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평양에서 내처 말을 달린 권기범 일행이 안주 근처의 운곡 주막에 다다른 것은 거의 새벽이 다 된 때였다. 감영에서 더 이상 뒤를 쫓지 않으리란 계산은 있었으나 매사 불여튼튼. 어찌 되었든 안전한 방법은 파발보다도 빨리 평양을 벗어나는 길 밖에 없었다.
그래서 평양에 거주하고 있는 백호대들이 감영 밖에서 말을 준비해 놓고 기다린 것이었다.
"아이고, 나리 마님 오십니까요."
주막 멀찍이서 말을 내려 천천히 다가왔는데도 잠귀 밝은 중노미가 반갑게 삽짝까지 뛰쳐 나왔다.
"쉬-."
권기범이 입에 손가락을 대었다. 주막인지라 봉놋방에 어떤 이들이 자리를 펴고 있는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염려 놓으십시오. 오늘은 묵고 있는 길손이 없습니다요."
중노미가 안채 마루로 올라가 다그닥다그닥 문을 흔들었다.
"뉘여?"
안에서 잠에서 막 깬, 그러나 다 긴장기가 묻어나는 주막집 사내의 소리.
"운산 나리께서 오셨습니다요."
중노미가 나직이 속삭였다.
"뭐? 나리께서 이 밤중에?"
주막집 사내가 웃통도 거치지 못한 채 버선발로 뛰어 나왔다. 삼복 더위에 옷을 벗고 잤던 때문인지 주모는 아직 나서지 않고 있었다.
"호들갑 떨 것 없어. 말 세 필을 바꿔 주게. 그리고 이 사람들 간단히 요기를 좀 하게 해주고."
권기범이 거두절미하고 용건만 말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요."
주막의 주인 사내는 긴 소리를 내지 않았다. 중노미는 재빠르게 지친 말들에게서 마구를 벗겨 마방의 말들에게 옮겨 씌웠다. 산골 주막에 어울리지 않게 마방을 갖춰 놓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아휴, 납시었습니까요."
주모가 옷을 갖춰 입고 나섰다.
"저…, 긴히 드릴 말씀이…."
주모가 인사를 마치기 무섭게 권기범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그러나 채 몸을 돌리기도 전에 사랑채에서 호들갑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어머나, 오라버니 오셨어요?"
모화가 안길 듯 내처 달려왔다. 단정히 옷을 차려입은 걸 보니 중노미가 나설 때 이미 깨어 있었던 게 분명했다. 호위가 황급히 권기범의 앞에 나서며 달려오는 모화를 가로 막았다.
"아서라, 너희도 이 아이는 잘 알지 않느냐. 서먹하게 그리까지 할 건 무에야."
권기범이 짐짓 호위를 타이르는 듯 했지만 내심 이 어색한 상황을 미연에 막아준 그 호위가 고마웠다.
밉지 않은 외양에 적당히 억척스럽고 적당히 고와보이는 자태가 자못 끌리는 면모가 있는 처자이건만 권기범의 눈엔 이상하게도 석연치 않아 보였다.
"그래, 모화는 잘 있었느냐?"
"몰라요, 오라버니. 기껏 절 데려와 이렇게 외딴 곳에 박아 두실 생각이었단 말이어요? 저도 이번엔 오라버닐 따라 갈테여요."
모화가 떼를 쓰듯 앙탈을 부렸다.
"그래도 잠시만 기다리거라. 머지 않아 동리로 부를 것인즉."
"또 그 말씀이어요. 이젠 민균 오라버님도 보고 싶고 기범 오라버님 곁에도 있고 싶고, 이렇게 뭇사내들이 무시로 드나드는 곳은 이젠 싫사와요."
모화가 점점 콧소리를 하며 투정을 부렸다. 난감해 하는 기범을 주모가 슬며시 기범을 잡아 끌었다. 우물 쪽까지 가서야 저편까지는 들리지 않을 목소리로 은근히 말했다.
"실은, 드리려던 말씀이 바로 이것이옵니다."
"모화 말인가?"
"예. 저 아이를 거두든지 내치든지 하셨으면 합니다. 제 좁은 소견으로야 하루라도 빨리 내치는 것이 옳다 여깁니다만, 그나마도 여의치 않으면 저 아일 운산으로 데려가 주십시오."
"글쎄 왜 그러냐니까."
"저 년과 중노미와의 관계가 심상치 않습니다요. 중노미놈이 주둥이가 여간만 굳은 게 아니어서 그렇지 벌써 여러 차례 중노미놈을 꼬드겨 나리와 운산에 대해 캐물었습니다요. 급기야 이젠 제 바깥 양반에게까지 꼬리를 사르르는 치는 것이 매일매일이 가시방석입니다요. 필시 조만간에 뭔일 낼 년입니다요."
이야기를 끝까지 들은 권기범은 생각에 잠겼다. 상황이 이 지경까지 갔다면 문제는 문제다. 빨리 모화의 실체를 캐내거나 적절한 용단을 내려야 한다. 권기범이 다시 모화 쪽으로 걸어갔다.
"모화야, 진정 나와 같이 가고 싶으냐?"
"예, 오라버니. 술청일은 무서워요. 사내들이 추근거리는 것도 너무 싫고요."
"정 그리하다면 네 뜻대로 하되 사세가 급박하니, 말을 탈 줄 안다면 동행하리로되 그렇지 않다면 예 남는 수밖에 없구나"
모화는 아무 대답이 없이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권기범도 모하의 눈만 뚫어지게 응시했다. 모화도 내려다 보는 그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권기범이 자신을 떠 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여염집 처자가 말을 탈 줄 안다? 앞 뒤가 안 맞는 이야기였다. 만일 탈 줄 안다 사실대로 이르면 의혹을 확신으로 바꾸어주는 셈이고, 모른다 하면 자연스레 권기범과 동행하지 못하게 될 핑계가 되는 것이었다.
"탈 줄 압니다."
모화는 한참을 머뭇거린 후에 모화가 대답했다. 여전히 권기범의 눈을 응시한 채였다. 권기범의 눈이 잠깐 반짝했다.
"가자. 우리와 동행한다."
모화가 옷보퉁이를 챙기는 사이에 찬밥을 물에 말아 후루룩 넘긴 권기범과 호위 둘은 곧장 말 위에 올랐다.
"자 이젠 가자. 갈 길이 머니라."
권기범이 말을 뱉으며 고삐를 잡아챘다. 말이 앞발을 들고는 곧장 앞으로 내달았다. 호위들의 말이 그 뒤를 따르고 모화가 황급히 말에 올라 박차를 가했다. 먼지와 함께 아직 미명이 열리지 않은 불그레한 하늘로 날아갈 듯 무리가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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