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엔 재래시장 문닫게 한다면서?"

[현장] '재래시장활성화대책' 발표 일주일, 시장 사람들

등록 2005.06.08 10:20수정 2005.06.09 1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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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정부의 재래시장 활성화 정책이 오락가락하면서 상인들의 불안감도 진정되지 않고 있다. 지난 1월 "재래시장을 살리겠다"는 노 대통령의 연두기자회견 직후 남대문시장의 풍경.

정부의 재래시장 활성화 정책이 오락가락하면서 상인들의 불안감도 진정되지 않고 있다. 지난 1월 "재래시장을 살리겠다"는 노 대통령의 연두기자회견 직후 남대문시장의 풍경. ⓒ 오마이뉴스 남소연

"아니 그게 사람을 살리자는 대책이오, 죽이자는 대책이오."

7일 오전 11시 서울시 중구 남창동 남대문시장. 옷가게를 하는 김길원(44)씨는 공연히 핏대를 세웠다. "장사가 좀 되느냐"는 질문에 "좋은 시절 다 갔다"며 차분히 말을 이어가던 박씨는 재래시장을 살리겠다는 정부 대책 얘기가 나오자마자 언성을 높였다.

"가뜩이나 장사도 안되고 하는데, 정부가 대책이니 뭐니 내놓을 때마다 사람들 가슴이 다 철렁철렁 합니다. 이번에는 재래시장 문닫게 한다면서요?"

잠시 옷을 뒤적이던 김씨는 "높은 사람들이 해도 너무 한다"며 고개를 돌려버렸다.

정부가 '재래시장활성화대책'을 발표한지 꼭 일주일이 되는 이날 둘러본 서울시내 곳곳의 재래시장 상인들은 심하게 동요하고 있었다. 정부는 지난 1일 발표한 재래시장활성화대책에서 전국 570여곳에 이르는 재래시장의 인위적 퇴출을 유도하겠다고 밝힌바 있다.

물론 정부의 대책은 여당 의원들의 거센 반발로 단 며칠만에 뒤집혔다. 인위적인 구조조정은 없던 것으로 하겠다는 얘기다. 하지만 재래시장 상인들은 여전히 안심하지 못하고 있었다.

"여기가 공산주의 국가냐"


"여기 사람들 다 먹고살자고 시장판에 나온 사람들 아뇨? 그런데 정부 대책이라는게 상인들 내쫓고, 무슨 자격증이다, 뭐다…. 정책 세우려면 밑바닥 사람들한테 한번 물어는 봐야지, 내 참…."

또 다른 시장상인 이아무개(53)씨는 혀를 끌끌 찼다. 정부 대책을 성토하던 이씨의 입에서는 급기야 "공산주의 국가냐"는 극단적인 말도 터져 나왔다.


"우리가 무슨 공산주의 국가에 살고 있는 것도 아니고, 장사 하다하다 안되면 제발로 걸어나가는거지…."

이씨는 정부가 내놓은 '청사진'을 아예 믿으려 들지 않았다. "업종을 전환하면 정부가 지원금을 준다고 하지 않느냐"는 말에 이씨는 "택도 없는 소리"라고 되받아 쳤다.

"내가 지금 빚이 여기저기 수도 없어요. 그런데 정부가 돈을 공짜로 준답니까? 그 돈도 어차피 갚아야 할 것 아니오? 빚내서 다른 장사할 바엔 여기서 버티지."

다른 상인들도 이씨와 생각이 비슷했다. 주방용품 코너의 한 상인은 "정부 말 믿다가는 큰코다친다"며 "공짜라면 소도 잡아먹는다는데, 정부 돈 덥썩 물었다가는 나중에 죽도 밥도 안 될 것"이라고 고개를 저었다.

a 재래시장의 한 상인은 "정부 대책이 나올때마다 가슴이 철렁한다"고 말했다.

