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해도 조련장.
“헤엑~헥”
또판개가 혀를 개처럼 늘어뜨리고 그늘에 주저앉았다. 등에 맨 가죽군장을 풀지도 못하고 나무 등걸에 머리를 누인 채 그대로 쓰러졌다.
“우엑, 웍!”
저만치 풀섶에선 만득이가 토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실제 총을 나누어 준 며칠 전부터는 요상하게 생긴 네모난 형태의 가죽 등짐 군장과 좌우에 가죽 탄입대가 붙은 한 치 반 가량 폭의 굵은 허리띠를 지급받았다. 그런데 문제는 아침 삼십 리 달리기에 총을 휴대함은 물론이요 군장과 탄입대까지 착용하고 뛴다는 점이었다.
그간 삼십 리 달리기에 이골이 붙었고 이젠 짚신이 아닌 가죽 장화를 신고 뛰기에 울퉁불퉁한 산오솔길을 뜀에 한결 나음 있다고는 하여도 사흘치 육포와 미숫가루, 그리고 탄약 200발에 해당하는 무게의 나무둥치를 넣은 스무 근 무게의 군장을 지고 뛴다는 것은 죽을 만큼의 고통이었다.
숨이 목울대를 틀어쥔 채 옥죄는 고통이 오면 차라리 죽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을 수십 번도 넘게 했다. 총에 총환이 장전되어 있다면 뛰기를 포기하고 자신의 목을 향해 방아쇠를 당길가 여러 번 생각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삼복 더위가 그윽한 무더위 속에도 비몽사몽간에 뛰다보면 어느 순간 결승점에 달할 수 있었다.
지금은 바로 그 악몽 같은 삼십 리 달리기를 막 끝낸 후였다.
“만득이 성님 괜찮으오?”
입에 거품을 무느라 말 할 기운도 없는 또판개 옆에서 영일이 대신 물었다.
“웁, 우…견, 견딜만 해…”
만득이가 토하느라 오만상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그래도 그만큼이라도 쫓아오니 다행이우, 하마터면 조련병 과정도 못 마치고 창고지기로 전락할 뻔 했수.”
영일이 말했다. 만득이는 총포에도 손방이었다. 처음 사흘간의 화승총 조작 조련 때는 남들의 반도 방포를 못해봤다. 조련관이 들고 있는 서양 회중시계로 2분이 넘어야 겨우 한 번을 장전할 수 있었는데 그나마도 당황한 나머지 화약을 기준양보다 적거나 많이 넣기가 일쑤였고 심지어 총환을 두 개나 장전한 적도 있었다. 그 전 열병 조련 때도 손발이 맞지 않아 ‘고문관’이란 별호를 얻었는데 막상 총포를 받은 이후부턴 증세가 더 심했다.
소문엔 조련관들끼리 중도에 탈락시키잔 공론도 있었다 했다. 그러던 것이 그나마 개화군의 신식 보총을 받고 일체형 총환을 다루게 되면서는 훨씬 수월하게 다루었고 삼십 리 달리기도 곧잘 합격하여 그냥 잔류할 수 있었다.
“아서라,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고, 뭐 하나라도 잘 하는 게 있겠지.”
판개가 군장의 끈을 정리하며 농담처럼 말했다.
“판개성님 너무 그러지 마슈, 난 조련을 마치면 포병에 지원을 할 게요. 대포는 마차로 끌고 다닌다니 이렇게 뛰어다니고 방포하고 하는 일은 없잖겠수. 게다가 적을 보지 않고 죽인다니 손에 피묻힐 일도 없고.”
토하면서도 오기가 동했는지 만득이가 대꾸했다.
“글쎄다. 포병은 아무나 받아준다던? 듣자하니 여기 개화군의 대포는 눈금을 맞춰 높이도 재고 기수의 수신호도 읽어야하고 거리와 각에 따른 셈도 분명해야 한다 하는데 우리 만득이가 그걸 할 수 있을런지?”
“아, 걱정말라니깐요. 내 보란 듯이 포병이 되어 보일 터이니!”
만득이가 되알지게 한 마디를 했다.
“만득이 성님이 포병이 되면 난 절대 보병은 안 할라오. 만득이 성님이 쏜 포환은 필경 우리 행로에 떨어질 것이 분명할 것인즉.”
기력을 찾은 또판개가 농담으로 받았다. 좌중이 웃음바다가 되었다.
“그렇다고 포병은 더 위험하지 자칫 만득이가 포환이라도 떨구는 날에는 포진영 모두가 날아갈 판인걸?”
여태껏 가만히 있던 영중의 농담으로 또 한바탕 깔깔거리며 배를 쥐었다.
“어이, 참… 영중 성님까지… 글쎄 두고 보래도….”
만득이의 항변에 모두들 재미있다는 표정을 짓는데 그늘에 앉은 어린 조련병만이 말수가 없었다.
“금항이 너는 안 우습더냐?”
영중이 옆자리로 다가가 말을 붙였다.
“아… 예….”
체구는 어른만큼 컸어도 아직 다 자라지 않은 티가 역력한 금항이란 아이는 그냥 살짝 웃고는 입을 다물었다.
“아픈 기억은 가슴에 묻는 게 아니란다. 피처럼 온몸을 돌아 자꾸 몸을 괴롭히지. 어렵더라도 육신 밖으로 털어내려무나.”
영중이 금항의 얼굴을 똑바로 보지 못하고 말했다. 배를 타고 이곳에 당도할 때까지도, 아니 이곳에서 조련을 시작할 때까지도 있는지 없는지 존재감을 느낄 수 없었던 아이였다. 그저 여기에 오기엔 어린 나이다 싶으면서도, 열 일곱이 넘었다 하고 키가 그럴싸하니 아니 될 건 없었겠다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러다 얼마 전 사령실에서 사람이 다녀간 후로 금항이가 평양 사주전 건으로 덮쳤던 유기전 집 큰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영중 자신도 금항이를 눈여겨 본 적이 없어 한 눈에 알아보진 못했지만 어렴풋이 기억이 나는 것도 같았다.
‘그런데 금항이가 자신이 평양 감영의 포졸이었단 사실을 기억할까? 못 알아본 탓일까? 알면서도 모르는 척 하는 탓일까?’
여러 의문의 들었으나 어차피 자신과 동생 영일이 벙거지 출신임이 밝혀진다 해도 여기까지 온 이상 문제될 것은 없으리라 생각했다.
“고맙습니다. 염려해 주셔서….”
금항이가 일어서며 말했다.
“…….”
영중은 금항이의 마음을 속 시원히 알기가 어려웠다. 독사눈 조련관도 금항이에게만은 각별히 대해 주었다. 혀를 깨물고 죽은 개화당 일원의 자식이라는 게 마음을 움직였으리라. 그러나 독사눈 조련관의 호의에도 금항은 별반 굽신거리는 일은 없었다.
‘녀석의 성정때문일 게야.’
영중이 속으로만 생각하는데 멀리서 조련관의 외침이 들렸다.
“자 휴식 끝. 전원 집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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