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직상승의 욕망만으로는 위험하다

영어 선생이 '자작시'로 국어수업을 한 사연

등록 2005.06.01 21:59수정 2005.06.02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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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보충수업을 하기 위해 교실로 들어서는데 아이들이 마치 번지수를 잘못 찾아온 사람을 바라보듯 나를 바라보는 것이었다. 아이들의 책상 위에도 낯익은 영어책이 아닌 다른 책이 놓여 있었다. 잠깐 멍하게 서 있는 나에게 한 아이가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 오늘 국어시간인데요."

평소에도 머리 회전이 늦은 편인 나는 한참 지난 뒤에야 지난 주 국어선생님과 시간을 바꾸어 수업을 한 사실이 생각났다. 이번 주는 원래의 순서대로 수업을 하면 되는데 그만 혼동을 한 것이었다. 국어선생님도 나처럼 착각을 했는지 꽤 시간이 지났는데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어떻게 한담!

"선생님, 오늘 그냥 한 시간 놀아요."
"놀다니? 그럴 순 없고, 오늘 선생님이 국어수업 한 번 해볼까?"

농담 삼아 던져본 말인데 말을 해놓고 보니 정말 그래볼까 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이었다. 아이들도 내가 시를 쓴다는 것을 알고 있던 터여서 그런 제안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는 듯했다. 한 아이가 이렇게 나의 용맹심을 부추겨주기도 했다.

"선생님 시로 수업해요."
"내 시로? 그럴까?"

영어 교사가 팝송도 아닌 모국어로 된 시로 수업을 한다? 어쩌다 영어선생이 되었지만 국어선생님이 되는 것이 꿈이었던 나로서는 생각만 해도 가슴이 설레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썩 내키는 제안은 아니었다. 요즘 아이들에게 시를 한 편 읽어주는 것이 얼마나 고된 일인지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한 시간 내내 시로 수업을 한다?

그런데 뜻밖에도 나를 바라보는 아이들의 눈빛엔 호기심이 묻어 있었다. 그 중에는 도서관에서 자주 만나는 아이들도 있었고, 이런 저런 인연으로 나와 좋은 인간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아이들도 더러 눈에 띄었다. 나는 용기백배하여 컴퓨터를 켠 뒤 인터넷 문학 카페에 올라 있는 자작시를 모니터에 띄웠다.


그날 아이들에게 소개한 시는 두 편 모두 내가 사는 주거공간인 아파트와 관련이 있는 것이었다. 시가 우리의 일상과는 동떨어진 어떤 초월적 세계를 다루는 것으로 착각할 수도 있는 아이들에게 시에 대한 오해를 먼저 풀어주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시를 감상하기 전에 칠판에 간단한 그림을 그려놓고 이렇게 입을 열었다.

"퇴근길이었는데 아파트 벽면에 이삿짐센터의 고공사다리가 세워져 있는 것을 보았어요. 고공사다리는 이렇게 거의 수직으로 하늘을 향해 우뚝 세워져 있지요.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짐을 나를 수 없지요. 이 수평 받침대가 왔다 갔다 하면서 짐을 나르게 되지요. 만약 이 수평받침대가 고장이라도 난다면 큰일이지요. 엄청난 재앙이 올 수도 있겠지요. 바로 그 점 때문에 우두커니 서서 고공사다리를 쳐다보고 있었는데 바로 그때 시가 찾아온 거예요. 이제 시를 한 번 읽어볼까요?"


아파트 벽면에 길게 세워진
고공사다리를 볼 때마다
수직을 오르내리는
수평 받침대에
눈길이 가곤 하지.

한 조각의
저 수평이 없다면
수직의 상승만으로는
냄비 하나도
들어올릴 수 없지.

하늘을 찌를 듯한
아스라한 높이를 오르내리는
최신식 현대장비라도
수평이 무너지면
끝장나는 거지.

위에서나 아래에서나
한 평 남짓한
저 평평함이 없다면
바닥이 없다면
아무 쓸모가 없지.

저, 한 평의 평화가 없다면.

- 시, '고공사다리' 모두


"어때요? 선생님이 이 시에서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지요?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직접 말하지는 않았어요. 그것이 시의 특성이기도 해요. 시에서 어떤 주장을 직접 해버리면 시의 맛이 떨어지지요. 그래서 고공사다리와 거기에 붙어 있는 작은 수평받침대가 대신 말하도록 했지요. 다만, 이 시에는 선생님의 평소 생각이나 사상 같은 것이 반영되어 있어요. 그것을 작가의 세계관이라고 말하는데 시 한 편을 더 감상하고 그것에 관해서 얘기를 해보도록 해요."

