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은선대피소가 돼버린 옛 은선산장. 이젠 겨울에 누가 새들에게 모이를 줄까.김유자
가지 말라고 소매를 꼭 붙들고 놓아주질 않는 은선폭포 전망대를 야멸치게 뿌리치고 빠져나와 조심스럽게 몇 걸음만 더 오르막길을 올라가면 하얀 건물이 보입니다.
여기가 오늘 제 산행의 목표인 은선산장이랍니다. 예전에 제가 관음봉을 넘어 갑사로 가는 길에 빠지지 않고 들르던 참새 방앗간 같은 곳입니다. 아들은 컵라면을 들고, 저는 산장 주인이신 김기순 할머니(78세)와 이야기를 나누다 가곤 했습니다.
산장의 문을 열려고 잡아 당겼습니다. 그러나 이게 웬일입니까? 산장의 문이 굳게 잠겨 있으니 말입니다. 그제야 찬찬히 주위를 둘러보니 산장은 이름마저 은선 대피소로 바뀌어 있었던 것입니다.
산새들에게 모이를 주고, 업둥이를 데려다 키운 산장 할머니
작년 겨울이라 해야 불과 몇 개월이 전인데 그새 산장이 문을 닫아버린 것입니다. 그때 이곳에 들렀을 때 산장을 지키고 있던 사람은 할머니의 맏며느리인 정애진씨였습니다. 산새를 벗 삼아 3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계룡산을 지켰던 김할머니께서 치매를 앓고 계신 시아버지를 돌보기 위해 마을로 내려가셨기 때문입니다.
계룡산에 눈이 쌓여 산새들이 먹이를 찾기 힘든 겨울철이면, 김할머니께서는 모이를 손에 쥐고 산새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그러면 박새, 곤줄박이 등 산새들이 할머니의 손바닥까지 포르르르 날아와서 모이를 물고 갔답니다.
김할머니에 대한 이야기는 몇 번이나 지역 매스컴에 소개돼 계룡산을 자주 찾는 사람들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제가 계룡산을 오를 때마다 이 곳에 들르는 이유는 정작 따로 있답니다.
예전에 이 은선산장에는 일곱 살 때부터 데려와 키웠다는 업둥이가 있었습니다. 우리 아들과 똑같이 정신지체 1급이었던 이 업둥이를 처음 본 것은 아마도 그가 스무 살 후반 무렵이었을 겁니다. 여기 들를 대마다 그 업둥이를 보고 있노라면 제 아들의 미래를 보는 것 같아 가슴 한 쪽이 저려오곤 했습니다.
재작년 겨울인가. 제가 이곳에서 쉬고 있으려니까 며느리가 지게에다 라면 두 박스를 지고 올라오더군요. 눈길을 헤치고 동학사에서 이곳까지 거지반 5리가 다 되는 길을 끙끙대며 말입니다.
정말이지 요즘 그런 며느리가 어디 있습니까. 노가다꾼도 아니고 배울 만큼 배운 여자가 선뜻 이 곳까지 지게를 지고 힘들게 올라오겠습니까?
그분을 위로할 겸 슬그머니 그 업둥이의 근황을 물었습니다. "그 사람이 지고 올라오면 좋을 텐데…"하는 생각이 들어서였습니다. 그런데 얘기를 들어보니 그 업둥이도 나이가 들더니 점점 꽤가 늘어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지게를 지려 하지 않는다더군요.
김할머니도 그렇지만, 며느리도 자기 할 일이 따로 있고 게다가 젊기까지 하니 아무래도 산장을 지킨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웠을 거라 짐작합니다.
때때로 나를 멈추게 했던 것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래도 서운한 마음을 애써 누르며 산길을 터덕터덕 내려왔습니다. 이런 어미의 마음은 아랑곳없이 하산 길 내내 뭐가 그리 좋은지 앞서 가는 아들 녀석은 마냥 희희낙락 합니다.
문득 언젠가 읽었던 '바퀴에 대한 명상'이란 부제가 붙은 반칠환 시인의 '나를 멈추게 하는 것들'이란 시가 떠올랐습니다.
보도블록 틈에 핀 씀바귀꽃 한 포기가 나를 멈추게 한다
어쩌다 서울 하늘을 선회하는 제비 한두 마리가 나를 멈추게 한다
육교 아래 봄볕에 탄 까만 얼굴로 도라지를 다듬는 할머니의 옆모습이 나를 멈추게 한다
굽은 허리로 실업자 아들을 배웅하다 돌아서는 어머니의 뒷모습은 나를 멈추게 한다
나는 언제나 나를 멈추게 한 힘으로 다시 걷는다
-반칠환 시 '나를 멈추게 하는 것들' 전문
비록 제가 시인은 아니지만, 보도블록 틈에 핀 씀바귀 한 포기가, 그 포기하지 않는 생명이 기특해서 걸음을 멈추고 물끄러미 바라볼 때가 저라고 왜 없겠어요?
바쁘지도 게으르지도 않은 손놀림으로 나물을 다듬는 할머니의 손을 바라보기도 하고, 아들을 배웅하다 돌아서는 어머니의 뒷모습에, 그 뒷모습에 담긴 쓸쓸함에 오래도록 눈길을 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시도 때도 없이 제 걸음을 멈춰 서게 하는 것은 아들의 뒷모습입니다. 새끼를 키우는 세상의 어미들은 누구나 마찬가지일 테지만 말입니다. 멈춰 서서 아들을 바라보는 순간마다 "저 녀석을 어찌 키워 사람 구실을 하게 만드나" 싶어 수 십 번, 수 백 번도 더 절망하게 됩니다.
그러나 아무리 팍팍한 세상살이에도 어디에선가는 반전의 기미가 움트고 있기 마련입니다. 시인도 "나는 언제나 나를 멈추게 한 힘으로 다시 걷는다"고 말하고 있잖아요.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를 멈추게 한 힘으로 다시 힘을 내 아무 일 없는 듯이 살아가곤 합니다.
저를 멈추게 하는 힘이 무엇이냐고요? 그것은 바로 사랑이 아닐는지요. 그 사랑의 내용물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면 거짓말처럼 희망이 담겨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