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우리 언제 찜질방 가요?”

쓰레기 통 앞에서 뼈아픈 반성을 하게 된 사연

등록 2005.06.12 18:26수정 2005.06.12 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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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3교시는 수업이 비어 있어서 다른 바쁜 업무가 없으면 혼자서 도서실 청소를 하곤 합니다. 물론 도서실 청소당번들이 있지만 그들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이 제 눈에는 보이는 기이한 현상 때문에 일주일에 딱 한 번 마음을 먹고 교실 세 칸 반짜리 도서실을 한 시간 내내 혼자서 휘젓고 다닙니다.

청소를 다 끝내고 마지막으로 쓰레기통을 비우고 보니 바닥에 더러운 흙먼지와 종잇조각들이 달라붙어 있었습니다. 수돗가로 가서 물로 몇 번 헹구어 냈지만 바닥에 덕지덕지 붙어 있는 오물들은 쉽게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생각 끝에 쓰레기통에 물을 가득 받아 놓고 도서실로 다시 들어와 서가에 꽂힌 흐트러진 책들을 정돈했습니다.

“오늘 청소는 선생님이 다 했어. 너희들은 밀걸레질만 한 번씩 해줄래?”

잠시 후, 청소시간이 되어 달려온 아이들에게 한 말입니다. 그 한 마디에 평소에도 번갯불에 콩 구어 먹듯이 하던 청소가 시작하기가 무섭게 끝이 났습니다. 대신 아이들에게 주말을 이용해서 읽을 만한 책을 권해주고 난 뒤, 녀석들을 앞세우고 종례를 하러 교실로 올라가는데 복도 창가에 서 있던 한 아이가 조르르 달려오더니 이렇게 말을 합니다.

“선생님, 우리 언제 찜질방 가요?”
“찜질방? 그래. 언제 갈까?”
“다음 주에 가요.”
“그럴까?”

반 아이들에게 찜질방에 가자고 말한 것은 며칠 전의 일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아이들에게 산에 가자고 제안한 것과는 좀 성격이 달랐습니다. 말의 유희라고나 할까요? 마치 친구의 차를 얻어 타고 가다가 “우리 이대로 설악산이나 갔다 오세” 하는 식으로 농담 삼아 말을 건네는 것과도 흡사했습니다. 농은 농이지만 만사를 재치고 설악산에 다녀오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듯, 반 아이들과 찜질방에 가서 수다를 떨고 싶은 마음이 간절한 것도 사실이지만 말입니다.

종례를 해주고 교무실로 돌아와 퇴근을 준비하다가 뒤늦게야 수돗가에 두고 온 쓰레기통 생각이 났습니다. 도서실 열쇠를 챙겨들고 수돗가로 달려갔습니다. 쓰레기통에 악다구니로 달라붙어 있던 흙먼지와 오물들은 통을 몇 번 흔들자 신기할 정도로 쉽게 떨어져 나갔습니다. 통에 물을 담아 한참 기다렸다가 씻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면서 마치 시상이 떠오를 때처럼 한 순간 머릿속이 환해졌습니다.


‘아, 그렇구나! 무엇이든 성급하게 하지 않고 기다리면 쉽게 되는구나.’

별 대수롭지도 않은 일로 큰 교훈이라도 얻은 듯한 순간 코끝이 찡해지고 머릿속이 환해진 것은 어쩌면 지난 며칠 동안 을씨년스러웠던 제 마음의 풍경 탓인지도 모릅니다. 요즘 며칠 새 제 마음이 그랬습니다. 학교라는 타율적인 공간 속에서 자신도 모르게 강제에 길들여진 아이들. 그로 인해 말의 위엄이 사라져버린 교실에서 자발성을 상실한 아이들을 만나는 일에 지쳐 있는 제 자신을 발견하곤 했습니다. 한 아이에게 편지를 받은 것도 바로 그 무렵이었습니다.

선생님, 요즘 힘드시죠? 얼굴에 그렇게 써 있어요. 많이 힘들다고. 그리고 많이 피곤해 보여요. 그래서 제가 이렇게 힘내시라고 편지를 써요. 제가 말로는 잘 표현 못해서요. 선생님! 힘내세요. 우리 반 애들이 아직 사랑에 서툴고 익숙하지 않아서 그래요. 저도 저희 아빠한데 직접적인 사랑을 받아 본 적이 없거든요. 그래서 아직 저도 선생님의 사랑이 낯설고 어색해요. 저희 아빠가 저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에요. 단지 아빠도 서툴러서 그렇겠지만. 언젠가는 선생님의 사랑의 의미를 알겠죠. 또 그리울 수도… 주눅 들어 있는 선생님은 싫어요. 항상 웃었으면 좋겠어요.(…)


‘주눅 들어 있는 선생님은 싫어요.’

‘주눅’이란 단어는 ‘기가 죽어 있거나 심리적으로 움츠러든’ 상태를 일컫는 말입니다. 그 말에 저는 정곡을 찔린 듯했습니다. 아프고 또 아팠지만, 마치 반석에서 샘물이 터지듯 알 수 없는 힘이 용솟음치기도 했습니다.

못난 담임을 올곧은 눈으로 응시하고 있는 사랑스런 제자가 있다는 사실이 두렵기도 했지만 그것은 분명 행복한 일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저는 제 자신을 반성하고 싶었습니다. 아이들에게 뜬금없이 찜질방 얘기를 꺼낸 것도 그런 마음의 변화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날 저는 쓰레기 통 앞에서 한 번 더 뼈아픈 반성을 했습니다.

‘나는 혹시 아이들을 사랑으로 길들이려고 하지 않았을까? 그래서 마음이 조급해진 것은 아닐까? 통에 물을 가득 담아 놓듯 아이들 마음에 사랑을 담아 놓으면 되는 것을. 그리고 한 동안 깜빡 잊고 살면 되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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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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