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자 캐는 아줌마가 지렁이 무서워하면 돼?"

처가 감자를 캐면서

등록 2005.07.03 10:55수정 2005.07.04 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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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야, 미안해서 어쩌지?”


토요일 퇴근하자마자 아내가 눈치를 보며 말합니다.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어봐도 쉽게 대답하지 않습니다. 다리미질하다가 옷을 태운 것도 아니고 장인어른 입원하신 병원에 문병 갔다가 지갑 두고 온 것도 아니라고 합니다. 설거지하다가 접시를 깨뜨렸다고 내게 미안하다고 한 적은 없습니다.

“답답하게 굴지 말고 빨리 얘기해.”

“엄마가 감자 좀 캐달라고 하던데…….”

지난 주 마늘을 캐고 감자는 캐지 못했습니다. 장인어른이 병원에 계신 탓에 장모님 혼자 들일을 감당하기 어려워 이번에도 전화를 하신 것이지요. 간밤에 술 먹고 늦게 들어온 남편인데 퇴근하자마자 감자 캐러 가자는 말을 꺼내기가 쉽지 않았나 봅니다.

“가서 도와드려야지, 그 감자 우리도 먹을 건데.”


점심을 먹고 잠시 쉬었다가 출발했습니다. 준수와 광수는 시험 기간이라 도서관에 갔습니다. 다행히 비가 그친 상태로 구름만 많은 날씨여서 일하기 힘든 날씨는 아닙니다. 감자를 다 캘 때까지 비가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큰골 밭에 도착해 보니 벌써 장모님이 와 계셨습니다. 비 내린 뒤 감자밭이라 땅이 질었습니다. 물기 많은 곳에 있던 일부 감자는 썩기까지 했습니다. 비 오기 전에 감자를 캐야 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습니다. 땅 속에 있는 감자라도 물기에 젖어 썩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먹을 물 가지고 왔니?”
“응 엄마, 여기 있어.”
“물이 없어 아직까지 밥도 못 먹었다.”
“엄마는, 밥은 잘 챙겨 먹어야지. 여태 안 먹고 있으면 어떡해.”

장모님은 아내가 건네주는 물병을 들고 곳간으로 가셨습니다. 늦게나마 밥 한 술 뜨러 가시는 것입니다. 장인어른 입원하신 뒤로 혼자 들일 하시느라 부쩍 더 힘겨워하십니다. 장모님은 그 고단한 삶의 흔적을 땀방울에 담아 골짜기 밭에 흩뿌리며 살아오셨습니다.

아내가 내게 호미 한 자루와 장갑 한 짝을 주었습니다. 장갑을 챙겨오지 못한 탓에 장모님이 끼고 계시던 장갑을 한 짝씩 나누어 끼고 감자를 캤습니다. 밭이 질어 신발에 흙이 묻어 불편해서 아예 맨발로 감자를 캤습니다. 맨발에 닿는 흙의 촉감이 괜찮았습니다.

바짝 마른 땅보다는 감자 캐기가 수월했습니다. 물기 머금은 땅이라 호미질에 많은 힘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감자 덩굴 뽑아내고 호미로 흙을 파내다보면 감자가 보입니다. 몇 알씩 무리를 지어 모여 있습니다.

이기원

이기원
흙에 묻힌 채로 세상을 향해 처음 얼굴을 내미는 감자를 손으로 주워 내는 기분도 참 좋습니다. 같은 밭일을 해도 김을 매는 일보다는 감자 캐는 일이 훨씬 재미있습니다. 알 굵은 감자를 집어내는 즐거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엄마야, 자기야.”

이기원
한참을 감자 캐는 일에 몰입해 있는데 갑자기 아내가 질겁하며 소리를 지릅니다. 지렁이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비온 뒤라 그런지 밭에 유난히 지렁이가 많습니다. 실처럼 가는 새끼 지렁이도 있지만 때로는 굵직한 놈도 있습니다. 실지렁이 보면 무덤덤하게 그냥 캐지만 굵은 지렁이 보면 호들갑입니다.

“감자 캐는 아줌마가 지렁이를 무서워하면 돼?”

아내는 조심스럽게 지렁이를 호미로 밀어내고 다시 감자를 캡니다. 어찌 보면 지렁이가 더 놀랄 일이지요. 잘못 휘두르는 호미에 찍혀버리면 두 동강이 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렁이를 만나면 감자 골라낸 뒤에 흙으로 잘 묻어줍니다.

감자 캐다 개미집을 파헤치기도 했습니다. 개미가 새카맣게 흩어져 우왕좌왕합니다. 일부 개미는 발등 위로 기어오르기도 합니다. 부서진 개미집 사이에서 감자를 주워낸 후 호미로 개미집을 흙으로 덮어줍니다.

지렁이나 개미 말고도 감자밭에는 다양한 생명체들이 살고 있습니다. 감자 덩굴 사이에 숨어 있던 귀뚜라미도 있습니다. 아직 어리지만 발에 힘은 제법 붙어 있어서 폴짝폴짝 잘도 뛰어 달아납니다. 흙더미 사이를 기어 다니는 거미도 있습니다. 흙 속에 숨어 있던 굼벵이도 있습니다.

이기원
이름을 알 수 없는 곤충도 있습니다. 막 호미질을 하려는데 짝짓기 하는 곤충을 발견했습니다. 한 번의 호미질로 생명마저 사라질 뻔했던 위기의 순간을 아는지 모르는지 녀석들은 꽁무니를 붙이고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녀석들이 있는 흙을 호미로 떠서 안전한 곳으로 옮겨 주고 감자를 캤습니다.

이기원
저녁 무렵 처남이 와서 도와주니 훨씬 일이 빨라졌습니다. 비도 내리지 않아 감자를 다 캤습니다. 곳간에 감자가 수북하게 쌓였습니다. 감자를 나르며 아내와 장모님이 다정하게 이야기를 주고받았습니다.

“엄마, 오늘은 편안하게 자겠네.”
“그래, 감자 다 캐서 맘이 편하다.”
“엄마, 집에 소금 좀 있어?”
“뭐할라고?”
“배추 뽑아다가 김치 담그려고 하는데 소금이 모자랄 거 같아.”
“항아리에 소금 많아. 갈 때 봉지에 담아 줄께.”

어둠이 내리는 하늘 저편으로 검고 묵직한 비구름이 몰려오고 있었습니다.

덧붙이는 글 | 제 홈페이지 http://www.giweon.com 에도 실었습니다.

덧붙이는 글 제 홈페이지 http://www.giweon.com 에도 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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