밭에 가면 내 엄마 같은 포근한 할머니를 만난다

[산채원 촌장일기 12]아이를 순산한 막내며느리도 할머니를 닮았어!

등록 2005.07.05 10:12수정 2005.07.05 18:51
0
원고료로 응원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할머니 사진을 가까이 찍지 못했다. 미안해서 일 하다가 몰래 한 장 찍었는데 참 여유롭게 사신다. 손녀도 할머니와 엄마를 닮기를 바란다.
할머니 사진을 가까이 찍지 못했다. 미안해서 일 하다가 몰래 한 장 찍었는데 참 여유롭게 사신다. 손녀도 할머니와 엄마를 닮기를 바란다.김규환
나는 유명산과 인연을 쉬 놓지 않았다. 7년 전 2년 반 동안 농사지으면서 빈집을 고쳐 민박과 음식장사까지 해봤던 마을이다. 올 봄 <산채원시험포지>에 적지를 찾으면서도 한번 맺은 연결고리를 이어가려했던 건 새로운 사람들을 사귀는데 필요한 일종의 텃새에 대한 고려와 산나물 재배를 위해선 해발 300m 이상이 필요했던 까닭이다.


200평 조금 안 되는 묵힌 논을 연간 8만원에 계약하고 밭으로 만들 땅을 개간하듯 정리해나갔다. 한적한 외딴집 근처라 드나드는 사람이 한정돼있어 더 맘에 들었지만 잡초와 싸울 생각을 하니 앞이 캄캄했다.

그곳엔 외로이 사시는 할머니 한분이 계셨다. 살아계셨으면 내 어머니와 연세가 비슷해보였는데 아직 마실도 자유자재로 하시는 걸 보니 여간 정정한 게 아니었다. 하루 이틀 만나 뵐수록 정감이 가는 분이었다. 깔끔한 외모에 80이 다 되는데도 부지런히 움직이는 모습이 무척 좋아보였다. '어머니가 살아계셨더라면 이렇게 곱게 늙으실 수 있을까?'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두릅이 한창이던 때 몇 사람과 밥과 양념을 준비하여 할머니 댁 은행나무 아래 만들어 놓은 평상아래서 대낮 삼겹살 파티를 하고 있을 때 점심을 같이 하며 술을 한잔 드리게 되었다. 마침 다섯 명에 할머니까지 소주 두병을 나눠 마시니 병아리 오줌마냥 감질났다.

내가 운전을 해야 하니 단 한 병만 더 사오기로 했다. 젊은 양반들이 부족하다는 낌새를 보셨는지 할머니는 댁으로 들어가시더니 시큼한 씀바귀 무침에 검은콩을 넣은 잡곡밥과 소주 두병을 가지고 나오셨다.

"할머니 이건 뭐예요?"
"저기 밭에 있는 씀바귀를 캐서 무쳐봤어요 한번들 먹어보세요."


"잘 먹겠습니다. 근데 할머니 소주는 됐습니다. 저희 그만 먹어도 돼요."
"아니에요. 나도 같이 먹었으니까 조금은 내고 싶어. 고기까지 먹었는데 뭘 이것가지고…."
"이렇게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술 다 마셨어요."

여럿이 나서 말렸는데도 한사코 거두지 않고 손수 병뚜껑을 따고 마셨다. 당신께서는 만난지 며칠 되지 않아 서먹서먹한데도 말동무가 되어준 우리가 고마웠던 모양이다. 어머니 세대지만 젊은 사람 못지않은 감각, 신사다운 면모를 잃지 않고 나눌 줄 아는 미덕을 지녔다는 걸 깨닫게 해주셨다.


밭에 갈 땐 된장에 고추장 김치와 밥만 싸가지고 가 남부럽지 않은 유기농 쌈밥을 즐긴다. 주변엔 또 씀바귀를 포함하여 먹을 게 얼마나 많은가.
밭에 갈 땐 된장에 고추장 김치와 밥만 싸가지고 가 남부럽지 않은 유기농 쌈밥을 즐긴다. 주변엔 또 씀바귀를 포함하여 먹을 게 얼마나 많은가.김규환
칭찬도 아끼지 않으셨다. 대체 내가 무슨 이유 때문에 밭을 가꾸는지 꾸준히 지켜보시던 할머니는 어느 날엔 음식쓰레기를 가져가 주변에서 벤 풀로 덮고 있자 "참 알뜰도 하시우. 쓰레기 봉지 값도 다 돈인데…"하셨다.

