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멘토, 제 여자친구를 소개합니다

네 번째, 다섯 번째 문이 열리길 기대하며

등록 2005.06.02 15:14수정 2007.08.06 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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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으읍."


영화 속 명장면 같은 키스신을 장장 24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기다렸건만, 그 기다림의 순간은 한 여인에 의해 가차없이 깨져버렸다. 2003년 3월, 대방역 부근 지하도에서 술을 먹고 잠시 헤롱거리던 후배를 일으켜 세우려다, 그 후배의 손에 이끌려 순식간에 입술을 빼앗겨 버리고 만 것.

이에 어쩔 수 없이(?) 눈물을 머금고 솔로 천국(?)의 생활을 접고, 그날부터 지옥의 커플 세계에 입문해야 했다. 그리고 곧 내 인생에서 닫혀져 있던 새로운 문들이 열리기 시작했다. 그 첫 번째 문은 상대방에 대한 배려와 이해심이었다.

"야, 너네 아직도 사귀냐?"
"솔직히 선배 커플이 제일 먼저 깨질 줄 알았어요."

주위의 이런 반응만은 아니더라도 정작 나부터 이 만남이 과연 얼마나 갈까 하는 의구심을 갖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전에 내가 사귄 최장 기록은 고작 한 달하고 5일뿐이며, 최단 기간은 단 이틀이었다.

연애를 시작하기 전에 여자를 꼬시는 재미나, 보이지 않는 밀고 당기기, 그리고 사귀려고 노력하는 동안 극대화 되는 설렘 등 그 과정만을 즐기던 나였으니, 이 모든 과정을 키스 한 번으로 뛰어넘은 이 만남이 오래 지속된다면 그건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우리가 사귄 지 이미 2년을 넘어섰다. '천일동안'이라는 노래를 들으면서 '지겨워서 어떻게 사귀냐'라고 생각했던 내게 그 천일이 곧 현실로 다가온다. 그 시간 동안 정말 대판 싸우기도 많이 했고, 서로에게 감동하는 등 A4용지 10장으로도 모자를 만큼 많은 일이 있었지만, 그 시간 동안 내가 배운 무엇보다 큰 재산은 상대방에 대한 배려와 이해심이었다.

그 전까지 여자친구와 사귐의 순간이 짧았던 것은 쉽게 싫증을 내는 성격 탓도 있었지만, 한 번 싸우면 화만 내버리고 상대방의 말을 듣지 않으려는 내 태도가 가장 큰 문제였다. 막내로 자라 어려서부터 고집을 부리고 말썽을 부리면 귀찮아서라도 부모님이고, 형이고 내 부탁을 들어주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상대방의 심정이 어떤지를 헤아리기보다 내 감정이 어떤지를 알리는 게 우선이었다.


그랬기에, 지금 여자친구와도 '삽들고 싸운다'라는 믿기 힘든(?) 소문이 퍼질 정도로 격렬하게 싸운 적도 많았다. 하지만, 점점 시간이 갈수록 그 횟수는 줄어들고 있다.

"내가 왜 그럴 줄 알아?"
"내 말 듣고 있지도 않잖아."
"성의없어."

싸우면서 수백 번도 더 들은 이 말을 차츰 이해하게 되면서 상대방을 이해하려는 마음이 조금씩 자랐기 때문이다. 나한테 끊임없이 실망하면서도 내 곁을 떠나지 않고, 흔들림 없이 지킨 그녀로 인해 내가 원하는 것만 바랄 수 없음을 깨달았고, 이제는 여자친구와의 관계뿐만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에서도 그 사람 입장에 서보려는 노력을 많이 한다.

그녀가 내게 열어준 두 번째 문은 계획성과 끈기다. 학교에 복학해 과학생회장을 맡았다가 잠시 어머니의 병환으로 그만두려 한 적이 있었다. 이때 그녀가 나서서 나를 돕겠다고 했고, 난 과학생회장으로 그녀는 과부학생회장으로 일을 하게 되었다. 사귀기 이전에는 과학생회장과 학우의 관계였을 뿐이므로 난 최대한 인자한 척 미소를 띄우며 그녀가 학생회일에 대해 쓴소리를 해도, 최대한 감정을 모두 억제한 채 참아내고 받아주었다.

