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라일락꽃 그늘 아래 - 54회 (검은빛 바다 위 밤배)

첫사랑은 아픈 거예요

등록 2005.05.30 10:15수정 2005.05.30 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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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련·그림 : 이정남 화백
수련·그림 : 이정남 화백이정남
여기부터는 충남 땅이다. 그녀와의 추억으로 온통 물들어 있는 곳. 실로 얼마만에 밟아보는 땅인가! 감개가 무량하다는 표현을 이럴 때 쓰는가? 나는 감전이라도 된 것처럼 온몸이 찌릿찌릿했다.

천안, 공주, 논산, 대전, 금산, 홍성, 대천, 서산…. 오다보니 이런 교통 표지판의 글씨들이 내 두 동공 속으로 달려들고 있었다. 마치 어렸을 적 눈 오는 날 운동장에 나가 하늘을 쳐다보고 있으면 하얀 눈송이가 내 눈으로 빨려들 듯.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런 지명들이 무척 낯설게 느껴졌다는 점이다. 반갑다고, 참으로 오랜만이라고 악수하듯 달려드는 저 지명들이 왜 낯설게 느껴지는 것일까? 단순히 세월 탓일까? 아니면 또 다른 이유가 있는 걸까?

천수만에 거의 이르렀을 때 노진이 갑자기 차를 세웠다. 내가 왜 그러느냐고 묻자 그가 대답했다.

"초희를 만나러 가면서 어떻게 빈손으로 가냐? 꽃이라도 한 송이 준비해야지. 안 그래?"

녀석의 생각이 기특했다. 나는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미리 이곳에 온다고 귀뜸이라도 했으면 좀 더 근사한 것으로 준비할 텐데."


노진은 아쉬움을 그렇게 표현했다. 문을 열고 화원에 들어서자 주인보다 꽃향기가 먼저 인사를 했다. 이것은 장미꽃 향기, 이것은 백합꽃 향기 이것은 초롱꽃 향기, 이것은 흑난초 향기…. 이렇게 내가 눈을 감은 채 꽃내음에 취해 있는데, 주인으로 보이는 아가씨가 "어서 오세요!" 하며 우리를 맞이한다. 그때서야 눈을 뜨고 가게 안을 둘러보니 꽃집의 규모에 비해 없는 꽃이 없을 정도로 꽃들이 많았다.

"국화 없어요? 흰색으로."


노진이 흰 국화를 사려는지 그렇게 물었다.

"왜 없어요. 이쪽 구석에 있잖아요."

주인 아가씨가 가리키는 곳을 보니, 정말 흰 국화가 소복을 입고 있는 청상의 여인처럼 한쪽 구석에 웅크린 채 울고 있었다. 그 모습이 아름답다기보다는 청승스럽게 느껴졌다.

"촉촉이 젖었네요?"

"물을 좀 뿌렸더니 그래요. 그래도 이 정도면 싱싱한 거예요. 여름이라서 국화는 아직 귀하거든요."

노진이 묻자 아가씨가 그렇게 대답했다.

"약간 시들긴 했지만 그래도 사야지 뭐. 선택의 여지가 없잖아?"

노진은 나에게 동의라도 구하듯 그렇게 말했다.

"노진아, 사지마. 약간 시들어서가 아니고 이건 죽은 사람에게나 바치는 꽃이잖아. 초희는 죽지 않았어. 살아 있다구. 내 마음 속에 이렇게 숨쉬고 있고 또 천수만에서 오롯하게 호흡하고 있을 거야. 아가씨, 장미로 주세요. 그것도 아주 새빨간 장미로."

"몇 송이나 드릴까요?"

"초희의 나이가 스물 두 살이니까 스물 두 송이 주세요. 그리고 안개꽃을 서른 여덟 개 주세요."

"안개꽃으로 서른 여덟 개요?"

"네, 제 나이가 서른 여덟이거든요."

"아니, 그게 아니고 꽃으로 서른 여덟 개예요? 아니면 가지로 서른 여덟 개예요?"

"글쎄요, 좋을 대로 주세요."

"그럼, 가지로 드릴 게요. 솔직히 안개꽃은 헤아리기가 어렵거든요."

"좋을 대로 하세요."

내가 하는 행동을 의아스럽게 지켜보던 노진도 한 마디 했다.

"나도 뭘 하나 사야지. 그냥 갈 순 없잖아. 뭐가 좋을까? 어, 여기 백합이 좋겠네. 철민아, 백합은 괜찮겠지?"

노진이 허락을 받듯 그렇게 내게 물어왔다.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가 백합을 주문했다.

"아가씨, 이 백합꽃 열 다섯 송이만 주세요."

"손님은 왜 열 다섯 송이에요?"

궁금하다는 듯 아가씨가 노진에게 물었다.

"아, 십 오년만에 여기에 왔거든요."

"네, 그러세요."

노진과 나는 그렇게 꽃을 사 가지고 나왔다. 나오다가 나는 생각난 것이 있어서 도로 들어가 아가씨에게 물었다.

