다. 당포에는 300여 명의 일본군들이 반은 성안에 들어가서 분탕질을 하고 수많은 일본군들이 성 밖의 요새에서 조총을 쏘아댔다.

일본군선은 판옥선 크기의 9처과 중소선을 합해 12척이 선창에 분박하고 있었다.

이 중에서 한 대선은 높이가 3, 4장 정도의 높은 층루가 우뚝 솟았고, 밖으로는 붉은 비단 휘장을 두르고 휘장의 사면에는 황(黃)자를 크게 써서 달아 놓아 펄럭거렸다. 그 속에 일본 장수는 붉은 일장을 세우고 조금도 두려워 하는 빛이 없었다.

조선 수군은 거북선으로 층루선(層樓船) 밑을 들이받으며 용의 입으로 현자 철환을 발사하고, 천, 지자 총통과 대장군전(大將軍箭, 천자총통에 사용하는 화살의 하나로 길이가 11척 9촌이고 원은 5촌이며, 무게는 50근이며 촉은 무쇠제로서 길이가 7촌이다)을 쏘아 깨뜨렸다.

거북선을 뒤따르던 여러 전선들도 철환과 화상을 교대로 발사하였다.

중위장 권준이 돌진하여 일본 장수를 향해 화살을 쏘아 맞추자, 사도 첨사 김완과 군관 흥양 보인 진무성(陳武晟)이 그의 머리를 베었다.

남은 일본군들도 겁내어 도망치다 철환과 화살에 맞아 여기 저기 넘어졌다. 모두 21척을 불살러버렸다.

여러 전선의 군사들이 그대로 상륙하여 끝까지 쫓아서 수색하여 적을 목을 배려고 하였다.

그때 탐망선(探望船)으로부터 급보를 접하였다.

"일본 대선 20여 척이 소선을 많이 거느리고 거제도로부터 돌아오고(來航) 하고 있다."

당포는 지형이 좁아서 교전을 치르기에 적당하지 않아서 바다 밖에서 요격할 예정으로 노를 재촉하여 깊고 넓은 바다로 나아갔다.

일본 전선들은 5리쯤 되는 거리에서 조선 수군의 전선을 보고 정신없이 도망치기 시작했다.

여러 조선 수군의 전선들이 뒤쫓다 날이 어두워져서 접전할 수 없어 진주 창신도(昌新島, 남해시 창선면)에서 배를 멈추고 밤을 지냈다.

이날 당포에서 접전할 때 우후 이몽구가 일본대장선을 수색하여 금부채를 찾아내 이순신에게 보냈다.

그 부채의 한쪽 중앙에 '6월 8일 수길( 六月 八日 秀吉)' 오른편에는 우시축전수(羽柴筑前守), 왼편에는 구정유구수전(龜井流求守殿)라고 써져 있었다.

실제로 이 부채는 히데요시가 1592년 가메이 고레노리(龜井玆短)에게 준 것이다.

음력 3일 새벽에 배를 띄워 추도(楸島)로 향하면서 그 근처의 섬들을 하루 종일 협공하며 수색하였다. 일본군의 자취도 없고 날이 저물어 고성 고둔포(古屯浦)에서 밤을 세웠다.

음력 4일 이른 아침에 당포 앞바다로 배를 옮겨 진을 치고, 탐망선으로 적을 동태를 탐망하였다. 사시(巳時)쯤 당포에 사는 토병 강탁(姜卓)이 산으로 피난갔다가 조선 수군으로 왔다. 그가 일본군의 통태를 아뢰었다.

"2일 당포에서 접전이 있은 뒤에 왜인들이 많이 죽은 그들의 머리를 베어 한 곳에 모아서 불사르고, 곧 육지로 향하면서 길에서 조선인을 만나도 살해할 생각도 못하고 통곡하면서 거제(巨濟)로 향했습니다."

여러 장수들은 이 말을 듣고 적선을 찾아야 함을 분명히 하고 곧 적이 있는 곳으로 배를 띄우려고 준비하였다.

이때 전라도 우수사 이억기가 전선 25척을 거느리고 왔다. 여러 전선의 장수와 군사들은 계속된 전투에 몸이 피곤했지만 응원군을 맞이하여 너무 기쁜 마머지 좋아서 몸을 부둥켜 않고 뛰었다.

이순신은 이억기와 함께 일본군을 쳐부술 방책을 토의하였다. 날이 저물어 함께 배를 띄워 거제와 고성의 경계인 착량(鑿梁)에 이르러 진을 치고 밤을 세웠다.

덧붙이는 글 | 다음에는 음력 5일 당항포 해전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덧붙이는 글 다음에는 음력 5일 당항포 해전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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