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이야기] '삼순이'와 사랑에 빠진 남편

등록 2005.06.14 20:32수정 2005.06.15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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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목요일(9일). MBC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을 보고난 후 남편에게 특별한 변화가 생겼다. 그 특별한 변화란 다름 아닌 김삼순에게 완전히 매료되어버린 것이다. 드라마를 보는 내내 남편은 말한다.


a 김선아가 스물아홉 노처녀 김삼순으로 분한 <내 이름은 김삼순>

김선아가 스물아홉 노처녀 김삼순으로 분한 <내 이름은 김삼순> ⓒ MBC

"거, 삼순이 매력 있네. 편안한 몸매에 내숭은 저리 가라고. 못할 것 같으면서도 할 말 다 하고. 깍쟁이 같으면서도 어딘가에 약간의 틈을 남겨놓은 듯한 저 편안함. 그래 여자가 저래야 되는 거야. 참 마음에 드네."

드라마를 보는 내내 남편의 입에선 김삼순에 대한 극찬이 그칠 줄 몰랐다. 지금껏 7년을 살면서 남편이 특정 연예인에 대해서 이렇듯 흥분하는 것은 처음 본다. 남편은 그동안 여자 연예인에게 눈꼽 만큼의 관심도 보인 적이 없었다.

오히려 뽀얀 얼굴에 조각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예쁜 여자 연예인들을 보면 한결같이 이 말 한마디 던질 뿐이었다.

"저렇게 꾸미고 치장해서 안 예쁜 여자가 어디 있어? 자고로 여자는 잠에서 금방 깬 얼굴이 예뻐야 진짜 예쁜 거야."

그랬던 사람이 입에서 침이 튀는 것도 모른 채 김삼순에 대한 극찬에 마냥 신이 나있는 것이다.


그런데 참 이상했다. 남편이 여자 연예인에 푹 빠져서 거의 제정신이 아닌데도 나는 별로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아니 기분 나쁜 건 고사하고 여자라고는 이 세상에서 자기 마누라가 제일인줄 알고 살아온 내 남편에게도 저런 면이 있었나 싶어 신기하기만 했다.

그런 남편이 재미있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해서 한참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가만 생각해보니 내가 기분이 나쁘지 않은 건 그 상대가 김삼순이기 때문에 그럴 거라는 판단을 내릴 수 있었다.


같은 여자로서 김삼순을 볼 때도 결코 질투를 느낄 만큼 예쁜 여자도 아니요, 키 작은 내가 주눅들 정도의 팔등신 미녀는 더더군다나 아니었기에 말이다.

일요일 오후(12일). 저녁에 야간작업이 있다는 남편은 다른 때 같으면 업어가도 모를 정도로 잠을 잘 텐데 생기가 철철 넘쳐나는 두 눈으로 무슨 프로그램을 찾는지 연신 TV채널을 돌리기에 바빴다.

"뭐, 찾는데?"
"삼순이!"
"저번 목요일 날 본방송 봤잖아."
"아니. 수요일 거. 그리고 목요일거 한 번 더 보려고."


결국 남편은 <내 이름은 김삼순> 재방송을 보느라 잠시 잠깐 눈 한번 붙이지 않고 야간작업을 나갔다.

새벽녘. 현관문을 열고 남편이 집으로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씻고 안방으로 들어와야 할 남편이 감감무소식이었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니 남편은 아예 컴퓨터 모니터 속으로 들어가려는지 코를 박고 있었다.

a 잠복근무

잠복근무

"뭐해? 안 자?"
"잠깐만. 뭐 좀 찾아보고."
"뭐 찾는데? 중요한 거야? 피곤할텐데 자고 아침에 하지 그래."


남편은 대꾸가 없었다. 도대체 뭘 찾는다고 저러고 있는지 갑자기 궁금해져 남편의 등 뒤로 살며시 다가섰다. 컴퓨터 화면에는 극장 이름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극장은 왜?"
"삼순이 나오는 영화 있잖아. 그 왜 <잠복근무>. 그거 어디서 하나 찾고 있어."
"그건 왜?"
"내일 낮에 우리 그거 보러 가자."


기가 막혔다. 평소에 좋은 영화 한 편 보자고 보채면 "조금 있다, 2000원 주고 비디오 빌려보면 되는데 뭐 하러 비싼 돈 주고 극장가서 보느냐"며 구시대 발상으로 나를 기함하게 만들던 남편이었는데….