"뭘요, 버리느니 퇴비라도 만들어볼까 해서요"라고 말씀드렸더니 "젊은 사람이 모르는 게 없다"며 추켜 세워주시는 게 아닌가. 사실 "이런 것 자주 가져오면 파리 끓어요"라고 할 줄 알았는데 보기 좋게 내 예상을 벗어나는 질문을 하여 나를 또 감동하게 만들었다.

어느 정도 밭 모양이 만들어지고 하나 둘 작물 식구를 늘려가던 차 옥수수 씨앗과 들깨도 빌려서 심게 되고 삼잎국화도 두 뿌리 얻어다 심었다. 갈 때마다 서로 인사를 나누고 대화를 나누던 사이로 발전하여 댁에 계시지 않으면 왠지 일을 마저 하지 못하고 온 느낌이 들 때도 있었다.

간혹 텃밭을 가꾸다보면 어느 시기에 파종을 하고 옮겨 심어야하는지 적기를 놓칠 때가 있다. 벌써 이 마을사람들과 할머니는 들깨 모종을 끝내 뿌리박음을 하고 있는 중이다. 수백 평 들깨를 심는 이곳은 들깨 농사하나는 깨가 쏟아지도록 일가견이 있는 분들이니 나도 이때다 싶어 몇 줄 깻잎이나 따먹으려고 옮겨 심었다.

수차례 김을 맸어도 장마철이라 가장 많은 풀이 올라와 온종일 밭에 붙어있었다. 드디어 할머니가 출현했다. 연로하셔서인지 말소리가 잘 들리지 않아 늘 가까이 가서 큰소리로 외치듯 대화를 나눠야 한다.

밭에 가는 즐거움 하나는 작물 자라는 걸 보는 것이고 둘은 할머니를 뵙는 것이다. 그 다음 즐거움은 그 유명한 방일리해장국을 맛있게 먹는 일이다.
밭에 가는 즐거움 하나는 작물 자라는 걸 보는 것이고 둘은 할머니를 뵙는 것이다. 그 다음 즐거움은 그 유명한 방일리해장국을 맛있게 먹는 일이다.김규환
그냥 인사치레로 "참 비가 많이 왔지요?"하자 "냇가엔 물이 별로 없어요. 근데 오늘 같은 날 무슨 김을 매요. 푹푹 빠지겠네." "이 때 매지 않으면 우거져서 도저히 손을 댈 수가 없어서요." "그런데 너무 가까이 심지 말고…." "예." "밥은 먹었수?" "아뇨 먹으려고요. 오늘은 밥을 싸오지 않아서 잠깐 해장국을 사먹고 오렵니다."

짧은 대화 뒤 2시가 다 되어서 <방일리해장국>집에 가서 맛난 점심을 배불리 먹고 돌아왔다. 우물가에 있는데 할머니는 여전히 부지런히 움직이신다. 무슨 좋은 일이 있었을까? 궁금하여 입을 놀리지 않을 수 없어 다가가니 소녀마냥 싱글벙글 웃으시며 뭔가 풀어 낼 분위기다.

"평상에 유리 누가 갖다놓았어요?"
"아들 친구들이 놓고 갔는데 꿈적도 하지 않아요."
"제가 한번 치워볼게요. 아이들이 노는데도 위험하잖아요."

대형통유리는 무게가 보통이 아니었다. 장갑도 끼지 않고 옮기는데 허리가 휘도록 무거웠다. 잠시 머뭇거렸더니 꼭꼭 숨기고 있던 보따리를 풀려고 내게 다가선다. 5남매를 키우는 동안 할머니는 옥수수와 기장, 조밥, 감자 때문에 시집 오셔서 남들처럼 굶지는 않았다고 했다. 한 달 전부터 막둥이 며느리가 집에 와서 출산을 앞두고 있다는 말씀을 들었던 차다.

"왜요 할머니?"
"손녀딸 봤어요."

"예. 언제요?"
"그제 밤 2시에 가서 30분 만에 낳아 가지고 왔어요. 전날 낮에 온 사람은 아직도 아이가 나오지 않았지 뭐유."
"정말 잘 하셨네요. 고생 않고 낳았다니 다행입니다. 축하해요. 아이도 건강하죠?"
"며눌아기가 젖을 먹여요. 지금 밥 차려주고 나왔는데 내가 복도 참 많지."
"그러게요. 며느님이 참 착하게 생겼더라구요."