그러나 그녀가 내 여자친구가 되고, 서로에게 보다 편하게 말할 수 있는 사이가 되자, 그녀의 쓴소리를 귀찮다며 듣기 싫어하는 경우가 종종 생기면서 서로간의 다툼도 잦아졌다. 하지만, 그 다툼의 승자는 물론 그녀였다. 그녀가 가장 적극적으로 문제를 제기한 것이 예산이 계획성 없이 방만하게 운영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난 때 되면 그때 가서 알아서 돈 빼서 쓰면 되지라는 입장이었는데 반해, 그녀는 일년 예산이 정해졌으니 미리미리 계획하고 최대한 아껴써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녀가 학생회에 들어오기 전에 내가 썼던 예산에 비해 그녀가 들어오고 나서 학생회 예산은 대폭 절감되었다. 다소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아껴쓰기는 했지만, 미리 미리 계획하고 예상하여 손실을 방지하는 모습은 비록 얼마 없는 내 개인 자산 관리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더불어 모든 행사에 철저한 계획과 준비를 강조하는 그녀 덕분에 완벽하지는 않지만, 미리 미리 하고자 하는 습관도 조금씩 쌓여가고 있다. 또한 그러한 계획들이 어려움이 생기면 쉽게 포기하는 내게 끈기와 인내를 갖게 만들어주었다. 오랜 시간 계획하고 준비했는데, 포기하는 게 아깝고, 계획하고 준비했으니 분명히 성과를 이루어낼 것이라는 믿음이 깔려 예전보다 강한 끈기가 생겼다.

그리고 그녀가 내게 열어준 무엇보다 큰 마지막 문은 '내 여자친구는 클레임 걸'이라는 기사에서도 한 번 언급한 바 있듯, '좋은 게 다 좋은 건 아니다'라는 것이다. 사실 처음 그녀를 사귀는 한동안은 그녀가 시도 때도 없이 클레임을 건다고 생각해서 사람들 이목을 피해 다른 곳으로 숨고 싶을 만큼 부끄러웠던 적도 많았다.

웃으며 사과하며 그냥 받아들이면 되지, 뭐 저렇게 세세하게 뭐뭐를 고치라고 요구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와 다니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사과하는 업체 측의 웃음 뒤에 단순히 그 상황만을 극복하려는 자세만 있고, 정말 고쳐야 할 것은 고치지 않는다거나, 오히려 적반하장격으로 소비자의 무지를 탓하는 경우를 보면서 점점 그녀의 편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그리고 그녀의 편으로 옮겨가게 된 결정적 계기는 바로 내가 <오마이뉴스>에 처음으로 기사를 올렸던 '쿠폰은 무제한 발행, 입장인원은 제한?'이었다. 예전 같았으면 '입장 정원이 초과되었으니 그럴 수도 있지'라고 넘어갔을 일이지만, 그녀를 만난 뒤 난 이미 그런 부당한 일에 대해 넘어갈 수 없는 사람으로 변해 있었던 것이다.

'잘못된 것이 있으면 그냥 넘어가지'가 아닌 내가 조금 고생해서라도 제대로 항의해야 똑같은 잘못을 방지할 수 있다는 생각을 했고, 그 생각이 결국 날 <오마이뉴스>로 이끌어 왔다. 그녀만큼은 아니지만, 현재까지 내 인생에서 중요한 좌표들 중 하나로 움직이고 있는 <오마이뉴스>는 그녀가 없었다면 어쩌면 평생 만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지금은 그녀가 나의 네 번째, 다섯 번째 문도 열리길 바라고 있다.

'이렇게 하면 성공한다'는 류의 책을 수천 수만의 사람들이 보지만, 모든 사람들이 성공하지 못하는 건 그런 원리를 알긴 하지만, 실천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일 터. 나 역시 그녀를 만나기 전, 언급했던 이러한 문들을 알고 있었지만 열려 하지 않았다. 언제나 굳게 닫혀 있던 문을 열 수 있게 적극적으로 문 앞으로 밀어준 그녀가 현재까지 내 인생 최고의 멘토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녀에게서 얻어내고 싶은 건, 시도 때도 없이 당첨되는 그 엄청난 행운이다.

덧붙이는 글 | <내 인생의 멘토> 응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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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넓게 보고 싶어 시민기자 활동 하고 있습니다. 영화와 여행 책 등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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