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들이 오페라 맛을 알아?"

문화인이란 십 년 이십 년 크고 자라는 것

등록 2005.06.09 00:14수정 2005.06.09 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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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가족이 오페라를 보러 극장에 갔다. 온 가족이래야 우리 부부에다 대학 때문에 집을 떠나 있는 큰 놈을 빼고 초등학교에 다니는 둘째 녀석이 전부지만 가족이 모두 함께 오페라를 보러 온 것은 처음이 아닌가 싶다.


코믹 오페라 <배비장전>은 이미 그 줄거리가 일반인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는데다 정통 오페라가 아닌 서양 오페라에다 조미료로 우리 국악과 판소리 그리고 코미디적인 요소까지 적당히 버무린 퓨전 오페라라 목젖이 드러날 정도로 깔깔대면서 재미있게 보았다.

좀체 대중화 되지 못하고 있는 우리나라 오페라를 조금이라도 보통 사람들 가까이 다가가 보려는 안간힘으로 읽혀졌다. 극장을 나오면서 보니까 우리 집 둘째 녀석도 꽤나 재미있었다는 표정이다.

그러고 보니 나에게도 거금을 주고 오페라 극장에 갔던 기억이 있다. 오래 전 호주 시드니에서 있었던 국제 세미나 참석차 갔을 때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를 찾았다.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는 너무나 아름다웠다. 바람을 가득 머금고 대양을 향해 막 항구를 떠나려는 범선의 모습 같기도 하고 조개 껍질을 몇 개 포개 세워놓은 것 같기도 한 시드니의 오페라 하우스는 시드니를 대표하는 상징물이자 랜드 마크다.

함께 모시고 간 이사님께서 "우리 시드니에 왔으니까 우아하게 오페라 한번 보러갈까?"라고 말하는 게 아닌가. 그거 그리 나쁘지 않은 생각 같아서 나 또한 "예, 그러시죠"라고 맞장구를 쳤다. 덤으로 그 멋진 오페라 하우스의 내부도 보고 싶다는 욕심도 한 몫을 거들었다.

거리에 붙어 있는 포스터를 보니 다행히 그 유명한 <피가로의 결혼>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반가운 마음에 전화를 해보니 마침 표도 있고 호텔에 배달까지 해주는 지라 내가 갑자기 귀족이 된 느낌이었다. 그게 다 돈의 위력이었지만….


그래서 우리 돈 13만원 정도를 주고 두 장의 티켓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그 날 저녁, 온갖 폼을 다 잡아 가면서 가장 멋있는 정장을 차려 입고 우리는 오페라 하우스로 향했다. 손가락 움직임 하나에도 품위를 생각하면서 고상한 척, 우아한 척, 척- 척-으로 일관했다. 이사님은 기사에게 평소보다 후한 팁도 주었던 것 같다.

드디어 오페라의 막이 올랐다. 어차피 제대로 알아듣지도 못할 것이라면 이태리어였으면 더욱 오페라다웠을 텐데 정작 공연이 시작되고 보니 대사는 영어였다. 영어라도 호주 사람들이나 서양인들도 제대로 알아듣기 어려운 모양인지 무대 천정으로 자막이 계속 흐른다. 허긴 우린들 우리 말 사설로 하는 판소리, 심청가나 춘향전 사설을 어디 제대로 알아들을 수 있던가?


오페라에 대한 호기심은 5분도 못 갔다. 시작하고 담배 한두 대도 못 피울 시간인데도 벌써부터 재미없기 시작한다. 어떻게 재미를 붙여 보려고 노력을 해봐도 재미가 없었다. '그래도 이게 얼마짜리 오페라인데…' 본전 생각에 꾹 참고 무대에 온 신경을 쏟아부었다. 품위를 되씹으면서 오페라를 보았다. 그래도 정말 재미가 없었다.

그 재미없는 오페라를 보면서 교양있는 표정까지 짓고 앉아있으려니 숫제 고문에 가까워졌다. '그 비싼 돈을 주고 내가 이거 무슨 고생이람?' 생각할수록 한심했다. 슬쩍 눈을 들어 옆자리 이사님을 봤더니 이사님 또한 오십 보 백 보인 듯했다. 그도 '교양적으로다가' '교양적으로다가'를 염불처럼 외우고 있음이 역력했다. 그런 기인, 너무나도 긴 인고의 시간이 흐르고 드디어 2막이 끝났다. 드디어 중간 휴식이다. 로비에 나가 와인이나 칵테일 한잔 마시면서 무대를 바꾸는 15분 동안 주어진 쉬는 시간이다.