재래시장의 한 상인은 "정부 대책이 나올때마다 가슴이 철렁한다"고 말했다. ⓒ 오마이뉴스 남소연

국내 간판급 재래시장인 남대문시장은 그나마 사정이 나은 편이다. 중소 영세 재래시장은 정부의 대책 발표 이후 더 큰 불안감을 보이고 있다.

7일 낮 12시께 서울시내 중심가인 서대문에 위치한 영천시장. 이곳은 한때 구파발 너머에서부터 배추 등 채소를 사려는 사람들이 몰려 말 그대로 '문전성시'를 이뤘다. 하지만 지금은 크게 쇠락해 간신히 시장의 명맥만 유지하고 있는 상태다.

"여기 사람들 십시일반 돈 모아서 지붕도 씌우고, 환경 개선하려고 하고 있는데…. 이럴 때 정부가 도와줘야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오히려 재래시장을 없앤다니까 불안하고…."

영천시장의 한 상인은 "정부가 진짜 재래시장을 없앤다는 거냐"고 되물었다. 그는 "장사도 안되고, 요즘은 밤잠도 제대로 못 잔다"고 깊은 불안감을 호소했다.

이곳에서 만난 주부 서순영(49)씨는 "가까워서 자주 오는 시장인데, 요새는 와 보면 손님이 없어도 너무 없다는 생각이 든다"며 "재래시장에 애착을 가진 사람들이 자주 찾을 수 있도록 정부가 실질적인 대책을 내놨으면 한다"고 말했다.

"진짜 재래시장 없애는 거냐"... 진정되지 않은 불안감

본격적인 장사 준비가 한창인 오후 2시께 종로구와 동대문구에서 만난 동대문시장 상인들의 반응도 마찬가지였다. 이불과 베게 등 침구류를 판매하는 김아무개(45)씨는 "지난번 주변 상인들끼리 한번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는데, 모두 정부 대책에 대해 걱정하는 목소리였다"고 전했다.

"몇몇 사람은 장사가 너무 안되니까 이 기회에 (동대문에서) 빠져나갈까 하는 사람들도 있었죠…. 하지만 여기 오래 터를 잡은 사람들은 그렇게 쉽게 생각하지 않고 있습니다."

김씨는 "IMF 때도 버텼는데…."라고 말꼬리를 흐렸다.

반면 또 다른 상인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분위기였다. 리어카 노점상 박일례(55)씨는 "높은데 사람들(정부)이 만든 정책이 아랫사람들에게 무슨 영향이 있겠느냐"며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그다지 상관이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박씨의 말끝은 곧장 정치권을 향한 성토로 이어졌다.

"내사 원래 열린우리당 지지하지도 않았지만, 그래도 서민들이 살기는 좀 나아지지 않았는가 싶었는데…. 요새는 살기가 더 지겨워. 정치인들은 자기들끼리 맨날 싸움이나 하고."

박씨의 리어카에는 '가격인하 세일 30%'라는 작은 종이 푯말이 붙어 있었다. 제품 가격이 내려갈수록, 재래시장 상인들의 '삶의 질'도 덩달아 떨어진다는 의미처럼 보였다.

시장 끝에서 만난 한 상인은 "정부가 돈을 좀 풀어야 한다"고 호소했다. 현금이 오가는 시장에서도 몫돈 구경은 꽤 힘들다는 얘기다.

"정부가 맨날 뺏어 가려만 하지 말고, 실제 돈이든 뭐든 좀 줬으면 좋겠어…. 그래야 없는 사람들도 좀 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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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오마이뉴스 입사 후 사회부, 정치부, 경제부, 편집부를 거쳐 정치팀장, 사회 2팀장으로 일했다. 지난 2006년 군 의료체계 문제점을 고발한 고 노충국 병장 사망 사건 연속 보도로 언론인권재단이 주는 언론인권상 본상, 인터넷기자협회 올해의 보도 대상 등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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