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J정부 도청' 부실한 발표 왜 나왔나

[정치 톺아보기 101] 도덕적 순결주의와 아마추어리즘

등록 2005.08.12 18:06수정 2005.08.22 1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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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은 18일 중앙언론사 정치부장단과의 오찬에서 국가정보원이 지난 5일 "김대중 정부에서도 도청이 있었다"고 발표한 것에 대한 질문을 받고 "이게 정권 차원의 엄청난 사건으로 비화돼 버리니까 나도 지금 당황해 있는 상황이다"고 밝혔다.

노 대통령은 이어 "그리고 ‘참여정부 도청 없었냐?’ 물으면 그거 말을 할 수가 없다"면서 "그래서 ‘수사 결과 봅시다’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라고 해명했다. 요컨대, 국민의 정부에서나 참여정부에서 정권 차원의 불법감청은 없었다는 것이다. 왜 이런 상황의 역전이 벌어진 것일까.

"민주당의 주장은 사실을 덮으라는 말인가. 국정원의 발표내용은 국정원 자체의 불법도청 사실을 밝힌 것이다. 국민의 정부 시절에 청와대가 도청을 지시했다는 것이 아니다. 이처럼 내용이 명백함에도 불구하고 민주당이 왜 그렇게 흥분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8월 11일 오전 김우식 대통령비서실장이 주재한 일일현안점검회의에서 민주당의 음모론에 대해 논의한 뒤 나온 청와대의 공식 반응은 이랬다.

형식은 민주당의 음모론을 반박하는 것이지만, 그 내용은 "국민의 정부 시절에 청와대가 도청을 지시했다는 것이 아니다"는 데 방점이 찍혀 있다. 즉, 김대중 전 대통령은 국정원 불법도청과 무관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국정원은 대통령 직속기관이라는 점에서 이 방점은 '엎질러진 물 담기'였다.

'사족'이 돼버린 국정원의 해명

노 대통령이 휴가중인 지난 5일에 발표된 국가정보원의 '과거 불법 감청 실태보고'에 따르면, "96년부터 디지털 휴대폰이 상용화되기 시작함에 따라, 98년 5월~2002년 3월 간 초보적인 수준의 휴대폰 감청장비를 개발하여 운용하면서 불법감청에도 일부 사용"했다는 것이다.


국정원은 "당시 김대중 대통령은 평소 자신이 '정치사찰과 도청의 최대 피해자'임을 강조하면서 누차 (도청을) '반드시 없애라'고 지시했으나 국정원에서는 과거 관행을 완전히 탈피하지 못한 채 불법감청을 일부 답습함으로써 근절하지 못하였다"는 해명도 덧붙였다.

국정원 회견장에서 김만복 기조실장은 "(국민의 정부 시절에) 불법감청 관행이 일부 있었으나 개정 통비법 시행 이후인 2002년 3월 이후 완전히 없앴다"면서 "국민의 정부 시절 어떤 특정인을 대상으로 감청한 사실은 없다"고 해명했다.


국정원 감찰실장도 일문일답에서 녹취록은 안 남아도 당시 실행한 사람이 있을 것 아니냐는 질문에 "감청 업무 근무했던 사람의 기억을 살려야 하는데 대부분 합법적 감청을 하다가 극히 제한적인 불법감청을 하기 때문에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명했다.

요컨대, 국정원의 해명은 '일부 관행'에 의한 '극히 제한적인 불법감청'이었고, 그나마 '2002년 3월 이후 완전히 없어졌다'는 것이다.

국정원은 이런 해명으로도 못미더워서인지 발표문 말미에 "김대중 대통령께서 강력한 근절 지시를 내리셨음에도 불구하고 국정원이 지난날의 잘못된 관행을 즉시 탈각하지 못하고 한동안 불법감청을 함으로써 '세계적 인권지도자'로서 김대중 전 대통령의 업적과 명예에 조금이라도 누를 끼치지 않을까 송구스러우며 이에 대해 깊이 반성하고 용서를 구한다"고 정중하게 예(禮)를 갖추었다.

그러나 이날 국정원의 '과거 불법 감청 실태보고' 발표를 취재한 모든 언론은 '김대중 정부도 4년간 불법 도감청'이라는 제목을 큼지막하게 뽑아 이를 보도했다. '국민의 정부 시절에도 불법감청이 있었다'는 고백 앞에서 '극히 제한적인 불법감청이었다'는 국정원의 해명은 '사족'일 뿐이었다.

문희상 의장은 뒤늦게 "김 전 대통령께서 일부 언론의 황색저널리즘 때문에 졸지에 피해자에서 가해자로 둔갑하게 된 것은 너무나 억울한 일"이라고 안타까워했지만, 그것은 언론을 탓할 일이 아니다.

왜 최대 피해자가 하루아침에 가해자로 둔갑하는 일이 벌어졌나

비록 김 전 대통령이 직접 불법감청청을 지시했다는 고백은 아니지만 국정원은 대통령 직속기관이라는 점에서 그는 대통령이 지게 돼 있는 무한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더구나 그는 도청 같은 반인권행위의 대척점에 서 있는 노벨평화상 수상자이다.