쉬는 시간이 끝나고 다시 공연이 시작된다는 예비 종이 울었다. 객석을 향해 돌아서는 나의 어깨를 잡으면서 더 이상은 못 참겠다는 듯이 이사님이 불쑥 말했다. "그만 가지" 그 말이 어찌나 반갑던지…. 본전 생각 때문에, 아랫사람의 처지로 차마 먼저 그 이야기를 못하고 있던 참인지라 '그만 가지' 그 한마디는 그야말로 구원의 복음 그 자체였다. "재미없으시다면… 약간 돈이 아깝긴 하지만 그러시죠 뭐" 짐짓 아깝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한껏 생색을 내면서 나도 오페라 극장을 따라 나왔다.

그들이 느끼는 짜릿한 미적 쾌락을 왜 나는 불감증 환자처럼 느낄 수 없는 것일까? 즐거움이 아니라 차라리 '교양적'이라는 이름의 고문이 되고 마는 것일까? 그것은 내가 오페라에 대해 아는 것도 없고 오페라에 대해 체화된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판소리 <춘향가> 완창 공연(약 8시간 소요)을 다 보라고 한다면 나에게나 우리 아이에게나 즐거움이 아니라 명백한 고문일 것이다. 판소리 또한 우리만의 귀중한 문화유산이라는 말만 귀가 따갑도록 들었을 뿐 그것의 재미를 단 한번도 제대로 느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예나 지금이나 우리나라 극단들은 여대생들이 먹여 살린다. 그나마 고등학교 때까지 영화관을 찾던 여학생들이 대학에 들어오면 연극 공연장으로 쏠린다. 변함이 없는 것은 여대생 관객만이 아니다. 연극하는 사람들 또한 그 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춥고 배고프다. 왜 그럴까? 그 여대생들이 정말 연극이 즐겁고 재미있었다면 졸업하고 결혼한 다음에도 남편 손잡고, 아이들 손잡고 극장을 다시 찾아와야 마땅하다.

그러나 사정이 전혀 그렇지를 못하다. 졸업해 대학을 떠나면서 그들은 동숭동도 극장도 함께 떠난다. 그리고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그것은 섭섭하기는 할망정 돌아오지 않는 여대생들을 욕할 일을 아니다. 연극의 재미를 느끼게 해주어야할 것은 여대생들 몫이 아니라 연극인들 몫이고 극단의 몫이기 때문이다.

월선리 예술인촌에서 초등학생들을 위한 여름방학 예술체험 캠프를 한다고 했다. 사군자니, 도자기 체험이니 서당 체험이니… 다양한 예술적 체험 프로그램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 캠프의 교장을 맞고 있는 김문호 선생을 만났더니 자기는 아이들에게 '그저 재미있게 놀다가 가라'고만 한다고 했다.

예술정신이란 유희정신에 다름 아니니 그 말은 지극히 옳고도 바른 말이다. 지식이야 거기 아니고라도 배울 수 있는 곳이 많다. 예술적 즐거움을 느끼고 깨닫게 하는 것 그것이 정말 중요하다. 그것도 어렸을 때 그것을 느끼고 경험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의 가치관은 늦어도 열 살 이전에 완성된다는 인지심리학자들의 보고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말이다. 어렸을 적부터 예술이 그리고 문화가 체화되어야 예술을 지속적으로 소비하는 문화인이 될 수 있다.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르듯이 문화란 그렇게 젖어 가는 것이지 하루아침에 뚝딱 문화인이 만들어 질 수는 없다.

항산(恒産)이 있어야 항심(恒心)이 있듯이 역설적으로는 지속 가능한 예술 소비(자)가 있어야 지속 가능한 예술 생산(자)이 가능해질 것이 아니겠는가? 초등학생들의 예술체험캠프를 당신들이 밥벌이 하는 일이라 생각하지 말고 당신들의 밥그릇을 저축하는 일이라 생각하라고 말해주었다.

비엔나의 대학생들은 '오페라 극장의 입석 신사들'로 통한다. 오페라 극장에서 맨 뒤쪽이자 맨 위쪽은 언제나 제비 꼬리 같은 연미복을 차려입은 채 서서 보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 엄청나게 싼 값의 입석 티켓은 음악의 나라, 오스트리아의 미래를 위한 투자이자 음악의 도시, 비엔나의 내일을 책임질 젊은 지성인, 대학생들에게만 주어지는 특권이기도 하다. 맨 뒷자리의 그들이 맨 위쪽의 그들이 졸업을 하고 나이가 들어가면서 앞쪽으로 그리고 아래쪽으로 이동을 한다. 그 빈 자리는 새로운 젊은이들로 채워지면서 매일 밤 오페라 극장을 밝힌다.

지금 광주에는 문화수도 담론이 무성하다. 그 담론의 중심은 언제나 파리의 퐁피두 센터를 모델로 한 아시아 문화의 전당 건립 이야기다. 공짜표나 생겨야 공연장을 찾고, 만족도는 표 값이나 좌석 위치와 비례하는 그런 시민들로는 어림없는 수작이다. 지금 내가 오페라 보다 더 보고 싶은 것은 오페라 극장의 입석 신사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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