며칠 비가 왔다고 말끔히 매줬는데도 오히려 더 풀이 우거져 있었다. 오전 10시에 도착해 저녁 7시 반까지 밭에 있었다. 오금이 저리고 무릎 관절이 삐걱거리도록 일을 했다.
며칠 비가 왔다고 말끔히 매줬는데도 오히려 더 풀이 우거져 있었다. 오전 10시에 도착해 저녁 7시 반까지 밭에 있었다. 오금이 저리고 무릎 관절이 삐걱거리도록 일을 했다.김규환
밭에서 일하는 걸 잊고 진지한 대화가 이어졌다.

"막내아들이 저랑 나이가 같다면서요. 이젠 한 시름 놓으셔도 되겠습니다."
"내가 늘그막에 이런 좋은 일 보려고 살았는가벼."

"할머니 그건 그렇고 우리 아이들 옷을 좀 드려볼까요?"
"……."

머뭇거리고 있는 게 분명했다. 요즘 추세가 자식들에겐 명품과 새것만을 주고 싶어하니 며느리가 마다하면 난감한 일 아닌가. 괜스레 이야기를 꺼낸 내가 후회스러웠다.

"며느님에게 물어보시라구요. 좋으시다면 몇 개 갖다드리겠습니다."

잠시 뒤 집으로 들어가신 뒤 한참 뒤에 내 밭으로 나오셨다. 곰취며 취나물, 참나물과 곤드레를 구경하시고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며눌아기가 그런데 아이들이 참 건강하다고 물려주면 고맙게 입히겠다고 해요."
"예 그래요? 저도 참 조심스러웠는데 젊은 분이 마음씨가 참 곱습니다. 한번 찾아보겠습니다."

"우린 딸 아이라우."
"알고 있습니다."

옛 시골집이 조금 보인다. 몇몇 사람들은 또 가고 싶다고 했다. 들깨 모종은 세개씩 넉넉한 거리를 두고 옮겨심으면 쓰러지지 않으며 땅에 묻힌 마디마디마다 뿌리가 생겨 성장이 훨씬 잘 된다. 가지치기가 잘 되니 수확도 많다는 걸 몇 해 전 이 동네에서 배웠다.
옛 시골집이 조금 보인다. 몇몇 사람들은 또 가고 싶다고 했다. 들깨 모종은 세개씩 넉넉한 거리를 두고 옮겨심으면 쓰러지지 않으며 땅에 묻힌 마디마디마다 뿌리가 생겨 성장이 훨씬 잘 된다. 가지치기가 잘 되니 수확도 많다는 걸 몇 해 전 이 동네에서 배웠다.김규환
할머니가 돌아가자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내는 벌써 나왔냐며 같이 기뻐했다. 30분 만에 나왔다고 하자 순풍순풍 잘 낳을 사람으로 봤단다. 새 옷 하나 사야겠다고 한다. 할머니와 나눈 이야기를 전하자니 대체로 헤지긴 했지만 몇 개는 있을 거란다. 내일이든 모레든 밭에 가면 한보따리 챙겨가야겠다.

할머니 정갈한 마음에 복덩이 며느리에 손녀까지 뭉친 그들 가족이 무척 행복해보였다. 밤 9시가 되어 집에 도착해 몸은 피곤했지만 마음만은 넉넉했다. 오늘 밤에도 허술한 시골집엔 아름다운 꿈을 꾸고 있겠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김규환은 서울생활을 접고 빨치산의 고장-화순에서 '백아산의 메아리'를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6, 70년대 고향 이야기와 삶의 뿌리를 캐는 글을 쓰다가 2006년 귀향하고 말았지요. 200가지 산나물을 깊은 산속에 자연 그대로 심어 산나물 천지 <산채원>을 만들고 있답니다.도시 이웃과 나누려 합니다. cafe.daum.net/sanchaewon 클릭!

이 기자의 최신기사 역시, 가을엔 추어탕이지

AD

AD

AD

인기기사

  1. 1 연극인 유인촌 장관님, 이 일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연극인 유인촌 장관님, 이 일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2. 2 울먹인 '소년이 온다' 주인공 어머니 "아들 죽음 헛되지 않았구나" 울먹인 '소년이 온다' 주인공 어머니 "아들 죽음 헛되지 않았구나"
  3. 3 한강 '채식주의자' 폐기 권고...경기교육청 논란되자 "학교가 판단" 한강 '채식주의자'  폐기 권고...경기교육청 논란되자 "학교가 판단"
  4. 4 블랙리스트에 사상검증까지... 작가 한강에 가해진 정치적 탄압 블랙리스트에 사상검증까지... 작가 한강에 가해진 정치적 탄압
  5. 5 [이충재 칼럼] 농락당한 대통령 부부 [이충재 칼럼] 농락당한 대통령 부부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