"혹시 라일락꽃은 없나요?"

"생화 말씀하시는 거죠. 생화는 없고 말린 것은 있는데…."

"말린 것이라구요? 그거라도 있으면 주세요."

그녀는 책상의 서랍을 뒤지더니 책 한 권을 꺼냈다. 그리고는 그 책을 펼쳤다. 그 곳에는 라일락 꽃잎이 책갈피처럼 길게 누워 있었다.

"이것은 서비스로 그냥 드릴 게요. 지난달에 요 앞에서 제가 꺾은 거예요. 하도 향기가 좋아서. 아직 향이 남아 있을 거예요. 그리고 혹시 이파리가 필요하시면 저기 보이는 저 나무가 라일락이거든요. 몇 잎 따 가세요."

그녀는 화원 왼편에 있는 키 작은 나무를 가리키면서 그렇게 말했다. 나는 그녀가 가리킨 나무에게로 가서 잎사귀 몇 장을 얻었다.

갈팡질팡,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내가 그토록 오고 싶어 했던 꿈속의 공간! 천수만에 도착했다. 초희의 유골이 가루가 되어 숨쉬고 있는 곳 천수만! 그녀가 떠나가던 그날도 오늘처럼 이렇게 비가 내렸다.

바다는 온몸으로 울면서 나를 맞아주고 있었다. 때때로 내가 서 있는 발밑에까지 와서 반갑다며 소리를 질러댔다. 하얀 이를 부끄럼 없이 드러내며. 비를 맞고 있는 천수만을 보고 있으려니 예전에 초희가 우리 집 앞에서 하염없이 비를 맞고 서 있던 모습이 자꾸만 클로즈업되어 마음이 아팠다.

시간상으로 저녁 무렵이니 비가 오지 않았다면 지금쯤 바다는 온통 붉은 노을에 몸을 맡긴 채 한 떨기 물꽃을 피워내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 바다의 살결은 짙은 회색빛이었다.

"어디서 작은 배 한 척 구할 수 없을까?"

나는 그녀가 호흡하고 있는 더 깊은 곳까지 가보고 싶어 옆에 있는 노진에게 그렇게 물었다.

"아마 어려울 거야. 궂은 날씨 때문에 바다로 나갔던 배들도 모두 돌아오는 판국에 누가 지금 배를 띄우려고 하겠어."

"초희를 떠나보내던 그 날처럼 그녀 곁으로 좀 더 가까이 가보고 싶어서 그래. 왠지 그러면 그녀의 숨결이 느껴질 것만 같아서."

"악천우 때문에 안돼. 그냥 오늘은 이렇게 바라만 보고 다음에 날씨 좋은 날 다시 와서 그렇게 하자."

노진은 나를 위로하듯 그렇게 말하고는 바다 쪽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그리고 그녀에게 소리를 내어 말을 걸었다.

"초희씨, 그동안 잘 있었어요? 우리가 왔어요. 저하고 철민이가 왔다구요. 우릴 알아보겠어요. 내 목소리가 들리냐구요. 자주 오지 못해서 너무 미안해요. 앞으로는 철민이하고 자주 올게요. 여기 초희씨 좋아하는 백합을 한 다발 사왔거든요. 예쁜지 한 번 보시고 그리고 향기도 한 번 맡아 보세요."

그는 그렇게 초희에게 인사를 하고는 백합을 힘껏 던졌다. 백합을 받은 천수만은 더욱 심하게 몸을 흔들고 있었다.

"너도 가서 말을 건네 봐. 네 목소리를 얼마나 듣고 싶었겠어."

나는 노진에게 떠밀려서 바다 쪽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그러자 파도가 반갑다며 내 신발 안으로 들어왔다. 여기만 오면 할 말이 많을 것 같았는데, 정말 가슴 깊숙이 묻어 두었던 얘기를 다하고 싶었는데, 정작 말을 하려니 말이 나오지 않았다. 내가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처럼. 그저 바다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역시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처럼.

"초희야! 하고 한 번 크게 불러봐. 널 얼마나 기다렸겠어. 그리고 가져온 이 꽃들도 좀 안겨 주고…."

노진의 재촉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녀를 불러볼 용기가 나질 않았다. 그냥 맥없이 털썩 주저앉아서는 노진이 가져다 준 장미꽃과 안개꽃을 살며시 물결 위에 올려놓았다. 꽃들은 나에게로 왔다가 바다로 갔다가 그러면서 그네를 타고 있었다. 나는 한참을 우두커니 그렇게 있다가 드디어 말을 했다. 입술이 아닌 마음으로.

덧붙이는 글 | * 독자 여러분의 관심과 사랑에 감사 드립니다. 다음 마지막회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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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포럼 <교육을바꾸는새힘>,<학교안전정책포럼> 대표(제8대 서울시 교육의원/전 서울학교안전공제회 이사장) "교육 때문에 고통스러운 대한민국을, 교육 덕분에 행복한 대한민국으로 만들어가요!" * 기사 제보 : riulkht@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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