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줄까지 다 나눠주기 전에 절반 이상 답을 불러줬다. 청바지에 윗옷은 교복을 입고 있으니 교복자율화는 반쪽이던 시절이다.김용철
1학년 여름방학이 지나자 학생들은 도장 파는 기술에 달인이 되어 가고 있었다. 다들 노는 데는 일가견이 있는지라 여드름 덕지덕지 매단 사춘기 남학생들은 동네 여학생을 통해 제 짝 찾느라 줄대기 바빠 공부와는 담쌓고 지냈으니 성적이 형편이 없었다.
이성에 일찍 눈뜬 아이일수록 2학년으로 가면서 곤두박질을 치니 커닝이라는 부정 행위를 하지 않고서는 좋은 성적을 올릴 묘안이 없던 터라 선생님과 부모로부터 "니 아부지 뭐 하셔?" "그럴라믄 농사나 지어라. 써빠지게 학교 보내놨더니 이것을 공부라고 했냐?"며 치도곤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통지표가 집에 도착할 즈음엔 초긴장 상태에 들어간다.
더러는 학교를 마치기도 전에 집으로 도망가 우체부 아저씨가 우체통에 꽂기 전에 주머니에 넣는 게 상책이다. 농사일에 바쁜 어른들은 자식들 학교만 보냈을 뿐 성적표가 언제 오는지 까마득히 잊고 지내니 아이들은 손에 넣은 통지표에 장롱에서 아버지 도장을 꺼내 몰래 찍기도 하지만 여의치 않을 경우 스스로 해결책을 찾아야 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또 다른 부정행위다.
산에 친구들과 가서 도장나무로 쓸만한 단단한 고광나무 줄기를 잘라 가운데 심을 중심으로 두 쪽이나 네 쪽으로 나눠 끓는 물에 담갔다가 그늘에서 말려 사포로 몇 시간째 갈아서 목도장 크기로 다듬는다. 거금을 들여 연필 깎는 새 칼을 사서 손을 베어가며 아버지 이름을 똑바로 새겨 넣는다.
이도 아니면 도장 파는 데 재주가 남다른 아이에게 고구마 튀김을 무려 500원어치나 사주고 부탁을 하기도 했다. 행여 도장장이 일이 밀렸을 경우에는 손수 지우개를 똑 잘라 서투르게나마 직접 파서 인주 밥을 희미하게 묻혀 쓰윽 돌려 시늉을 내기도 한다. 때론 아이들은 정교하게 빨간 볼펜으로 도장을 그리고 주위에 인주를 한두 점을 찍어 성적표를 반납하곤 했다.
나라고 해서 이런 데서 자유로운 건 아니었다. 엄연히 친구들과 별 다를 바 없었던 터라 오를 땐 모르지만 성적이 형편이 없을 땐 갖은 꾀를 내어 도장을 파댔다. 한때는 도장포가 다 망할지 모르도록 대단한 실력을 발휘하기도 했으니 간혹 집안 어른들이 급히 도장이 필요하다면 막도장 몇 개는 앉은 자리에서 합법적으로 파드리기도 했다. 고교 졸업 때까지 간혹 써먹었다는 사실과 다른 꿍꿍이가 있었다는 건 당신들은 전혀 모르는 일이다.
"선생님, 29번에서 3번하고 35번에 2번이 잘 안 보입니다"
난 언제나 국, 영, 수 세 과목만 보면 성적이 말이 아니었다. 특히 학기 초엔 방학 동안 교과서 한 번 펴보지 않는 탓에 시골 중학교에서 평소 전체 4~5등 하던 것이 40등 후반대까지 곤두박질을 치곤 했다. 국어는 애초 타고난 재주가 있었지만 수학은 중학교에 가서야 나눗셈을 배웠기에 숫자 개념 자체가 없어 고전을 면치 못했다. 영어는 중학교 가서 단어장을 들고 다닌 적이 없어 생소하기 이를 데 없었기 때문이다.
전 과목을 치르는 중간고사와 기말고사 때는 타의 초종을 불허할 지경으로 본색을 드러내며 전교에서 3~4등을 거머쥐고 만다. 이때마다 내 곁에는 점수 사냥꾼 즉, 곁눈질의 대가, 목놀림이 자유로운 무척추동물, 다리를 내 책상 옆에 바짝 붙인 간덩이가 부은 아이, 토끼보다 더 큰 귀가 활짝 열린 친구, 양심의 가책을 이틀간은 묻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나와 친해 보려는 아이들로 가득했다.