낮에 잠 한숨 자지 않고 야간작업까지 다녀온 남편이 김삼순(김선아)이 나오는 영화를 보러 가겠다고 잠자는 것도 잊은 채 그 새벽에 컴퓨터에 코를 박고 있으니 지금껏 내가 보아온 내 남편으로선 정말 획기적인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잠시 후 남편은 아쉬움의 한숨을 토해냈다.

"에이, 영화는 벌써 끝났네. 비디오로 나왔다는데 신 프로라서 이런 시골에선 빌려보지도 못하겠다."

내가 사는 시골엔 비디오 가게가 달랑 두 개 뿐인데 보유하고 있는 비디오 테이프가 한 프로에 고작 두세 개. 그것도 단골들에게 항상 먼저 순서가 돌아가다 보니 단골 근처에도 못가는 우리 같은 사람에게는 신 프로 보기가 하늘의 별따기인 셈이다.

월요일 오전(13일). 남편은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비디오 가게를 간다며 바람처럼 사라졌다. 잠시 후 집으로 돌아온 남편은 한숨을 들이쉬고 내쉬고 하더니 무슨 생각에선지 다시 컴퓨터 앞에 앉았다.

"뭐 하려고?"
"가만 있어봐. 어디 영화 다운받을 수 있는 사이트가 있을 거야."
"에이. 그런 게 어디 있어. 그런 게 있으면 뭐 하러 비싼 돈 주고 영화 보러 가고, 뭐 하러 비디오 빌려 봐."
"아냐. 친구한테 들은 적이 있어."


남편은 한참이나 컴퓨터 앞에 앉아 끙끙거리더니 뭐가 잘 안되는지 다시 비디오 가게에 전화를 하고 있었다.

"아줌마! <잠복근무> 비디오 들어 왔어요? 예. 알았습니다. 연락주세요."

비디오 가게 다녀 온 지 얼마나 됐다고 그 신 프로가 벌써 남편 차례가 되겠는가. 남편은 힘없이 전화를 끊었다.

월요일 저녁. 전날과 마찬가지로 야간작업을 나간 남편은 오후 내내 컴퓨터 앞에서 진을 치느라 역시 잠 한숨 자지 못하고 일을 나갔고 오늘 새벽(14일) 또 들어오자마자 컴퓨터 앞에 앉아 <잠복근무>를 찾아 하염없이 헤맸다.

오늘 오전. 비디오 가게서 전화가 왔다.

"네. 아줌마. 뭐라구요? 그럼 할 수 없죠 뭐. 금방 가겠습니다."
"왜 비디오 들어왔대?"
"아니 그게 아니고 삼순이가 나온 영화가 하나 더 있다는데 우선 그거라도 보려면 가지고 가라고."


비디오 가게를 다녀온 남편의 손엔 <위대한 유산>이 들려 있었다. 남편은 오후 내내 오매불망 자기 가슴을 태우던 삼순이를 만나고 또 만났다. 저녁 거름 야간작업을 나가면서 남편이 불쑥 한마디 한다.

"혹시 비디오 가게서 전화 올지 모르니까 집 비우지 말고 전화 잘 받아."

세상에. 늦바람에 날 새는 줄 모른다더니 나이 마흔 둘에 그것도 기적이 일어나지 않고서는 죽기 전에 얼굴 한번 볼 수 없는 김삼순(김선아)에게 저렇듯 열정을 불태우는 우리 남편.

아마도 우리 남편의 짝사랑은 <내 이름은 김삼순>이 끝날 때까지 '쭈욱' 계속될 것 같다.

그런데 한가지 의문이 묵직하게 가슴 밑으로 가라앉는다.

'도대체 내 남편을 지독한 짝사랑에 빠지게 한 여자는 김삼순일까? 김선아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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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기자회원이 되고 싶은가? ..내 나이 마흔하고도 둘. 이젠 세상밖으로 나가고 싶어진다. 하루종일 뱅뱅거리는 나의 집밖의 세상엔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 곱게 접어 감추어 두었던 나의 날개를 꺼집어 내어 나의 겨드랑이에 다시금 달아야겠다. 그리고 세상을 향해 훨훨 날아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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