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용택 전 국정원장의 99년 홍 회장 발언은 X-파일과 무관

[정치 톺아보기 99] 서경원 1만달러 수수설 해명차원서 비롯

등록 2005.08.01 08:07수정 2005.08.01 0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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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는 지난 7월 22일 저녁 9시 뉴스데스크에서 국가안전기획부의 불법도청 X-파일 내용을 집중 언급하면서 이렇게 보도했다.

"97년 대선 당시 홍석현 중앙일보 사장의 비밀임무는 엉뚱한 곳에서 처음 폭로됐다. 지난 99년 천용택 국가정보원장은 사석에서 김대중 대통령이 홍석현 사장으로부터 돈을 받았다는 말을 불쑥 꺼냈다. 파문이 커지자 홍씨는 삼성의 부탁을 받고 개인적으로 한 일이라며 법적으로는 문제가 없다고 해명했다.

정치권이 한때 시끄러웠지만 말실수를 한 천용택 국정원장이 사임하는 것으로 이 일은 흐지부지됐다. 이번에는 MBC가 입수한 안기부의 내부보고문건을 통해서 홍 사장의 모습이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즉, MBC 보도에 따르면, 천용택 원장은 99년 12월 15일 당시에 이미 이번에 불거진 X-파일의 내용을 보고받고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MBC뿐만 아니라 대다수 언론들도 천 원장이 X-파일 내용을 보고받았기 때문에 99년 12월 15일 당시 국정원에서 개최한 오찬 기자간담회에서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의 정치자금을 언급한 것으로 추정해 보도했다.

천 원장, 서경원씨 '1만 달러 수수설' 해명하다가 '홍 회장 정치자금 수수' 거론

그러나 <오마이뉴스>가 당시 상황을 기록한 기자의 취재수첩을 복기한 결과, 이와 같은 추정은 사실과 다른 것으로 확인되었다.

우선 당시 천 원장은 서울지검 출입기자들과 가진 간담회에서 '오프 더 레코드'(비보도)를 전제로 서경원 전 평민당 의원과 정형근 한나라당 의원의 고소고발 사건 관련 조사내용 및 국내 정치상황, 북한 내부사정 등 민감한 상황에 대해 비교적 소상히 설명했다. 당시 정치권은 2000년 4월 총선을 4개월 앞두고 김대중 대통령에 대한 정형근 의원의 '빨치산 발언'과 서경원 1만 달러 수수설 유포 등으로 여야가 서로 고소고발하는 등 첨예하게 대립하던 시기였다.


따라서 이날 간담회는 처음부터 끝까지 '비보도'를 전제로 한 것이었다. 천 원장도 이날 간담회에서 "나는 군인출신으로 해서는 안될 말도 있을 수 있으니 이 자리에서 나눈 얘기는 100% '오프'(비보도)로 하자"고 전제하고 약 1시간 20분간 서울지검 출입기자 20여명과 오찬을 하며 이런저런 민감한 얘기를 나눴다.

국정원의 업무 가운데 간첩단 수사결과 등 대공 업무는 서울지검 기자들이 처리해왔기 때문에, 그동안 국정원 간부들과 검찰 출입기자들이 1년에 두 차례 정도의 간담회는 가졌었다. 그래서 이 자리에도 천 원장 이외에 황재홍 공보보좌관, 대공수사국장과 대공수사 2단장 등 3명이 배석했다.


그러나 정형근 의원이 12월 16일 자신과 관련되어 언급된 부분을 개인적으로 입수해 공개한 데 이어 이부영 한나라당 원내총무가 김 대통령의 정치자금 언급 부분을 공식적으로 밝힘으로써 '오프 더 레코드' 하기로 한 내용이 17일자 신문에 대서특필되었다.

그러나 당시 천 원장은 김대중 대통령의 정치자금에 대해 얘기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김 대통령이 서경원 전 의원한테서 1만 달러를 받았다는 한나라당 정형근 의원의 발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대통령은 절대로 문제가 되는 돈을 받은 적이 없다"면서 다음과 같이 김 대통령의 '전언' 형식으로 홍 회장의 사례를 들었다.