내가 남의 것을 훔쳐 보지 않고서 공부에 흥미를 잃어 버린 불쌍한 이들에게 다만 보여 주기만 하는데 무슨 문제가 있을까 보냐며 죄책감은 그리 크지 않았다. 단지 한 가지 걸리는 건 내 주위에 앉아 있는 아이들은 특혜를 보고 다른 아이들은 혜택으로부터 멀다는 생각뿐이었다.
이틀간은 여느 시험 때와 마찬가지로 분단 사이 열을 없애고 낱개로 최대로 멀찌감치 떼어져 있다. 선생님께서는 시험지와 채점하기 좋도록 작게 만든 답안지를 키 순서대로 나눠주고 다음 줄로 건너가신다.
아이들보다 내가 더 마음이 조급해졌다. '아이 왜 저리 늦게 나눠 주는 거야.' 18번이라 두 번째 줄에 앉은 나에게 시험지가 도착하자 펜으로 체크 않고 작은 목소리로 번호를 연달아 부르기 시작했다.
"2번, 3번, 1번, 3번, 4번, 1번, 또 1번……."
선생님이 여덟째 줄까지 나눠 주는 동안 주변에 앉아 있던 앞뒤로 각 2명, 좌로 2명, 우로 1명에 사정권에 든 6명을 포함하여 도합 13명은 내 숨소리까지 받아 적고 있었다.
시험지를 나눠 주느라 선생님은 감독할 겨를도 없다. 아이들이 무슨 짓을 하는지는 안중에도 없다. 아이들이 웅성웅성한 틈을 타 우리는 대단한 작전을 감행하고 있는 중이었다.
첫줄과 둘째 줄은 시험 문제지에 바로 (V)표를 하고 시험지가 늦게 도착한 다음 줄은 책상 위에 번호를 적고 있다. 선생님께서 끝줄까지 시험지와 답안지를 다 나눠 주시기도 전에 40문제 중 22번까지 정답을 불러주고 말았다.
이제 한숨 돌리고 다음 작전에 들어가야 한다. 주위에 몰려 있지 않은 아이들에 대한 최소한의 서비스다.
"선생님, 29번에서 3번하고 35번에 2번이 잘 안 보입니다."
"잠깐만…. 그랴, 등사기에 요즘 문제가 생겼다. 잉크가 또렷하게 안 나왔네."
"째까 번졌는데 제가 한번 불러볼까요?"
"그려."
"29번은 감나무 접붙이기인데요 3번은 깎기접이구요, 35번은 2번이 정답인 것 같은데 정확하지가 않습니다."
"욘녀러 새끼!"
"야, 규환아. 그거 아냠마 3번이야."
"그래? 이따가 보자."
더 이상 주위 아이들에게 공개적으로 불러줄 수 없어 그 동안 점만 찍어 놓았던 문제를 다시 풀어나가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시험이라고 하기 거북할 정도로 너무나 자연스럽게 반은 서서 보고, 어깨 너머로 들여다 본다. 한 다리를 내 발에 바짝 붙여 마치 자기 것인 양 한다. 어깨를 짚는 아이까지 있다.
나머지를 다 풀고 나자 40분이 남았다. 수학과 과학, 영어 빼고 농업이나 도덕, 미술 등 암기과목은 시험 시간 50분이 너무 길기만 했다. 시험지와 답안지를 덮어 두고 다음 시간을 위해 엎드려 잠을 청하려고 하는데도 하이에나들은 나를 가만 두질 않는다.
모기가 지껄이듯,
"야, 색꺄. 너 혼자 다 풀었다고 자면 어떡해?"
"야 이제 좀 쉬자 쉬어."
"시험지는 펴놓아야지, 임마."
"징한 놈들이구만…. 알았다 알았어."
보여 준다고 달걀 프라이 넣은 도시락 한번 꺼내 준 적 없는 아이들이다. 과자나 아이스크림을 사 준 일도 없었다. 우리 반 아이들은 누구나 다 아는 비밀스럽지 않은 비밀이었을 뿐이었다. 무사히 4교시 농업 시험을 치렀다. 반 평균 85점에 육박할 성싶게 시험이 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