바로 이런 연유로 국정원을 관장하는 국회 정보위원인 최재천(열린우리당·서울 성동갑) 의원은 10일 기자간담회에서 "도감청의 피해자였던 김영삼 대통령의 문민정부 들어서는 5명의 비선조직을 통해서만 도감청이 실시됐고, 국민의 정부에 와서는 DJ가 '정보정치'를 원하지 않아 비선조직조차 없앴다"며 "조직적으로 도감청을 했던 이들은 비난하지 않고 DJ 정부 시절에 '확인되지 않은 불법 도감청'을 동등하게 비교해 비난하는 현실이 슬프다"고 말한 것이다.

그렇다면 왜 역대 정부에서 이뤄진 불법 도감청의 최대 피해자가 하루아침에 가해자로 둔갑하는 슬픈 현실이 전개된 것일까. 도대체 왜 '안풍'(안기부 예산의 선거자금 불법전용)과 세풍(공기업 동원한 대선자금 모금 공작), 그리고 북풍(대선 북한 활용공작)·총풍(대선 당시 북한측에 판문점 총격요청 미수공작)에 이르기까지 온갖 불법 정치공작을 자행한 안기부를 국정원으로 개혁한 역대 국정원장 네 명이 죄다 불법 도감청을 묵인지시한 혐의로 검찰에 소환될 처지에 있는 어이없는 상황이 벌어진 것일까.

결론부터 밝히면, 이 어이없는 국정 혼돈은 김대중 정부 시절에도 '극히 제한적인 불법감청이 있었다'는 고백을 처음 접한 김승규 국정원장의 아마추어리즘과 문재인 민정수석의 도덕적 순결주의, 그리고 이 둘을 결합한 노 대통령의 안일한 국정운영의 '3위일체' 탓이다(노 대통령은 18일 중앙언론사 정치부장단 오찬간담회에서 이런 부분을 사실상 시인했다).

노 대통령은 8일 가진 긴급 기자간담회에서 음모론에 대해 이렇게 질타했다.

"이 사건은 그냥 터져나온 사건이지 우리 정부가 파헤친 사건이 아니다. 특히 대통령이 파헤친 사건은 더더욱 아니다. 터져나온 진실에 직면했을 뿐이다. … 지금 내가 그 의무를 위반하고 무슨 사실을 덮어버린다고 하면 나를 위해서 일한 참모들이 다음 정권에서 또 불려 다녀야 되지 않나? 이 악순환을 어디선가 끊어야 된다. 왜 김승규 원장이 다음 정권에서 또 사실을 은폐했던 사람으로 계속해서 언론에 오르내리고 검찰에 불려다녀야 하나? 나는 김승규 원장이 다시는 검찰에 불려가는 일이 없어야 된다고 생각한다."

아마추어리즘과 도덕적 순결주의, 그리고 안일한 국정운영

김승규 원장이 다음 정권에서 불려다니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누군가가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는 노 대통령의 인식은 지당한 당위론이다.

그러나 세계 어디에서도 국가 정보기관의 수장이 자국이 비밀리에 개발사용한 감청장비의 성능을 공개하는 '이상한 나라'는 없다. 그것은 자국의 정보역량을 그대로 노출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원장에 부임한지 한달도 채 안된 '아마츄어'에 불과한 김승규 국정원장은 국정원이 20억원 이상을 들여 개발한 이동식 휴대폰 감청장비인 '카스'(CASS)의 제원과 성능, 그리고 '사용후기'까지 상세히 발표하게 했다.

"동 장비는 45kg 정도 무게로 차량에 탑재하여 휴대폰 사용자의 200m 내까지 접근하여야만 감청이 가능한 것으로서 99년 12월 20세트를 개발해, 2000년 9월까지 약 9개월간 사용한 후 기술적인 한계로 사용을 중단. 이 장비는 특정 대상자를 근거리에서 추적해야만 감청할 수 있는데다, 휴대폰 사용자가 기지국 섹터를 옮겨가면 감청이 중단되는 등의 단점이 있어 효용성이 매우 떨어졌으며…"

국가 정보기관이 수십억원을 들여 개발해 사용한 감청장비의 제원과 성능을 이렇게 공개한 것은 명백한 국정원법 위반이다. 만약 일반 직원이 이런 내용을 외부에 누설했다면 국정원직원법 위반 혐의로 구속될 수도 있는 사안이다.

국정원법을 정면으로 위반한 김승규 국정원장

그러나 부임한지 한달도 채 안된 '아마추어 국정원장'이 김대중 정부에서도 "극히 제한적인 불법감청이 있었다"는 현장요원의 고백만 듣고 대경실색해 제대로 진상 파악도 하지 않은 채 서둘러 청와대에 보고하고, 도덕적 순결주의로 무장된 문재인 수석과 노 대통령이 "모든 것을 숨김없이 공개하라"고 해서 나온 것이 바로 그 전례를 찾기 어려운 국정원의 '과거 불법감청 실태보고' 발표이다.

크건 작건 그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정보기관의 '불법감청'은 김영삼 정부에서도 김대중 정부에서도 그리고 노무현 정부에서도 이뤄지고 있다. 다만, 노 대통령도 뒤늦게 인정한 대로 그것이 정권 차원(도청)인지 아니면 현장에서 관행적으로 이뤄지는 것(감청)인지의 차이는 중요하다.

지금 당장이라도 누군가가 '참여정부에서도 극히 제한적인 불법감청이 있었다'고 고백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 노 대통령 자신도 이제 와서는 "참여정부에서도 도청이 없었냐고 물으면 그거 (자신있게) 말을 할 수가 없다"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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