아파트 건물이 올라가는 거리
인부조차 눈에 띄지 않는 회색 건물에
판에 박은 사각으로
검은 구멍만 나 있는 것을
사람들이 들어와 사는 양
바라보고 또 바라보고
한참을 망연히 서 있다, 간다

곧 집이 지어지리라
검은 구멍들도 환해지리라
거기에 초경을 지나는 여자아이가 살고
그의 아버지도 함께 살게 되리라

아무 것도 아닌 것들이
가슴을 뭉클하게 할 때가 있다
생면부지의 사람들이 나를 스쳐갈 때
그들도 나처럼
피붙이가 있는 집으로 들어설 때.

- 시, '그들도 나처럼 집으로 들어갈 때' 모두


"이번 시는 좀 어땠나요? 아파트 건물이 채 지어지지 않았는데 그곳에 사람이 사는 것처럼 기웃거리는 그런 심정을 이해할 수 있겠어요? 여러분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이 시를 쓰기 얼마 전에 선생님이 경험한 일을 얘기해 볼게요.

선생님은 아파트 6층에서 사는데 엘리베이터에서 누가 먼저 5층이나 7층을 누르면 6층을 따로 누르지 않고 그냥 같이 내려서 한 층을 내려가든지 올라가든지 하지요. 그것이 크게 불편하지 않으니까 전기도 절약할 겸 그렇게 하는 건데 한 번은…."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5층에서 내려 한 층을 더 올라가는 것을 깜빡 잊고 그냥 5층 복도로 들어와 남의 집 앞에서 초인종을 눌렀다. 당연히 아내가 나올 줄 알았는데 아내가 아닌 다른 여자가 나를 남편인 줄 알고 맞이하려다가 그만 화들짝 놀라 뒷걸음을 쳤다.

놀라기는 나도 마찬가지였지만 그날 나는 조금 다른 기분을 느꼈던 것 같다. 말하자면 우주나 태양계 안에 사람이 살고 있는 또 하나의 행성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런 기분이랄까?

아무튼 그날 이후 나는 아파트 단지로 들어서는 남자들을 유심히 바라보는 습관이 생겼다. 과거 같았으면 마치 눈송이가 물에 닿아 형체도 없이 스러지듯 스치자마자 잊혀질 그런 운명에 놓여 있던 사람들이었다. 그런 그들이 나와 동일한 생존의 크기로 엄습해 오면서 세상에는 너나 없이 소중한 사람들이 그렇게 살고 있었다는 사실에 새삼 가슴이 뭉클해진 것이었다.

그런 얘기를 들려준 뒤에 다시 한 번 시를 읽어주자 아이들의 얼굴에 이런 저런 표정이 생기기 시작했다. 나는 수업을 갈무리할 시간이 되었음을 알고 이렇게 말을 맺었다.

"로또 복권에서 일등으로 당첨이 되자 고향 마을을 떠난 사람들이 생겼다고 하지요. 그 후 그들은 과연 행복한 삶을 살았을까요?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이 많은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아요. 돈으로 진실을 살 수 있나요? 돈으로 평화를 살 수 있나요? 돈으로 진정한 이웃을 만들 수 있나요? 오히려 그 반대일 수 있어요.

그 사람도 결국 돈 때문에 정든 고향과 이웃을 잃은 것 아니겠어요. 돈에 대한 환상은 수직상승의 욕망과도 일맥상통해요. 지금 우리 지구가 위험에 처해 있는 것도 인간의 무분별한 욕망 때문인데 우리의 가장 소중한 이웃인 자연을 소홀히 한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는 것이지요."

그날 시 공부는 그렇게 끝이 났다. 시를 공부했다기 보다는 시를 매개로 세상 살아가는 이치를 공부한 셈인데 다행히도 그것이 시험에 나오느냐고 물어본 아이는 한 명도 없었다.

실업계 아이들이라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오로지 수직상승의 욕망에 사로잡혀 시나 문학조차 시험성적과 연관하여 들을 수밖에 없는 불행한 아이들이 아닌 것이 다행스럽게 느껴졌다. 수업을 끝내고 나오는 발걸음이 솜털처럼 가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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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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