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와 맞바꾼 3박4일 여행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을 가다

등록 2005.07.31 10:38수정 2005.07.31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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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나 부산 좀 갔다올게"
"일 때문에 가니?"
"아니…, 나 회사 그만 뒀어. 여행 가는 거야."
"뭐? 조심해서 갔다와."

이른 새벽, 딸래미로부터 불시에 퇴사+부산행 통보를 받은 울 엄마 얼굴엔 순간 '황당, 어이없음'이라는 글자가 새겨졌다. 난 울컥 할 것 같아서 애써 엄마 얼굴을 외면했다. 짧은 인사만 남긴 채 기차 시간을 핑계 삼아 후다닥 집을 빠져 나왔다. 너무도 죄송스러웠지만 나로선 최선이었다. 자꾸 눈물이 나오려 해서 입술을 지그시 물었다.

2002년 갑작스레 결행된 부산행. 원래는 의도치 않았었다. 사실 난 바로 전날 입사한 지 열흘 된 회사에서 희망퇴직 했다. 한 여름 피나는 구직활동 끝에 겨우 얻은 직장에서 말이다. 한 달 반 만에 다시 백조신세로 전락한 나. 분명 화딱지 나고, 열이 뻗쳐야 정상이건만 그저 얼떨떨했다. 환영회날 차이니즈 레스로랑에서 요리 먹으며 하하호호 했던 게 엊그젠데, 며칠 후 허름한 중국집에서 짬뽕 먹으며 환송회를 하는 기막힌 상황이라니. 미치고 팔짝팔짝 뛸 노릇이지만 난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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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해운대에서 쏟아지는 햇살을 맞으며. ⓒ 문수경

'혹시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 구경 가라는 신의 계시가 아닐까.'

때는 바야흐로 아시안게임이 한창 종반으로 치닫고 있던 10월. 올림픽, 아시안게임 같은 종합스포츠국제대회 직접 관전해보는 게 소원이었던 난,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결단을 내렸다. '떠나자, 답답한 서울을!, 가자, 활기찬 부산으로!' 직장 구하러 뛰어다니느라 한여름 피서는 언감생심이었던 지라 뒤늦은 휴가가 설레고 들떴다. 그때 '나, 이제 백조구나'라는 생각이 퍼뜩 들어 잠시 멈칫했지만 얼른 마음을 다잡았다. '그래, 백조라는 신분은 잠시 잊자'.

부산에 도착하자마자 곧장 배드민턴 경기장으로 향했다. 체육관 입구에 들어선 순간, 나도 모르게 활짝 웃었다. 꽉꽉 들어찬 관중석. 자국 국기를 흔들며 열심히 응원하는 동남아시아 관중들. 응원열기 때문인지 체육관은 후끈거렸다. '그래, 바로 이 분위기야'. 배드민턴 강국 답게 우리나라 선수들은 모두 승승장구. 아싸! 다음날도 배드민턴 경기장으로 출근했다. 한국 선수들 역시 파죽지세. '도대체 왜 이렇게 잘하는 건데' 정말이지 짜증날 정도로 잘했다.

그 다음날은 남자배구 결승전을 보러 갔다. 한국 금메달! 시상대 맨 위에 늠름한 모습으로 서 있는 선수들을 보노라니 눈물이 찔끔 나왔다. '저 자리에 서기 위해서 그동안 선수들은 얼마나 많은 땀과 눈물을 흘렸을까'. 아울러 2등에게도 진심으로 박수를 쳐주었다. '멋진 경기 보여주고 게다가 져줘서 고마워요'.

해운대 놀러 갔을 땐 마침 여자 마라톤 선수들이 지나갈 거라고 해서 도로변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일단 집에 전화부터 때렸다. "언니야, 지금 마라톤 봐봐. 나 나올지도 몰라". 그러자 옆에 계시던 엄마가 한 말씀 하셨다. "기장 미역이나 좀 사와라".

드디어 저만치서 1등으로 달려오는 선수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누굴까? 누굴까? 두근두근 콩닥콩닥 긴장되고 떨렸다. 아! 저 선수, '봉봉 남매'로 유명한 북한의 함봉실 선수 아니던가. 손바닥이 부서져라 박수를 쳐댔다. 파이팅! 목이 터져라 외쳐댔다(우리의 '봉봉 남매'는 동반 금메달을 따냈다).

무엇보다도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한가로이 광안리 해변을 거닐고, 시원하게 뚫린 바닷가를 바라보며 광안대교를 질주하고, 해운대에서 쏟아지는 햇살을 맞는 기분은 한 마디로 '판타스틱'했다.

한바탕 꿈을 꾼 듯 했다. 3박4일간 즐거웠다는 말밖엔 할 말이 없었다. 그래서 인간지사 새옹지마라는 말을 하는 건가 보다 했다. '내가 만약 회사를 계속 다녔다면 사무실에 콕 처박혀서 일만 하고 있었겠지. 직장생활과 맞바꾼 3박4일간의 부산기행. 후후 회사 그만 둘 당시엔 막막하고, 앞이 노랬지만 사실은 탁월한 선택이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평생 간직할 소중한 추억을 만들어줬으니까.

여름 잘 나는 법! 글쎄~ 남들처럼 삐까뻔쩍한 여름휴가는 아니었지만, 아니 엄밀히 말하면 가을휴가였지만 내가 충분히 즐거웠던 이유는, 좋아하는 사람들과 가고 싶은 곳을 함께 갔기 때문이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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