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라일락꽃 그늘 아래 - 53회 (검은빛 바다 위 밤배)

첫사랑은 아픈 거예요

등록 2005.05.23 14:04수정 2005.05.23 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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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선화 / 그림 : 이정남 화백
수선화 / 그림 : 이정남 화백

7월 1일. 늦잠을 잤다. 8시 20분까지 출근인데, 일어나 보니 벌써 7시 30분이었다. 어젯밤에 알람시계를 맞추어 놓는다는 것을 깜빡한 모양이다. 일단 화장실로 들어가 정신없이 씻었다. 그러다가 그만 무명지에 끼워져 있던 은반지가 빠져버리고 말았다.

"땡그르르르-----"
은반지는 그렇게 투명한 소리를 내더니 수채 구멍 사이로 쏙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 찾아내려 용을 써보았지만 결국 허사였다.


초희와 만난 지 100일이 되던 날, 기념으로 나누어 끼었던 가락지였다. 목걸이, 사진, 편지 등 그녀와 관련된 물건 어느 하나도 버린 것이 없지만, 그러나 그것들은 모두 그 동안 서랍 속에서 잠자고 있었다. 유일하게 내 몸에 붙어 그녀처럼 늘 새하얗게 미소를 짓던 은반지였는데 잃어버리고 나니, 그렇게 허전할 수가 없었다.

시간에 쫓겨 할 수 없이 나중에 찾기로 하고 그냥 욕실을 나와 아침도 거른 채 현관문을 향해 뛰어나갔다. 신발을 신다가 생각하니 상자를 가져간다는 것을 깜빡 하고 있음을 알았다.

얼른 나의 방으로 뛰어 들어가 상자를 가지고 나왔다. 집밖에 나서니 비가 내리고 있었다. 벌써 일주일째 계속되는 장맛비였다. 지칠 줄 모르고 쏟아지는 빗줄기… 사람들은 하늘에 구멍이라도 났나보다 라고 말했다.

나는 노진에게 미리 연락하지도 않고, 4교시 수업이 끝나기가 무섭게 강남에 있는 그의 병원으로 찾아갔다.

"네가 웬일이냐? 연락도 없이 여기까지 왕림을 다하고. 강남땅은 아예 밟으려고 하지도 않더니…."


그는 내가 갑자기 들이닥치자 놀라며 그렇게 말했다.

"여러 소리하지 말고 빨리 나가자."


"나, 아직 일 안 끝났어. 왜 이래? 무슨 일인데?"

내가 재촉하자 그가 그렇게 되물었다.

"친구를 위해 하루쯤 시간을 내라. 그리고 내가 제수씨한테는 말해 놓을게. 너 하루만 빌린다고. 아마 얼마든지 그렇게 하라고 할 걸."

"대관절 무슨 일이야?"

"야, 그리고 오늘은 토요일이잖아. 그만 일 끝내도 되지 뭘. 너 돈 다 벌어서 뭐 하려고 그래. 갈 때 싸 짊어지고라도 갈래?"

그가 자꾸 이유를 물었지만 나는 대답 대신 그렇게 말했다.

"하! 뭐가 뭔지 통 모르겠군. 꼭 귀신에 홀린 기분이다. 이거"

"아무래도 좋다. 빨리 가자!"

"어디를 가는데?"

"가보면 알아."

"그래도 최소한 행선지는 알아야 될 것 아냐?"

"아따, 그 녀석 참 말 많네. 너 말이 별로 없는 편인 줄 알았더니 언제부터 이렇게 말이 많아졌냐. 의사 되더니 진료를 입으로만 하냐?"

나는 그렇게 노진을 끌다시피 하며 1층 내 차가 서있는 곳까지 데리고 내려왔다.

"뭐해, 빨리 타지 않고!"

"그럼 내 차는 어떻게 하고?"

"어떻게 하긴 그냥 여기에 두고 가면 되지. 설마 누가 와서 가져가겠냐."

나는 그렇게 납치하듯 노진을 내 차에 태워 남부 순환도로를 거쳐 서부 간선도로로 진입, 서해안 고속도로로 접어들었다, 양이 적어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비는 내리고 있었다.

어느덧 우리는 아산만 방조제 앞에 다다랐다. 일주일 전에 나 혼자서 왔던 곳이다. 노진은 처음에는 어디를 가느냐고 캐묻더니 내가 무조건 가보면 안다는 똑같은 대답만 되풀이하니까 이제는 지쳤는지 묻는 것을 포기하고 창 밖만 내다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가끔씩 나한테 운전 살살 하라며 잔소리를 하였다. 나는 죽어도 몸뚱이 하나뿐이니 큰 일 날 것이 없지만 저는 처자식이 딸린 몸이라서 사고 나면 큰일이라나.