천 원장이 문제의 발언을 한 99년 12월 15일 당시 녹취록

"대통령이 97년에 대선자금을 받을 때도 정치자금법이 통과(11월14일)되기 전에는 기업체의 돈 받아도 불법이 아니었거든요. 누구나 받을 수 있게 되어 있었어요. 그때까지 받았다는 거예요. 사실 홍석현(당시 중앙일보 사장)이가 삼성 돈을 가지고 그전에는 와서 한번 받았대요. 그런데 그 법 통과된 날 가져온 것은 그 다음 '빠꾸'시켰다(되돌려보냈다)는 거예요. 그때 받았으면 (나중에 보광그룹 탈세 사건으로 홍 회장이 구속되었을 때) 큰일 날 뻔 했다는 거죠.

그런 신중성 때문에 지금까지 살아 남았다는데, 서경원이가 북한에 가서 받아온 돈(1만 달러), 김대중이가 받겠습니까? 김대중이가 그때 사회적으로, 사상적으로 여러 가지 말('색깔' 공세)을 듣고 있는 세상이었는데, 그건 말이 안되는 소리거든요."(* 필자주 : 위 내용은 당시 천 원장의 발언을 그대로 녹취해 푼 것이고 괄호 안은 필자가 단 주석임)


천 원장의 발언은 정치자금과 관련 김 대통령이 한 발언를 전하는 형식이다. 이같은 사실은 당시 이 사건을 크게 보도한 조선·동아일보, 경향신문 등 다른 언론들이 전한 천 원장 발언 요지에서도 확인된다.

"대통령은 서경원씨로부터 1만 달러를 받을 이유가 없다고 거듭 확인하면서 97년 정치자금법 개정 이전에는 홍석현(중앙일보 회장)씨로부터도 정치자금을 받았다고 말하더라. 그러나 개정 이후로는 돈을 전혀 받지 않았다고 했다."(조선일보, 99년 12월 17일)

"DJ는 서경원 전 의원으로부터 1만 달러를 받을 이유가 없다고 거듭 확인하면서 97년 11월 정치자금법 개정 이전에는 홍석현 중앙일보회장으로부터도 정치자금을 받았다고 말하더라. 그러나 개정 이후에는 돈을 전혀 받지 않았다고 했다."(동아일보, 99년 12월 17일자)

"대통령은 절대로 문제가 되는 돈을 받은 적이 없다. 대통령은 정치자금법이 개정되기 이전인 97년 홍 회장(당시 중앙일보 사장)으로부터 정치자금을 받았으며 97년 이후에도 홍 회장이 '삼성 돈'을 싸들고 왔으나 정치자금법에 위반된다며 거절했다. 그때 받았으면 큰일날 뻔했다. 대통령은 문제가 되는 돈을 받아서는 절대 안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경향신문, 99년 12월 17일자)


천 원장 경질 이유는 경솔한 '대북발언' 때문

'비공개' 기자간담회 내용이 언론에 크게 보도되자 천 원장은 사의를 표명했으나 청와대는 이를 반려하고 그 대신 문제의 기자간담회를 기획한 황재홍 공보관이 '오프 더 레코드'를 막지 못한 책임을 물어 경질하는 선에서 일단 마무리했다.

그러나 야당이 국정조사를 요구하고 여당 내부에서도 경질론이 제기되면서 옷로비 의혹 사건 특검수사 결과가 발표된 이후에 민심 수습 및 생산적 정치로 새천년을 맞기 위한 차원에서 12월 23일 천 원장을 경질하고 임동원 통일부장관을 국정원장으로 기용했다.

공개되어서는 안될 천용택 원장의 '홍석현 정치자금 수수' 발언이 공개된지 1주일만이었다. 당연히 정치권과 언론은 문책 경질인사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 발언 때문이 아니었다. 김 대통령이 더 큰 문제로 받아들인 것은 "국정원은 북한 최고 권력자의 움직임과 내부 사정을 손금 보듯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다"는 등 천 원장의 대북 관련 발언이었다.

왜냐하면 99년 12월은 이미 임동원 통일부장관의 '전략적 지휘'를 받은 김보현 국정원 5국장이 북측에 남북 정상회담 개최 메시지를 건네는 시기였다. 물론 현대도 대북사업의 정상적 추진을 위하여는 남북관계의 획기적 진전이 필요하다고 보아 남북 정상간의 직접 만남을 주선하기 위해 움직이는 시기였다.

그런데 천 원장의 발언은 북한을 자극해 우리측의 진의를 왜곡해서 받아들이게 할 가능성이 컸다. 따라서 그럴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 남북 정상회담을 물밑에서 준비중인 임동원 통일부장관을 김대중 대통령은 국정원장에 기용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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