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펑 봉기의 상징적인 인물인 펑빠이의 동상이 있는 홍장조창완
김산은 1905년 3월 평북 용천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에 들어갈 나이부터 식민지의 아들이 되어야 했던 그는 11살인 1916년부터 가출을 시작하면서 긴 이방인의 삶에 들어간다. 초반기 무정부주의를 알아가다가, 일본과 중국에서 공부를 한다. 1922년 그의 가장 절친한 벗이기도 한 김충창(본명 김성숙)을 만나 공산주의를 알아간다. 불과 18세 남짓한 1923년에는 공산청년연맹에 가입해 공산주의 잡지인 <혁명>을 간행하기도 한다. 그리고 1925년 가을 김산은 혁명 전야인 광저우에 도착한다.
취재진은 그의 여정 가운데 가장 극적인 광저우와 하이펑(海豊)을 꼼꼼히 돌아봤다. 당시 광저우는 혁명가들의 집산지였다. 김산이 광저우에 도착할 당시에 60여명의 좌우익 전사들이 있었으며, 1927년에는 그 숫자가 800명에 이르렀다. 1927년 4월 15일부터는 공산주의자에 대한 숙청이 시작됐다. ‘광주 꼬뮌’으로 불리는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탄압으로 적지 않은 조선인들이 사망했다.
중국 혁명가들도 1927년 12월 10일을 기점으로 반격을 시작한다. 조선인 전사들 역시 대대적으로 이 봉기에 참여한다. 처음에는 순조롭게 광저우를 장악하지만 차츰 한계에 부딪힌다. 특히 장타이레이(張泰雷) 등은 혁명의 진행방안을 혼동한다. 조선인 전사들은 13일 6시경 황화강(黃花崗)에 집결하라는 말을 듣는다.
하지만 이곳은 그들의 최후 격전장이 됐다. 사실 3000여명의 기의 세력 가운데 적지 않은 조선인이 있었고, 황화강에서만 150여명의 조선인 전사들이 희생됐다. 이를 기리기 위해 광주기의열사능원(广州起義烈士陵園)에는 중조인민혈의정(中朝人民血誼亭)이 세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