나는 일주일 전 그 장소쯤에다 차를 세웠다.

"내려, 빨리! 그리고 이쪽 운전석으로 와. 어서! 그리고 지금부터 네가 운전하는 거다."

"뭐야, 나더러 운전하라고? 나 남의 차 운전 잘못하는데. 이거 그리고 수동이잖아. 야, 요즘 손으로 기어 넣는 차를 타고 다니는 사람이 어디 있냐. 다 자동이지."

"그래 나는 가난해서 수동을 고집 한다 왜 보태준 거 있냐? 잔 말 말고 빨리 이쪽으로 와서 운전해."

내가 운전석 쪽 문을 열고 내리려는데 그가 자꾸 대거리를 해댔다.

"나 수동은 잘 못한다니까."

"너 자동으로 운전 면허증 땄냐? 수동으로 땄잖아. 그런데 왜 수동으로 변속하는 차 운전을 못해. 너도 전에는 수동변속 차타고 다녔잖아. 천천히 가도 되니까 기억을 더듬어 한번 운전해봐. 길은 내가 안내할 테니까."

내가 그렇게 말하며 우산을 펴고 차에서 내렸다.

"아이고, 완전히 공갈 협박이구나. 사고 나면 나 모른다. 네가 다 책임져야 해."

"그래, 내가 다 책임질 게. 녀석 덩치에 걸맞지 않게 겁먹기는…."

"야, 잠깐 소변 좀 누고 가자. 네가 하도 서두르는 바람에 화장실도 못 다녀왔잖아. 그런데 여기 화장실이 없는 것 같은데 어디 가서 볼일을 보지."

"그냥 아무데 가서 누고 와."

"너 지금 나더러 노상방뇨를 하라는 거야."

"싫으면 그냥 휴게실 나올 때까지 참든지. 왜 급해? 그러면 비도 오는데 차 옆쪽 에서 살살 실례를 하든지."

나는 그를 운전석 쪽으로 밀고 대신 내가 조수석에 앉으며 그렇게 말했다.

"너 학교 선생님 맞냐? 노상방뇨를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게. 됐다 그냥 가자. 그런데 정말 여기부터 왜 내가 운전을 해야 되는데? 그거나 알고 가자."

운전석 쪽으로 마지못해 앉으면서 그가 그렇게 말했다.

"아, 그 녀석 말 많네. 그래 알려 줄게. 너 내일이 무슨 날인지 알아?"

"글쎄, 내일 내일이라. 내일이 일요일인 거 말고는…."

그는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렇게 말했다.

"내일이 초희가 떠난 날이잖아."

"아, 이런! 그렇구나. 그래서, 너 지금 어디 가자고? 대전? 천수만?"

"글쎄, 어디로 갈까? 아무래도 천수만이 낫겠지?"

"그거야 너 좋은 대로… 어디로 가든 나야… 그런데 왜 네가 운전하면 안 되고 꼭 내가 운전을 해야 되는데?"

그는 여전히 의문이 풀리지 않았다는 듯 다시 내게 물어왔다.

"이상하게 이곳 아산방조제가 마치 휴전선이라도 되는 것처럼 나는 이 길을 도저히 못 건너가겠어. 지난주에도 왔다가 돌아갔잖아. 그래서 너를 데려온 거야. 혼자서는 용기가 나질 않아서. 미안하다 너한테 미리 양해도 구하지 않고 이렇게 동행시켜서"

"야, 여기까지 데려다 놓고 이제와 그런 말하면 무슨 소용이 있냐. 좋다 까짓것 가자! 기꺼이 가주마. 간 김에 대천 앞 바다도 보고 오자 한철인 녀석이 잘 있는 지."

노진이 이제야 명랑한 기분으로 돌아와 조심조심 초보 운전하듯 차를 몬다. 드디어 아산 방조제를 건넜다.



* 독자 여러분의 사랑에 감사합니다. 54회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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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포럼 <교육을바꾸는새힘>,<학교안전정책포럼> 대표(제8대 서울시 교육의원/전 서울학교안전공제회 이사장) "교육 때문에 고통스러운 대한민국을, 교육 덕분에 행복한 대한민국으로 만들어가요!" * 기사 제보 : riulkht@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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